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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1)—“붉은 도시” 서금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7.26일 12:02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굴할줄 모르는 중국인민들은 중국전역에서 혁명활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고 강서, 호남, 호북, 광동, 광서, 섬북 도처에 농촌혁명근거지가 나타났다. 하나 하나 점점의 불꽃이 광야의 거세찬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국공분렬후 중국공산당은 피 아픈 상처을 안고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하여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위대한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권립 교수):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에 우리 당은 농촌혁명근거지를 건설하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며 종국적으로 도시를 탈취할데 관한 모택동의 신민주주의혁명로선에 따라 농촌쏘베트구역을 건설하였습니다.중앙쏘베트구역은 강서성 서금을 중심으로 한 중앙혁명근거지를 가리킵니다.》

광동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답사팀은 홍군의 수도였던 강서성 서금(瑞金)으로 가기 위해 광주시 기차역으로 갔다. 길에서 문뜩 김치와 랭면 생각이 나서 저녁은 조선음식점에서 조선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장기사에게 물어보니 기차역부근에 한국음식점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음식은 엄청 비쌌다. 할수 없이 한그릇에 35원 하는 랭면을 한사람 하나씩 먹었다. 늘 밥 두그릇을 먹던 우리는 랭면 하나로는 도저히 안 되였다. 한국식 랭면이여서 맛도 잘 맞지 않았지만 더우기 량도 적었던것이다. 우리는 랭면 한 그릇씩 더 시키기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여 밥을 사서 랭면국에 비벼들었다.

저녁 식사후 우리는 기차역에서 기사 장씨와 작별했다. 광주답사기간 늘 함께 다닌지라 작별하기가 자못 기분이 이상하였다. 20대 총각인 장씨도 퍼그나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회사 퇴근시간이 훨씬 넘었고 그래서 장씨를 금방 돌려보냈다. 우리가 역으로 들어가려는데 장씨가 막 달려와 기차역에서 조류독감검사를 하면 꼭 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걱정해주는 그의 성실하고 열정적인 인품에 코가 찡해남을 느꼈다. 우리는 역에 들어가 강서성 감주(赢州)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감주까지 가려면 7시간 넘게 기차를 타야 했다. 그리고 감주에서 다시 차를 바꾸어 타고 서금으로 가야 했다. 서금에는 기차가 통하지 않기때문에 감주를 거쳐가야만 했던것이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새벽 2시경에 기차에서 내릴수 있을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부터 분주히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니 일찍 잠자는것이 좋았지만 좀처럼 쉽게 잠들수 없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손중산을 따라 신해혁명을 참가했던 신정, 두려움 없이 적을 저격하였던 의렬단의 의사들,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에 참가해 피흘리며 싸웠던 조선혁명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태껏 력사연구나 답사는 무미건조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력사인물들이 살아 숨쉬는듯 우리에게 다가왔고 늘 그들과 대화하는듯하여 좋았다. 그들의 사상과 성격, 인품 그리고 굴함없이 항쟁하는 강의함에 늘 감동을 받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수시로 검토해보게 되였다.

답사팀이 탄 기차가 강서성남부의 주요 도시 감주에 도착하였다.등불이 희미한 기차역을 나와보니 여기서 하차하는 려객은 얼마 되지 않았다. 텅 비여있는 넓은 기차역 광장에는 몇몇 장사군과 택시기사들이 있을뿐이였다. 몇명 기사들이 몰려와 열심히 자기 차를 타라고 권하였다.

택시기사들과 서금으로 가는 택시료금을 흥정하였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들도 우리가 낯선 외지인인줄 번연히 알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처럼 일찍부터 나와있는걸 보아서도 서로 동업이 이루어진것이 분명했다. 이들을 제치고 따로 택시를 구하려면 꼭두새벽인터라 어디에서든 택시를 잡지 못할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렇다고 지금 시각에 장거리뻐스를 타러 갈수도 없었다. 남방이라 하지만 새벽녘의 추위는 자못 심했다.

끝내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차는 곧바로 감주를 떠나 서금으로 향했다. 3시간 정도면 도착한다고 하였다. 날이 어두웠기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가로등만 밝게 켜진 감주를 그냥 그렇게 지나쳐버리고말았다.

차는 도시를 벗어나 323번 국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서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 얼마 안되여 잠들어 버렸다. 호기심에 가득 찼던 촬영기자도 캄캄한 차창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냥 잠들어버린듯 소리없었다. 날이 훤히 밝을무렵 점점 더 추워났다. 추위에 정신이 조금 들었지만 그냥 자려고 애썼다.

차가 많이 낡았기때문에 열풍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택시기사가 자기도 추웠던지 열풍기를 켜서 차를 덥혔다. 몸이 따스해지자 다시 잠들어버렸다. 차가 날이 채 밝지 않은 서금시에 들어서서야 모두들 잠을 깼다. 그만큼 배도 고팠던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생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차창을 스치는 강서 농촌의 풍경.

쉽게 찾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서금시 당위원회가 어느 일반인 가정을 찾기보다도 더 어려웠던것이다. 기사가 현지인들과 열심히 물어보았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같은 강서성이라지만 서금과 감주 방언이 조금 다른것 같았다. 표준말로 대화하려니 그들은 알아들어도 그들이 하는 말은 역시 방언이여서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웠다. 너무 일찍한터라 거리에는 행인이라곤 없었다. 일찍 일어나 길을 쓰는 도시 청결일군과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파는 장사군이 있었을뿐이였다. 어떤 사람은 이쪽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저쪽이라 하여 우리는 갈팡질팡 20여분이나 헤맸다.

겨우 믿음직한 사람에게 물어서 찾아가보았더니 철대문이 굳게 닫힌 어느 자동차부품회사였다. 그처럼 큰 시정부가 아무런 간판도 없을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더 알아볼수도 없었다. 기사도 이젠 맥을 버리는듯싶었다. 지나는 길에 장춘빈관(长春宾馆)이 보였다. 일단 주숙부터 해 놓고 볼판이였다. 매대에 가 물어보니 카운트아가씨가 간판이 없던 그 위치가 시정부가 분명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원래 시정부청사는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광장곁에 있었는데 최근 시정부를 옮겼다고 하였다.

그런대로 짐을 4층까지 들고 올라가 침대가 셋인 방에 행장을 풀고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아침 너무 일찍 다른 사람에게 페를 끼치기 싫어 7시까지 기다렸다가 서금시당위원회 선전부와 련락하였다. 선전부의 언론분야를 책임진 뢰우정(赖雨亭)씨와 련락이 되였다. 우리가 이미 도착하였다는것을 알리고 장춘빈관에 주숙을 잡았다고 알렸다. 뢰우정씨가 8시에 마중오겠다 하니 우리는 아침 먹으러 나갔다.

서금은 비교적 번화해보였다. 평원지대여서 부지면적이 꽤 컸고 소도시로서는 인구가 근 60만명에 달해 비교적 많은 편이였다. 7,8층 되는 건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도시는 록화가 잘 안되였고 별로 어떻다 할 도시시설도 없었다. 주요한 거리를 내놓고 기타 거리들은 배수가 잘되지 않아 오물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 간이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 되였다. 주인은 물고기를 비롯한 료리 3개를 올렸다. 그리고 사발을 내놓으면서 밥은 주방 큰가마에 있으니 먹을만치 스스로 떠다먹으라는것이다. 우리는 주방에 들어가 밥 한사발 떠다가 료리를 해서 먹었다. 물고기 료리가 먹을만하고 기타것은 더 저가락이 가지 않았다. 밥 먹고나서 값을 치렀는데 16원이였다. 광주에서 배도 부르지 않던 랭면 한 릇에 35원을 주던 일을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갔다.

장춘빈관에서 뢰우정씨를 만났다. 서로 인사를 마치자 그는 이곳 빈관이 루추하고 불편하니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강서반점(江西饭店)으로 갔다. 정원도 가진 비교적 훌륭한 호텔이였다.

서금시당위원회 선전부 류량(刘亮)부장이 로비에서 기다리고있었다. 40대초반인 류부장은 조금 실팍한 사내였는데 매우 열정적이였다. 방에 자리를 정한후 류부장이 서금의 발전상황을 소개해주었다.

서금시는 최근년간 도시건설투입을 늘이고 부근 혁명유적지들을 보수함으로써 국내외 관광객들을 많이 유치하고있었다. 외국상인들을 유치할 조건은 아직 역부족이였지만 광동, 복건성과 린접한 우세를 리용하여 경제가 비교적 발달한 광주, 심수, 하문의 상인들을 유치하고 나아가서는 향항, 오문, 대만지역의 상인들을 유치하는것을 주요목표로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도시중심에 위치했던 시정부청사도 향항, 대만 상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광장곁에 커다란 상업청사를 지었다고 한다.

20세기 20년대말, 수억 중국인민의 재난은 끝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계속되는 전란과 제국주의, 봉건주의 이중압박에 시달리고있었다. 국민당은 이 시기 북벌전쟁을 계속하여 북경, 천진을 점령하였지만 북벌전쟁에서 막강한 실력을 확보한 풍옥상(冯玉祥), 리종인(李宗仁), 염석산(阎锡山)은 장개석의 독재에 불복해 중원대전(中原大战)을 일으켰다. 장개석은 상해지역의 두터운 경제력과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으면서 리간술과 회유책으로 이들을 전승하였다.

이시기 동북으로 패퇴한 군벌 장작림(张作霖)이 일제에게 피살되자 그의 아들 장학량(张学良)이 남경정부에 복종할것을 표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표면적으로나마 중국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줄곧 일본제국주의자들과 타협하면서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다. 그는 동북으로 출병한 일본침략군에 항격하지 말고 관내로 철수할것을 장학량에게 명령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일으켜 부유한 중국 동북땅을 점령하였고 수천만 동북인민을 노역하였다.

중국정세에 큰 실망을 느낀 수많은 혁명자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였고 중국공산당이 창설한 농촌혁명근거지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까지 모택동과 주덕(朱德), 팽덕회(彭德怀)를 비롯한 홍군지도자들은 정강산(井冈山) 혁명근거지를 창설한후 선후로 서금을 중심으로 한 강서성남부와 복건성서부 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하였다. 혁명근거지가 확대되고 홍군의 력량이 장대됨에 따라 중국공산당중앙이 상해로부터 서금에 옮겨왔고 또 서금에 중화쏘베트공화국(中华苏维埃共和国) 림시중앙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때로부터 이 지역은 중앙쏘베트지역으로 불리웠고 서금은 공산당 붉은정권의 수도라는 뜻으로 홍도(红都)로 불리우게 되였다.

1930년에 이르러 하룡(贺龙)이 개척한 상악서(湘鄂西)혁명근거지, 서향전(徐向前)이 이끄는 악예환(鄂豫皖) 혁명근거지 그리고 좌우강(左右江), 해륙풍, 섬북(陜北)을 비롯해 10여개 혁명근거지가 창설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을 중심으로 한 각 혁명근거지에서는 기세 드높은 토지혁명을 진행하였으며 홍군부대를 장대시켰다.

(권립 교수): 《중앙쏘베트구역에는 우리 민족 혁명가들이 30여명이 있었는데 대표적인물로 무정, 양림, 최정무 등입니다.》

조선혁명가 양림.

조선혁명가 무정.

조선혁명가 최정무.

우리의 조선인혁명자들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에 패배의 상처를 안고 계속 투쟁하였다. 일부는 상해로 갔고 일부는 무한으로 갔으며 또 일부는 다시 동북으로 갔다. 또 많은 사람들은 홍군부대를 따라 혁명근거지창설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자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고 봉건주의억압에 허덕이는 동방피압박민족의 해방은 무력항쟁으로만이 이룰수 있다고 믿었다. 그 어느 강대국에 의지할것이 아니라 천백만 로농대중의 힘에 의지하여야만이 해방의 그날을 맞이할수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최정무, 무정, 양림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중앙쏘베트지역의 수도인 서금에 찾아왔던것이다. 그가운데서 최정무, 무정,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홍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선인 혁명자들이다.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빙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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