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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9)—지하투쟁의 별 리철부(상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8.06일 09:43
1927년 7월 1일 남창봉기로부터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에 이르기까지 이 10년을 중국력사에서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라고 한다.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피압박 인민들의 해방사업을 위해 외세에 굴종하면서 정의적인 인민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국민당반동파와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이다.

남창봉기, 광주봉기, 추수봉기를 거쳐 공산당은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으며 자체의 무장인 로농홍군을 창건하였다. 장개석을 두목으로 하는 국민당반동파는 아세아를 제패하려는 일본침략자들앞에서는 양도와 굴종을 계속하면서도 백만대군을 몰아 공산당과 홍군을 소멸하려는 적극적인 내전을 발동하였다. 당중앙은 북상항일하기 위해 피어린 장정을 하여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이 시기 조선혁명가들의 투쟁도 중국력사의 거세찬 물결속에 합류되여 독립과 주권을 위하여,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아세아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많은 조선족투사들이 남창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하였고 당중앙과 홍군을 따라 장정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한편 국민당반동파들이 통치하는 백색구역에서도 많은 조선족혁명자들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굴함없이 지하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피압박인민을 단결하여 그들을 항쟁에로 이끌었으며 국민당반동파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써 싸울 준비를 하였으니 백색구역의 가장 대표적인 조선혁명가로는 리철부와 김산을 꼽을수 있다.

(권립 교수)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에 우리 당과 홍군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토지혁명을 진행하며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할 때 우리 당의 지하전선에는 눈부신 조선족의 두 큰별이 있었습니다. 리철부와 김산입니다.》

조선혁명가 리철부.


모택동은 일찍 리철부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화북의 공산당원들은 림시중앙의 모험주의에 대해 일찍 예리한 반대의견을 내놓았으니 그 대표는 리철부동지이다. 두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부류는 호언장담하면서 함부로 일을 처리하고 목적 없이 행동하며 실제를 떠나 생각하는데 이는 주관주의적인 억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실사구시하며 공담을 하지 않고 시간, 지점, 조건을 가려 행동하는데 이는 유물변증법적인 혁명관의 표현이다. 류소기와 리철부동지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두번째 부류의 대표인물들이다. 》


조선공산당 조기당원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인 리철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일찍 하북성당위원회 선전부장과 조직부장, 하북성 당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당위원회 서기로 활동하던 지하전선의 조선족투사였다.


리철부의 원명은 한위건이며 1901년 조선함경남도(朝鲜咸镜南道) 홍원군(洪原郡)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조선 경성의 오성중학(五星中学)을 다니면서 반일애국사상을 키웠으며 투쟁의 앞장에 서기 시작하였다. 1917년 중학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과학교에 입학한 그는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조선인민의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주익(朱翌), 강기덕(康基德) 등과 함께 전국학생독립운동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학생들의 집회를 지도하였다. 그는 대오의 앞장에 서서 《3.1독립선언》을 선독했으며 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 만세를 피 터지게 웨치면서 일본군경과 용감히 박투하였다. 조선청년학생 독립운동의 지도성원이고 주요책임자였던 그는 일제의 수배령을 받았다. 그해 4월 그는 조선을 떠나 쏘련을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권립 교수)《1919년 18세였던 리철부는 〈3.1〉운동때 학생령수로 일제의 체포대상이 됐습니다. 그리하여 상해로 왔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외교론이 우리 민족 해방운동을 기로에로 이끌고있다는것을 간파하고 우리 민족내부의 지방주의, 당파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을 방해하고있다는것을 알고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리론을 연구, 학습하고 공산주의리론만이 전 민족을 단결할수 있고 민족해방투쟁을 끝까지 진행할수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류학을 마친 리철부는 조선동아일보 기자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내 공산주의자들과 련락을 가지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제3차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러나 1928년 조선공산당 제3차체포사건이 발생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리철부는 다시 중국 상해로 망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1928년 재차 상해에 도착한 리철부는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가지고 이해 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에서는 그에게 화북지역의 당사업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선후로 북평 반제대동맹(反帝大同盟) 당단서기(党团书记), 하북성 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사업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자 일제는 동북3성을 삼키고 열하(热河), 내몽골, 기동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국민당은 매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중국공산당과 항일하려는 대중들을 탄압하기에 급급하였다. 적의 백색테로하에서 평진지역의 당지하조직이 많이 파괴되였고 놈들은 도처에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다부산즈를 입고 도수높은 안경을 건 리철부는 학구적인 모습으로 적의 눈을 피해가면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리철부라는 이름도 이 시기부터 쓰기 시작했던것이다.


답사팀이 북경에서 만난 중앙당사연구판공실의 황소동(黄小同) 비서장은 이시기 리철부의 활동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분이다. 그는 리철부는 반제대동맹 좌익인사들의 좌담회에 참가했다가 중국의 녀성혁명가 장수암(张秀巖)을 알게 되였다고 이야기했다.


1932년 천진 반제대동맹 책임자였던 리철부는 북평의 반제대동맹좌익인사 좌담회에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국민당통치구역에서의 당사업 로선을 둘러싸고 치렬한 론쟁이 진행되였다. 그때 리론수준이 강하고 원칙을 지키며 실사구시적인 리철부의 사업태도와 언변은 장수암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권립 교수)《1933년 리철부는 중공하북성위 선전부장을 맡았습니다. 이때 왕명의 좌경로선의 본질을 철저히 간파한 그는 성위에 의견서를 바쳤습니다. 의견서에서 그는 현유의 당의 지도자들에 의해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수 없으므로 하루속히 7차 당대회를 열고 우리 당을 만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중앙에는 왕명의 좌경로선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 리철부의 의견서를 받은 하북성 당위원회는 이 문제를 중앙에 제기하였고 중앙에서는 리철부를 우경취소주의라는 무거운 모자를 씌우고 그를 철직시켰다.

이해 리철부는 북평에서 회의를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으로 이송되였다. 소식을 접한후 당조직과 조선혁명가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그를 보석출옥시켰다.

출옥후 리철부는 천진에 거처를 잡았다. 당조직에서는 그의 신변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여 장수암을 파견해 그를 돌보게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녀당원인 장수암은 북평 향산자유원에서 사업하였고 후에는 천진남개중학교의 교원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천진시 문화총동맹의 당단서기를 맡고 진보적인 문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북평 공안국의 총감인 장벽(张璧)은 장수암의 오빠였다. 그는 일찍 진보적인 애국장령 채악(蔡锷)을 따라 혁명에 참가했다. 장수암은 오빠의 관계를 리용하여 많은 지하당원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신분이 폭로된후 장수암은 북평에서 행동자유를 잃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천진으로 오게 되였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리철부와 함께 투쟁하게 되였다.

답사팀은 당년 리철부의 거처를 찾기 위해 천진에 갔다. 리철부와 장수암은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부부로 위장하고 영국 조계지인 소백루(小白楼) 부근에 거처를 잡고 공산당 지하련락소를 만들어 사업을 진행했다는 기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낡은 집들이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찾기 힘들었다. 기재에는 소백루부근의 주가호동(朱家胡同)의 한 재봉가게에 거처를 정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지명마저 변하여 주가호동을 찾을수 없어 당혹감을 느꼈다.

괴수리(槐树里)의 소백루부근은 리철부가 처음 천진에 왔을 때 오현농(吴砚农)의 집에 거처하던 곳이고 부근에 또한 리철부와 장수암이 함께 거처하던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점들이 늘어서고 옛 건물은 서양음식점과 음악청건물만이 남아 당시 영국조계의 번창함을 단면으로 보여주고있을 뿐이다. 이 두 건물을 제외하고는 주변 단층집들은 전부 허물어졌고 새로운 건물을 짓고있었다.

천진시 괴수리의 옛 소백루건물.

리철부와 장수암 부부(36년 천진에서)


천진시 괴수리의 소백루, 이곳에서 리철부와 장수암은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되였고 드디어 행복한 혁명부부로 되였던것이다.

리철부는 조그마한 방의 등갓도 없는 전등밑에서 한손으로 부채질하며 한손으로 붓을 날려 부지런히 저서들을 펴냈다. 그는 왕명의 좌경기회주의로선으로 하여 당조직이 거듭 파괴되고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는것을 보고 깊은 사색을 거듭하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혁명 실천에 비추어 《당내 문제에 관한 몇가지 의견》, 《당면 조직정돈에 관한 몇가지 의견》, 《관료주의의 엄중성에 대하여》, 《좌경기회주의 반동성》, 《당내투쟁과 자아비평》 등 10편의 글을 썼다.

왕명과 박고 등이 통치적지위를 차지했던 당중앙은 리철부의 정확한 주장을 《투항주의》, 《철부로선》으로 규명하고 하북성당위원회에서 당내 투쟁을 전개할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리철부를 당에서 축출하였다.

억울한 루명을 쓴 리철부는 당적까지 취소되자 큰 실망에 빠졌다. 이때 장수암이 그를 많이 고무해주었다. 리철부는 《광명을 내다보고 요귀를 쫓는다》는 좌우명을 벽에 써붙이고 자기를 격려하였다. 그는 다시 선전활동과 조직활동에 나섰다.

(권립 교수) 《리철부는 굴하지 않고 당의 지하활동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는 천진 각 계층 구국회, 중화민족 해방자유회 등 지하조직을 내오고 반일 반봉건 투쟁을 계속하고 옥중동지들을 구원하는 지하사업을 계속하였습니다.》


진리를 견지하는 리철부의 의지는 강의했고 드팀 없었다. 그는 당중앙에서 언젠가는 자기의 정확한 주장을 접수하리라 굳게 믿었고 항전에 나선 천백만 대중들이 꼭 진리를 알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국민당반동파와 일본밀정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렬악한 환경속에서 그리고 당조직의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리철부는 계속 항쟁을 견지하였다.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중국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화북을 넘보고있었다. 1935년 차할성으로 진격한 일제는 한간 은여경(殷汝耕)을 사촉해 이른바 《기동방공자치정부(冀东防共自治政府)》를 세웠다. 정부는 전적으로 일제의 조종하에 있는 괴뢰정부였다. 일제는 또 국민정부에 이른바 《화북정권특수화(华北政权特殊化)》에 관한 요구를 제기하였다. 중화민족은 새로운 위기를 겪게 되였다. 이때 섬북에 도착한 당중앙과 홍군은 《8.1》선언을 발표해 일떠나 일제에 항격하고 나라를 구할것을 호소하였다.

중국공산당의 《8.1》선언을 받들고 북평의 애국학생들이 12월 9일 성세호대한 애국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6000여명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내전을 중지하며 국민당의 타협정책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웨쳤다. 이날 애국학생들의 행동은 군경들의 탄압을 받았다. 100여명이 부상입고 30여명이 체포되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는 애국학생들은 이튿날 더 큰 규모의 시위활동을 준비하였으며 그들의 애국행동은 전국 각지 인민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천진에 있던 리철부와 장수암은 천진의 애국학생들을 동원하여 북평의 《12.9》운동을 적극 성원할 준비를 하였다. 더욱 큰 투쟁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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