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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4)—홍군음악가 최음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30일 10:35
1930년대 상반기, 중국공산당을 따라 홍군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쏘베트정부의 정치, 군사활동과 생산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뿐만 아니라 문화선전사업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조선민족의 음악적재질을 과시하여 홍군의 전투와 생활을 노래하고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군중정책을 선전하는 많은 음악을 창작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음파(崔音波)이다. 


답사팀은 서금에서 엽평과 사주패를 보고나서 저녁녘에 서금시혁명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박물관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안내일군이 각 곳에 전화를 하여 문의해보아서야 겨우 박물관위치를 찾아냈다. 그도 그럴것이 정부청사를 옮긴 다음부터 각 부서와 관련 부문들이 전부 각 곳에 분산되여있었기때문이다. 게다가 박물관같은 곳은 평소 찾는 사람이 많지 않기때문에 아무리 현지인들이라해도 잘 모르고있었던 것이다.


주소도 명확히 표기되지 않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5층짜리 주민 아파트가 나타났다. 아파트의 4층을 박물관 사무실로 림시 사용하고있었던것이다. 박물관을 찾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기때문에 우리가 4층 혁명박물관 책임자를 찾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퇴근준비를 하고있었다. 더우기 박물관 관련자료와 전시물들을 지금 공개할수 없다는 소개를 듣고 우리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현재 혁명박물관으로 사용할 자리가 없기때문에 관련자료와 전시물은 모두 짐으로 꿍져 보관하고있으며 소중한 부분은 가장 안전한 무장부(武装部)에 보관시켰다는것이다. 훌륭한 자료들을 찾아보려는 의욕으로 불타던 우리에게 있어서 큰 실망이 아닐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기때문에 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홍군시기 특히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조선혁명가들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고있으니 전문가들에게 부탁해 단서로 될만한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하였다.

2월 13일 아침, 우리는 아침을 먹고 일찍 떠나 혁명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에서는 관련 자료를 찾아놓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홍군대학과 특과학교의 주소가 밝혀졌다. 옛 사진도 있었고 지금의 정확한 주소까지 밝혀있었다. 그러니 주소에 따라 찾아가면 이 두 학교 유적지를 답사할수 있을것 같았다.


혁명박물관에서 제공한 《중국공산당쏘베트구역사전(中共苏区辞典)》에 양림에 관한 략력이 있었다. 대부분 학자들이 연구해낸 경력이였지만 양림이 중앙쏘베트지역의 월감군분구 사령원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은 강서를 중심으로 호남, 복건, 광동의 부분적 지역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월감군분구라면 강서와 광동지역을 포함하고 양림은 이 지역 홍군부대와 적위대(赤卫队) 훈련을 책임진 사령원이였던것이다. 그리고 《외외풍비(巍巍豊碑)》라는 책에서는 진의(陈毅) 다음으로 《삐스티(毕士悌) 중앙쏘베트지역 중국공농홍군대학(中国工农红军大学) 군사총교관(军师总教官)》이라고 소개되여있었다.

박물관에서 제공한 자료에는 또 홍군대학의 옛 모습을 찍은 소중한 력사사진도 있었다. 더욱 고마운것은 홍군대학과 홍군 특과학교유적지는 찾기 힘들기때문에 관련 일군들이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하였다.전날 크게 실망했던 우리의 마음은 다시 더워지기 시작하였고 힘이 솟아났다. 더욱 많은 자료들을 보지 못해 유감이지만 이만한 단서만으로도 이번 답사가 헛되지 않을것 같았다.

서금시 혁명박물관에서 가장 큰 발견은 조선인 작곡가 최음파에 대한 자료였다. 중국공산당쏘베트구역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중앙쏘베트구역의 저명한 가곡가 조선인 최음파가 지은 노래 <사표곡(梭镖曲)>은 격정이 높고 경쾌하며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 조선음악가 최음파에 대한 연구는 깊지 못하다. 오수권(伍修权)을 비롯한 홍군출신의 로인들의 회억에서 홍군시기의 최음파에 대해 얼마간 언급될뿐이다.


최음파는 20세 젊은 나이에 상해로부터 강서성 정강산혁명근거지에 가서 홍군에 참가하였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그는 근거지에서 문예공연과 선동공작을 많이 하였다. 당시 홍군에는 음악가가 몇사람 되지 않았고 현지 농민들도 다수가 서양문화를 몰랐기때문에 최음파의 바이올린연주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고 큰 인기를 누렸다. 쏘베트지역군민들은 그를 《조선족 작곡가》, 《우리의 바이올린수》라고 불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홍군부대는 초창기부터 정치사상사업과 군중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홍군은 전투부대뿐만아니라 군중들과 한마음이 되여 정치사상을 적극 선전하는 대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하여도 홍군의 선전사업은 강연하고 삐라를 뿌리며 표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는것을 주로 하였다. 문예공연은 매우 적었고 가극은 더욱 적었다. 당시 쏘베트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곡에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를 불렀다. 특히 쏘련곡이 많았다.

훌륭한 음악재능을 지니고 바이올린을 곧잘 다룬 최음파는 홍군의 문예선전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던것이다. 그는 몇몇 안되는 음악가들과 함께 홍군을 노래하고 공산당을 노래하며 군민의 정을 노래하는 수많은 노래를 창작함으로써 쏘베트지역 인민의 노래를 풍부히해주었다.

1931년 제1차전국쏘베트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자 그는 대회를 경축하여 쓴 가사에 곡을 붙였다.

《전국 쏘베트 옹호 대표대회(擁護全國蘇維埃代表大會)》라는 이 노래의 가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국로농대표대회가 열렸네


   혁명승리의 신호포


       동원되고 무장하여 일떠서니


       강철같은 홍군 백만이라네.


간결한 가사였지만 격정에 넘치고 힘찬 곡을 붙였기때문에 얼마후 노래는 쏘베트지역 군민이 모두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그후 로농홍군학교가 설립되자 최음파는 학교구락부의 일원으로 선전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들은 문화수준이 낮은 학생들의 상황을 파악하여 문화오락행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정치, 군사, 문화지식을 전수하였다. 특히 최음파의 바이올린연주는 학생들의 절찬을 받았다. 최음파는 구락부 기타 성원들과 함께 매주 두차례 문예야회를 열고 자체로 창작한 연극, 가무, 재담을 공연하였고 이럴 때면 최음파의 바이올린독주가 마냥 인기프로였다. 학교 교장이였던 엽검영도 여러차례 공연을 보고 구락부활동에 큰 지지를 주었다.

《9.18》사변후 장개석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군대를 끌어모아 중앙쏘베트지역을 포위토벌하였다. 북방에서 온 많은 국민당부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점차 홍군쪽으로 넘어왔다. 1931년말 강소성에서 국민당부대가 봉기를 일으키고 봉기대오는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왔다. 봉기한 국민당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모택동은 홍군선전대를 파견하였다. 최음파는 선전대의 요원으로 봉기부대 장병들에게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선전대의 공연에 감화를 받은 장병들은 장개석을 타도하고 공산당을 따라 혁명할 의지를 더욱 굳히게 되였다.


국민당 제4차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친후 홍군의 첫 극단인 《8.1극단》이 조직되였다. 극단의 주요 성원이였던 최음파는 로농극사 사가(社歌)에 곡을 붙였고 극단을 따라 수많은 공연에 참가하였다.


공연때마다 최음파는 바이올린 독주뿐만 아니라 늘 사람들에게 조선가곡을 들려주었다.씩씩한 홍군전사이며 음악가인 최음파가 작곡한 전투적인 노래와 아름다운 바이올린곡조는 중앙쏘베트지역 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최음파는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예술을 투쟁의 무기로 삶고 청춘을 빛낸 조선인 예술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의 출생년대와 고향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들도 지금 전해진것이 없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음악가라면 연안에서 성장한 인민의 음악가 정률성만을 알고있지 홍군시절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혁명과 음악창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최음파에 대해서 알려진것이 너무 적어 가슴이 아팠다. 그가 남겨놓은 노래도 어딘가 있을것 같았지만 자료들이 모두 무장부에 보관되고 또 짐으로 싸놓았다니 당분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더 많은 전문가들이 이 단서를 가지고 연구하고 자상히 찾아본다면 언젠가는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중국공산당 조직사자료(中共组织史资料)》 제2권에는 홍군시절의 다른 한 조선인 군사 장령의 이름이 나온다. 중국로농홍군 제22군 군장에 진의, 참모장에 장세걸(张世杰) 조선인이라고 밝혀있다. 그러나 조선혁명가 장세걸에 대해서도 더 이상 연구가 없다. 강소성 홍군근거지시절의 자료를 보면 장세걸은 공산당 상해 한인지부에서 강소성으로 파견한 군사간부로서 그곳에서 홍군부대 사장을 담임하고 싸우다가 무장투쟁이 실패한후 중앙쏘베트구역으로 온 간부로 알려져있다.

홍군시기 작곡가 최음파와 고위 장령(将领) 장세걸에 대한 더 구체적인 연구가 없는것이 안타까웠다.

박물관에서 최음파와 장세걸에 관련한 단서를 더 찾기 위해 박물관 림시자료실을 보자고 하였다. 책임자는 자료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서 극구 반대하였다. 우리가 먼 길을 찾아오기가 쉽지 않고 또 관련자료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거듭 사정해서야 열람이 허락되였다.

박물관의 간소한 림시자료실은 아파트의 1층에 있었다. 그곳에서 홍군이 만든 《홍색중화(红色中华)》와 《홍성보(红星报)》를 찾아보았다. 34년 좌우로 여러권 뒤져보았지만 조선혁명가들에 관련한 내용은 더 찾지 못했다. 더 많은 시간을 내여 천천히 자료들을 더 찾으면 훌륭한 자료를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서금박물관의 내부자료도서.

필사적-양림의 신분에 대한 소개자료.


홍군제1군단 참모장을 맡은 양림에 대한 기록(양림은 좌권의 전임으로 홍군의 주력부대였던 제1군단 참모장을 반년간 지냈다).

홍군 22군 참모장 장세걸에 대한 기록자료.

홍군이 출판한 《홍색중화》 자료를 찾고있는 답사팀


서금시 혁명박물관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후 안내일군과 함께 홍군대학유적지를 찾아떠났다. 조선혁명가 양림이 총교관을 맡아 한동안 홍군대학 학생들을 훈련시켰다는 곳이다.

서금에서 홍군대학 유적지까지는 멀지 않았다. 서금시 사주패진(沙州坝鎭) 대포촌(大布村) 대와(大窝)에 이르니 산사이로 뻗은 길가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도로곁에 낡은 단층집들이 늘어선 비교적 빈곤한 마을이였다. 마을서쪽 산기슭으로는 홍토가 쌓여있는것이 보였고 그 주변 드넓은 언덕에는 과원이 있었다. 홍토가 보이도록 파놓은것은 철도를 부설하고있기때문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산기슭과원에는 키 낮은 귤나무가 가득하였다. 강남의 유명한 귤나무였다.

우리는 산을 향한 과원의 오솔길을 따라 한동안 걸었다. 안내원이 과원 한복판의 넓은 평지를 가리키면서 이곳이 홍군대학옛터라고 알려주었다. 그냥 과원의 한가운데 자리였다. 부근에는 귤나무만 있을뿐 아무런 건물도 없었고 옛터라는 표적이 될만한 것도 없었다.

귤나무를 새로 심은 홍군대학 옛터.

홍군대학을 설명해주는 서금박물관의 일군.

박물관 안내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1933년 10월 17일,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홍군대학을 설립하였다. 대학건물은 학원들이 스스로 나무를 베다 지었다. 홍군이 장정을 떠난후 학교건물은 너무 헐망해 무너져버렸다 한다. 하장공(何长工)이 일임교장으로 있었고 1934년 양림이 학교 총교관을 맡았다.


제3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있은후 모택동과 주은래는 쏘베트정부와 홍군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중국로농홍군 북상항일선언(中国劳农红军北上抗日宣言)》을 발표하였다. 선언이 발표되자 7월 22일, 양림은 홍군중앙통신사를 통해 《홍군북상항일옹호선언(红军北上抗日拥护宣言)》을 발표하였다. 그는 선언에서 오직 쏘베트정부와 홍군만이 전국인민을 령도하고 무장할수 있는 통수이며 항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였다.


북상항일옹호선언을 발표한후 양림은 중앙홍군대학으로 전근되여 사업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엽정 독립퇀의 창시인의 한사람이고 또 중앙정부 집행위원인 양림을 홍군대학에 보내는것은 급별을 너무 낮춘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림은 이를 개의치 않고 홍군대학 군사간부양성에 몰두하였다. 홍군장정을 앞두고 중앙홍군대학과 산하 여러 학교는 간부퇀(干部团)으로 편성되였다. 양림은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장정길에 올랐던것이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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