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자 앱 | | 모바일버전
뉴스 > 한민족 > 한민족일반
  • 작게
  • 원본
  • 크게

[항일녀걸7]허현숙과 그녀의 항일가족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4.17일 12:47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7)

■리 함
1

허현숙(许贤淑, 1902년-1938년)은 항일련군 제4군의 녀전사이고 북만 항일련군 장령 황옥청(黄玉清, 후일 중공길동성위 위원, 항일련군 제2로군 정무처 주임)의 안해이다. 허나 자료가 결핍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그의 생평사적이 잘 발굴되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남기고있다.

가담가담의 자료를 들추니 허현숙은 흑룡강성 목릉현(穆棱县) 사람으로서 후에 팔면통구 향양촌(八面通区向阳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혁명활동을 벌리고있는 황옥청을 알게 되고 결혼하게 되였다. 황옥청은 본명이 황형호(黄亨镐)이고 1899년 함경북도 길주군 태생, 1905년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북만으로 불리운 목릉현 향양촌으로 이주하여왔다.

목릉현의 조선족이주사를 펼치면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1898년으로 거스른다. 목릉현은 중쏘변계의 요하, 호림, 밀산, 동녕 등 현들과 마찬가지로 로씨야 연해주에 이주하였던 조선사람들이 다시 목릉 등지로 재이주하면서 조선이주민들이 생겨났다. 1898년 이해 연해주에서 살던 조선사람들이 처음으로 목릉 팔면통에 들어와 논농사를 지으며 조선사람 동네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황옥청일가 이주가 1905년이면 비교적 일찍한 축이다. 허현숙의 일가도 그렇게 조선사람들의 이주물결을 따라 팔면통 향양촌에 들어섰다.

팔면통 향양촌에서의 생활도 별반 나은데가 보이지 않았다. 황옥청은 1913년에 당지에서 4년제 사숙(소학교)을 마치였으나 쪼들리는 생활고로 계속 학업을 이어갈수가 없다. 황옥청은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팔면통구 향양촌과 하성자구(下城子区) 등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덧 황옥청은 20대 중반의 젊은이로 자라났다. 1923년에 김서현(金瑞铉)을 중심으로 하는 한패의 조선인혁명가들이 목릉일대에서 활동하면서 향양촌과 그 일대 청년골간인 황옥청과 손을 잡게 되였다. 황옥청은 선각자들의 계몽으로 혁명에 어섯눈을 뜨면서 혁명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허현숙도 그런 사람들가운데의 한 사람이였다. 1924년부터 그들은 향양촌과 그 일대에서 포스터를 붙이고 삐라를 살포하면서 지주놈들의 착취를 까밝히고 모두 한맘으로 뭉쳐 일제놈들과 싸울것을 호소하였다.

투쟁가운데서 황옥청과 허현숙은 서로를 깊이 리해하면서 정을 나누다가 결혼하게 되였다. 그때가 1925년경으로 알려진다. 1929년에 황옥청 등 10여명 동지들이 목릉현 팔면통 지방공안국에 갇히였다. 허현숙은 동지들과 더불어 갖은 방법을 다하여 옥에 갇힌 사람들과 내통하는 한편 투쟁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두달 푼히 지나 남편 등이 풀려나온후 그들의 투쟁열성은 보다 부풀어올랐다.

1930년 봄이후 허현숙은 남편 황옥청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1931년에 남편은 중국공산당 목릉현 하성자구(下城子区) 구위서기로 되고 또 중공목릉현위 선전부장으로 되였다. 허현숙은 남편을 내조하면서 부녀회사업에 살손을 붙이였다.

그 시절 하성자구는 목릉현의 당의 활동중심지구였다. 목릉현위가 하성자구에 자리잡은데서 황옥청은 현위서기 전봉래(全凤来)를 도와 활동하다가 1932년 11월에 당조직의 파견으로 밀산현에 가서 밀산현위 재건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그때 허현숙은 갓 태여난 딸애와 손우 두 아들애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밀산현에 가서 새로운 투쟁에 뛰여들었다.

중공밀산현위는 1930년 10월에 조직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적들에게 파괴당하였다. 후에 현위가 아닌 중공밀산구위가 조직되고 당원은 근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시기에 허현숙은 남편 황옥청과 더불어 밀산현에 가서 현내 서대림자(西大林子)에 자리를 잡았다. 서대림자는 조선사람 20~30호와 중국인 10여호가 모여사는 마을로서 1931년 9.18사변후 이 마을의 조선족, 한족 모두가 항일투쟁에 궐기하고있었다.

1933년 10월, 중공밀산현위가 정식으로 조직되였다. 허현숙의 남편은 현위위원 겸 서대림자, 백포자(白泡子) 지구 구위서기로 당선되였다. 지방 부녀조직의 책임자로 된 허현숙은 남편과 함께 서대림자, 백포자 등 허다한 고장들에 대중적군중단체인 《반일회》를 비밀리에 묶어세웠다.



허현숙 소속부대 리연록(좌2)과 동북항일동맹군 사령부 합영(자료사진)


2

1934년 3월 20일에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밀산유격대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해 10월에 이 유격대는 동북인민항일혁명군과 합병하여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그후의 항일련군 제4군)되였다. 중공밀산현위에서는 부대의 지도력량을 보다 충실히 하고저 현위간부들인 박봉남, 리근숙, 황옥청, 허현숙, 김근 등 동지들을 제4군에 파견하였다. 그에 따라 서대림자 마을의 조선족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 반일회 가족들은 모두 서대림자에서 80여리 떨어진 양강구(杨岗沟)밀영으로 지대를 옮기게 되였다. 양강구는 서대림자에서 간 4군의 동지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사는 밀영으로 되였다. 이곳에서 황옥청은 제1사 제1퇀 2련의 지도원으로 부임되고 허현숙은 부대의 재봉대원으로 나섰다.

그해 1934년 겨울 일제놈들이 양강구와 그 일대를 토벌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공밀산현위에서는 양강구밀영의 4군 동지들과 그 가족을 제2퇀 류수처가 있는 양목갑(杨木甲)으로 전이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부대는 생활환경이 간고하고 수시로 이동작전하여야기에 어린애들을 데리고 다닐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부대와 지방 당조직에서는 4군 녀전사들의 어린 자식들을 믿을만한 중국인 집들에 맡기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럴 때 허현숙 부부에게는 어린 아들애 둘과 세살배기 딸애가 있었다. 금방 우리 말 《아야어여》를 배우는 깜찍한 딸애는 이들 부부의 기쁨이라 황옥청은 안해 품에서 조잘거리는 어린 딸애를 보면서 일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야 당조직의 결정을 알게 된 허현숙은 안순복 등 여러 조선족녀전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결단을 내리였다. 옆집의 반일회원인 중국인 류어머니가 허현숙의 딸애를 맡아나서게 되였다.

허현숙부부에게는 세살배기 딸애의 오빠인 아들애 둘이 있었지만 아들애들은 필경 어린 아이였다. 녀동생을 류어머니한테 맡긴다는 말에 천진한 아들애 둘은 칭얼거린다. 맏이는 더구나 그러하다.

《엄마, 녀동생을 데리고 가요. 내가 업고 빨리 달을수 있어요. 정말이예요, 엄마, 아빠…》

철부지 아들애의 간절한 소망, 그래도 어찌할수 없는 허현숙부부였다.

허현숙부부처럼 지방 중국인들에게 맡긴 조선족아이가 무려 8명, 큰 애라야 예닐곱살, 어린것은 돌이 갓 지난 아기였다. 녀전사들은 애들의 옷자락에 생년월일, 애의 이름, 부모들의 이름을 적어 천오래기를 달아주면서 부양할분들에게 15년 가량이면 돌아올수 있으니 아무쪼록 잘 키워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는 허현숙 등 녀전사들은 살점을 떼여내는 이 시각에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그속의 허현숙과 남편은 여느 녀전사들 부부들과 함께 어린애들이 잠자는 밤에 양강구밀영을 조용히 떠나면서 나어린 두 아들애를 데리고 나섰다.

1936년 3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고 황옥청이 군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37년에 이르러 4군은 원래의 700명으로부터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과에는 황옥청은 물론 허현숙의 숨은 노력이 크게 깃들어있었다. 그만큼 그는 남편의 가장 미더운 동지이자 조수였다.

1938년 봄에 일본침략자들은 삼강성(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 일대에 대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항일련군 4군을 망라한 북만의 항일무장투쟁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제4군과 제5군의 주력을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4군과 5군의 서정부대는 목단강지구의 5군 후방기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병력을 집중하여 서정을 다그치기로 하였다. 이해 봄에 황옥청은 4군 1사 정위를 겸하고 4군 주력부대를 따라 서정하게 되였다.

1938년 5월에 제4군과 제5군은 보청에서 출발하였다. 허현숙은 남편과 함께 서정부대에 참가하였다. 7월 2일에 서정부대는 목단강연안의 삼도통(三道通)을 습격하였다. 이날 그들은 일본군수비대와 경찰분주소를 까부시고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로획한 뒤 정식으로 서정을 시작하였다.



1964년 항일련군 제5군 부녀퇀 퇀장 왕옥환(중간, 최용건장군의 부인)이 할빈으로 왔을 때 그제날 전우들인 리민(좌1), 려협과 함께.(자료사진)

3
제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에는 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허현숙도 그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들은 부대와 함께 풍찬로숙하면서 삼도통전투에 뛰여들었다. 평소엔 선전원, 봉사원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며 부대의 사기를 높이였다.

7월말에 부대는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루산진(楼山镇)전투를 벌리였다. 허현숙네들이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었으나 적들이 계속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지꿎게 달려드는데서 제4군과 제5군은 두갈래로 나뉘여 행동하게 되였다. 따라서 제4군의 허현숙 안순복 등 녀전사들은 제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전진하였다. 사랑하는 철부지 딸애를 지방에 떨구어둔 허현숙은 또 사랑하는 남편과 헤여져야 하였다. 석별의 시각, 황옥청은 안해 허현숙의 두손을 뜨거이 잡아주었다.

《나는 당신을 돌볼수 없게 되였소. 매사에서 무척 조심하길 바라오. 우린 꼭 승리할것이오. 우린 꼭 다시 만나게 될것이오.》

그러는 남편을 두고 허현숙은 금방 한뜸한뜸 만들어낸 헝겊신 한컬레를 남편에게 맡기면서 평온스레 말하였다.

《시름 놓으세요. 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거예요. 당신도 항상 조심하세요.》

허현숙은 서정길에서 이렇게 남편 황옥청과 헤여졌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상상했으랴. 이는 허현숙부부의 영원한 리별이였다.

서란, 오상 일대에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서정길이였다. 허현숙, 안순복 등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부대와 함께 오상현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경내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수십대의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아군은 막중한 손실을 당했다. 5군 1사가 적들의 거듭되는 포위망을 헤치고 나왔을 때는 병력이 1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때는 1938년 8월이다. 허현숙 소속 5군 1사는 오상현의 원보진(元宝镇)에서 적들과 생사박투의 격전을 벌리였다. 허현숙이 한창 적들과 싸우고있을 때 한 녀전사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허현숙은 결사적으로 그 녀전사를 구출하다가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여 오상현 일본수비대감옥에 끌려갔다.

일본수비대 감옥에서 적들은 허현숙에게 부대의 행동부서를 대라고 미쳐 날뛰였다. 허현숙은 적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갖은 악형으로도 항일련군의 이 녀전사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나중에 악착하기 그지 없는 적들은 허현숙을 끌어내다가 무참히 살해하였다. 허현숙은 자기의 희생으로 한 공산당원, 한 항일련군 녀전사의 숭고한 맹세를 실천하였다.

황옥청은 안해의 희생으로 인한 모진 슬픔을 이겨냈다. 부대의 거듭되는 손실도 그를 거꾸러뜨리지 못하였다. 1938년 겨울 황옥청은 사태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보청일대로 되돌아왔다. 후에 그는 중공길동성위 위원, 항일련군 제2로군 총정치부주임 중책을 짊어지고 적들과 싸우다가 1940년 2월 20일에 보청현 태평구의 석회가마(石灰窑)가 있는 곳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허현숙과 황옥청의 작은아들 황동순(黄东淳)은 아버지 소속부대인 항일련군 제4군에서 꼬마교통원으로 활약하다가 1939년 겨울 밀산현 합달하(合达河)에서 왜놈들에게 살해당하였다.

허현숙은 이렇게 갔다. 남편 황옥청도 이렇게 갔다. 작은 아들 황동순도 이렇게 갔다.

광복후 1948년에 그 시절 밀산현 서대림자 당지부서기이고 후날 길림성 부성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인 주덕해는 전문 두 사람을 밀산현에 보내여 1934년 겨울 지방에 부탁한 4군 녀전사들의 아이들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밀산현위의 도움으로 현내 지일구의 중국인 루봉각(娄凤阁), 등사유(滕思有), 류로까다(刘老疙疸) 등 세집에서 부양하는 녀전사들의 후대 셋을 찾아냈다. 다른 집들에 맡긴 다섯아이들은 일제놈들의 거듭되는 검거와 토벌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허현숙의 세살짜리 딸애는 그 다섯아이들중의 한 녀자애였다.



렬사비를 찾은 목릉시 소선대원들(자료사진)


2015년 3월 27일 보충정리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뉴스조회 이용자 (연령)비율 표시 값 회원 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 주시면 통계에 도움이 됩니다.

남성 67%
10대 0%
20대 0%
30대 33%
40대 33%
50대 0%
60대 0%
70대 0%
여성 33%
10대 0%
20대 33%
30대 0%
40대 0%
50대 0%
60대 0%
70대 0%

네티즌 의견

첫 의견을 남겨주세요. 0 / 300 자

- 관련 태그 기사

관심 많은 뉴스

관심 필요 뉴스

모이자114

추천 많은 뉴스

댓글 많은 뉴스

1/3
류소명 해남성 성장, 한국 21세기한중교류협회일행 회견

류소명 해남성 성장, 한국 21세기한중교류협회일행 회견

4월 25일, 해남성 성장 류소명은 해구에서 한국 21세기한중교류협회 회장 김한규 일행을 회견했다. 류소명은 김한규가 장기간 중한우호 촉진과 해남의 발전에 관심을 가져준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나서 해남자유무역항 건설 진전을 소개했다. 그는 해남성과 한국 여러 지

"거짓주장 유감" 르세라핌, 뜬금없는 '머리채 잡기'에 공식입장 발표

"거짓주장 유감" 르세라핌, 뜬금없는 '머리채 잡기'에 공식입장 발표

최근 하이브와 어도어 대표 민희진의 갈등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르세라핌 소속사 쏘스 뮤직이 공식입장을 통해 유감을 표했다. 지난 26일 쏘스뮤직 측은 온라인 플랫폼 위버스를 통해 "먼저 당사는 공개석상에서 사실이 아닌 내용 및 무례한 표현과 함께

"바프 성공?" 전현무-박나래-이장우, 완전히 달라진 비주얼 '환골탈태'

"바프 성공?" 전현무-박나래-이장우, 완전히 달라진 비주얼 '환골탈태'

지난해 연말, MBC '나 혼자 산다' 팜유즈 멤버들인 전현무와 박나래, 이장우가 올해 보디프로필 찍는 것을 목표로 내 건 가운데 박나래가 힘겨웠던 촬영 후기를 전하며 눈물을 쏟았다. 지난 26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 에서는 전현무와 박나래, 이장우가 함께한 '

모이자 소개|모이자 모바일|운영원칙|개인정보 보호정책|모이자 연혁|광고안내|제휴안내|제휴사 소개
기사송고: news@moyiza.kr
Copyright © Moyiza.kr 2000~2024 All Rights Reserved.
모이자 모바일
광고 차단 기능 끄기
광고 차단 기능을 사용하면 모이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이자를 정상적으로 이용하려면 광고 차단 기능을 꺼 두세요.
광고 차단 해지방법을 참조하시거나 서비스 센터에 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