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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산일대 항일투사 박봉남 리근숙 부부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4.17일 09:13
동북항일련군 제4군 당위서기 박봉남

  (흑룡강신문=하얼빈) 맹고군, 피금련 특약기자, 최성림기자=박봉남의 원명은 김만흥이고 가명은 강철산, 김만수, 오만복이다. 1907년 3월 4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서북쪽에 있는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12년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 간도 개척리 보성촌(지금의 길림성 화룡현 동성향 명봉촌)으로 이사왔다.

  박봉남이 다니던 동흥중학교는 완전한 반제반봉건 혁명전통의 중학교였으며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학교를 진지로 항일계몽교육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박봉남은 학교에서 선생님을 존경하고 학생들과 단결하며 사상이 진보적인 우수한 학생이였다. 그는 '나라와 혁명', '신청년', '매주평론' 등 혁명잡지를 열독했다. 그는 학교에서 비밀리에 조직한 맑스 레닌주의연구소조 '광복회'의 조직아래 항일을 선전하는 각종 정치활동에 참가하였다.

  1928년 10월 21일,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박봉남은 녕안현 화련구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화련구에서 강철산이란 이름으로 청년들을 조직하여 야간학교를 꾸리고 애국주의 청년과 군중들을 동원하여 '농민협회', '소년단', '항일회' 등 대중단체를 조직하였다.

  1930년 6월, 박봉남은 돌출한 표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12월, 그는 동만청년회조직 부장직을 맡았고 룡정현에서 학생운동을 조직령도하였다.

  1930년 12월, 당조직에서는 박봉남을 양성하기 위하여 그를 녕안현 동경성으로 파견하였다. 박봉남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동경성 남대묘 서당에서 교편을 잡고 학교에서 숙식하면서 당조직활동을 진행하였다. 그해 5월, 박봉남은 중공녕안현위선전부장으로 임명되였다. 박봉남은 조직의 배치하에 녕안항일유격활동의 재건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변절자의 밀고로 사업활동은 좌절을 당하였고 그의 신분도 폭로되였다.

  1932년 6월, 중공수녕중심 현위에서는 박봉남의 인신안전을 위하여 그를 하성자촌(현 목릉현)으로 파견하여 사업하게 하였다. 박봉남의 주요사업은 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와 련락하여 출판서를 건립하고 '수녕신문'을 출판하는것이였다. 동시에 중공주재국제공산주의대표단과 련락하여 문건을 전달하는것이였다.

  1932년 12월 8일, 수녕중심현위는 밀산지구의 항일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박봉남, 리근숙, 황옥청, 김백만, 김진호, 김근, 리춘근 등 십여명의 당원간부를 밀산 하다허즈에 파견하였다. 당시의 밀산은 맹목적으로 무장추수폭동을 일으켜 당조직은 큰 손실을 보았고 군벌의 백색테러로 많은 당원들이 조직을 떠나갔으며 근근히 10여명의 당원들이 몇개의 조선족촌에 남아있었기에 당조직활동은 기본상 정지된 상태였다. 박봉남은 하다허즈에 도착하자마자 당지 백성들의 정치, 경제, 생활상황을 조사한후 군중들에게 항일구국의 도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여 주었으며 광범한 대중들의 항일각오를 불러일으켰다. 뛰여난 말재주와 소탈한 인격으로 마을사람들은 남녀로소 불문하고 박봉남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기 좋아하였다. 박봉남과 동지들은 빠른 시일내에 사업국면을 돌려 세웠고 선후로 여러명의 당원을 발전시켰으며 하다허즈, 백포자, 서대림자 등 세개 당지부를 재건립하였다.

1932년 12월 중순, 박봉남은 료하중심현위가 밀산지구에서 조직건설한 줘무타이즈, 이춰모, 당벽진 등 세개 지부를 접수하여 중공밀산구위를 건립하고 구위서기직을 맡았다.

  1933년 1월 7일, 중국침략 일본군이 밀산을 점령하였다.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승화하는 새로운 형세하에서 박봉남은 시국을 료해하고 정세를 분석하여 제때에 당조직의 사업중점을 군벌통치를 뒤엎는데로부터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전변시켰다. 활동범위도 조선민족 중심으로부터 근로대중속으로 확산되였으며 조직의 임무는 당의 력량과 항일대중단체를 적극 발전시키는것이였다. 일본군이 밀산을 점령한후 원래 밀산성내에 주둔해있던 자위군은 할수없이 하다허즈로 철퇴하였다. 자위군의 군심을 안정시키고 항일투쟁에 참가하도록 쟁취하기 위하여 박봉남은 공산당원 김백만, 김진호, 홍춘수와 한명의 공청단원을 자위군 26려 2영 3련에 투입하여 항일통일전선사업을 맡게 하였다.

  1933년 3월 16일, 박봉남, 리성림의 노력하에 반만항일이란 취지로 밀산항일총회가 하다허즈에서 창건되였다. 밀산항일총회 성원은 300여명에 달하였고 산하에 네개 분회를 두었다. 항일총회는 항일유격근거지를 공고확대하고 당조직을 협조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조직, 발전시켰으며 군대를 옹호하고 전선을 지원하며 항일련군전사들의 자녀를 부양하는 등 사업을 전개하였다. 밀산항일총회의 사업은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당의 유력한 조수역할을 하였다.

  1933년 6월, 박봉남은 하다허즈에 주둔하고 있던 자위군이 일본수비대의 롱락과 공세앞에서 가능하게 기치를 바꾸고 적들에게 투항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였다. 7월, 박봉남은 김백만 등에게 자위군내에서 기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비록 적지 않은 자위군전사들이 항일의 편으로 넘어왔지만 조건의 미성숙으로 기의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백만 등 4명은 네자루의 보총을 가지고 다시 하다허즈에 있는 구위의 주둔지로 돌아왔다.

  박봉남의 활약은 일본수비대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어느날, 일본류수부대는 하다허즈의 북촌에 있는 항일회원 김병규의 집에 있는 중공밀산구위 기관을 습격했다. 일본류수부대가 기습오는것을 발견한 김병규는 구위기관에 알릴 시간이 없자 자기 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마을 서쪽으로 달아나면서 적들을 유인하였다. 속임수에 넘어간 적들을 김병규를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박봉남과 구위동지들은 총소리를 듣고 적정이 출현하였다는것을 알고 하다허즈 북쪽골짜기로 긴급 전이하였다. 구위기관도 하다허즈 북쪽 골짜기에 있는 장씨네 탈채영으로 옮겨졌다.

  1933년 10월, 중공길동국에서는 밀산구위를 중공밀산현위로 승격시켰고 박봉남을 제1임 현위서기로 임명하였다. 밀산현위는 산하에 네개 구위를 두었으며 백포자는 동구로, 평양진, 합달하, 벌리는 서구로 정하였다.

  1934년 3월 20, 박봉남은 합달하의 장씨탈채영에서 '밀산항일 유격대'를 건립하고 장보산을 대장으로, 김백만을 유격대 당지부서기 겸부대장으로, 김근을 참모로 임명하였다. 항일유격대는 권총과 보총 34자루에, 당원 10명, 단원 4명을 포함한 34명으로 구성되였으며 당지부를 건립하였다.

  밀산항일유격대는 조직된후 양수하자에서 처음으로 150여명의 괴뢰군과 접전하였다. 다섯시간 남짓한 격전끝에 괴뢰군 영장, 련장, 부련장을 포함해서 10여명을 격살시켰다. 다행히 우리 군은 한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하지만 대장 장보산은 철퇴할때 항일투쟁에 대해 동요가 심한 유격대원 송씨를 총살하고 14명 대원들을 유격대에서 강제 리탈시켰다. 위급한 관두에 박봉남은 즉시 과단조치를 취하여 항일산림대 '량산', '대명자'와 손잡고 14명 대원들의 무장를 해제했다. 5월 27일에는 일본 토벌대를 급습해 큰 타격을 주었다... 그후로 일본 토벌대는 더는 공개적으로 거리에 나오지 못하였다.

1934년 10월, 중공만주성위는 중공밀산현위를 재편성하고 장묵림을 중공밀산현위서기로, 박봉남을 동북인민항일혁명군 제4군 당위서기 겸 조직부장으로, 리근숙을 군부부녀회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밀산항일유격대는 제4군에 합병되고 박봉남, 리근숙 등 본래 밀산현위 주요 성원들을 부대로 전임시켰다.

  1935년 5월, 밀산현위와 박봉남은 지시에 따라 목릉현에 주둔해 있는 제4군 2퇀을 목릉현의 항일유격대로 재편성하고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과 련계를 맺고 한갈래 대오를 파견하여 벌리, 보청 지역에서 발전하게 함으로써 중공료하중심현위의 유격대와의 회합에 편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밖에 또 '천군', '덕산', '농가인' 등 삼림대를 찾아가 두령들과 상의한후 네갈래 삼림대를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제4퇀 독립영으로 재편하였다. 그해 8월, 중공길동특위의 지시에 따라 중공료하중심현위는 '료하대중반일유격대'를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제4 퇀에 편입시켰다. 그때로부터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대오는 나날이 강대해졌다.

  1935년 11월말, 중공길동특위는 벌리, 화천, 이란 등 일대의 항일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박봉남과 리근숙을 벌리에 파견하였다. 박봉남은 로전우이자 벌리현위 서기인 리성림의 지지하에 재빨리 본지의 당,단조직을 회복, 건립하였다. 총과 탄약이 제일 긴요한 문제로 되였다. 군수물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4군 제2사 사장 정로염은 박봉남의 지시를 받고 대오를 거느리고 호림, 흑구자, 독목골, 대황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작전하여 일본군 100여명을 살상하고 보총 30자루와 기관총 3자루를 로획하였다. 5월 21일, 제3, 제4군 련합군은 하다허즈에서 일본군 26퇀을 공격하여 퇀장 소수당(苏树堂)을 생포하고 잡고 경중기관총 3정과 보병중대의 무기, 탄약 등 군수물자를 전부 로획하였다.

  1936년 2월 20,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개편되고 박봉남을 동북항일련군 제4군 당위서기로 임명하였다. 1936년 봄, 박봉남은 의란현 토룡산부근의 악패지주 백씨의 수중에 있는 무기를 빼앗기 위해 행동이 민첩한 청년 6명을 선발한 후 행동날자를 정하였다. 박봉남이 출발할때 안해 리근숙은 임신 9개월이였다.

  1936년 3월 8일 오후, 박봉남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악패 지주 백씨와 그의 사위를 제압했다. 박봉남은 백가와 그 사위에게 우리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설명해주고 명령에 복종하고 무기를 내주면 생명안전을 보증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활한 백씨지주는 표면으로는 순종하는척 했지만 여전히 박봉남에게 악심을 품고 있었다. 박봉남과 그의 대원들이 백씨와 그의 사위만 제압한 상태서 지주보호병더러 총과 탄약을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그들이 문을 나설때 한무리의 지주호병대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쏠 줄이야! 박봉남은 불행하게도 총 여러방에 명중되여 희생되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리근숙은 비통속에서 몸부림쳤다. 리근숙은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어린 딸애를 품에 꼭 껴안고 남편의 뜻을 이어 민족해방을 위해 끝까지 싸우리라 굳게 다짐했다.

뜨거운 피로 물들인 충성의 마음

  리근숙(李根淑)의 원명은 리근숙(李勤淑)이며 1913년 조선 경상남도 예천군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여났다. 1914년, 부모를 따라 중국 흑룡강성 녕안진 동경성 남대묘로 이주하여 왔으며 1923년 9살 나던해 동경성소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리근숙은 박봉남의 방조하에 당조직에 접근하게 되였 으며 그해 11월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다. '9.18사변'후 리근숙은 반일회에 참가하였고 박봉남을 협조하여 반일공작을 전개하였다. 1932년 6월, 박봉남과 부부로 가장하고 녕안에서 목릉현으로 가 수녕중심현위의 인쇄공장에 안배되여 항일전단지를 인쇄하는 사업을 하였다.

  그해 7월, 박봉남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수녕지구중심현위위원 겸 청년운동부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11월, 리근숙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밀산현 하다허즈 첫동네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공밀산구위위원 겸 부녀회주임직을 맡았다. 밀산현 하다허즈에 온지 얼마 안돼 리근숙은 뜻이 같은 십명의 자매들을 조직하여 항일부녀회를 건립했다.

  자위군을 쟁취하여 함께 항일하게 하기 위해 리근숙은 자위군 26려 3영을 위문하고 병영에 들어가 항일주장을 선전하였다. 리근숙은 또 항일부녀회의 부녀들을 조직하여 손수건에 '끝까지 항일'이란 글자를 수놓아 자위군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그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주었다.

  한번은 구위의 중요한 정보를 이튿날 날밝기전까지 하다허즈이남에 있는 련락장소에 보내야 했는데 30여리 길에 일본수비대의 초소와 란토강무덤을 지나야 했다. 구위기관에서는는 고려끝에 중대한 임무를 리근숙에게 맡겼다. 그는 편지를 가는 종이막대기처럼 돌돌 말아서 옷자락사이에 조심스레 숨겼다. 연약한 녀자의 몸으로 혼자 밤길을 걷는 일은 처음이였다. 밤이 깊어지자 부엉이,늑대의 울음소리에 온 몸이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당조직의 신임과 항일구국운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전사들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달랬다.

  리근숙은 지혜롭게 일본수비대의 봉쇄망을 뚫고 정보 전달 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였다.

  1933년 10월, 리근숙은 중공밀산현위 부녀활동회 부장직을 맡았다. 다년간 박봉남을 만나 그와 함께 싸우면서 쌓아온 혁명 경력은 그들로 하여금 리상과 신념을 같이 하게 하였고 떨어질수 없는 사이로 되게 하였다. 얼마후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1934년 3월, 현위는 밀산유격대를 건립했다. 리근숙 등 십명의 자매들은 선전사업을 맡았다. 하달하지구에서는 재빨리 군중들이 항일유격대에 참가하는 열조가 일어났으며 많은 가정에서 부자간, 형제간이 함께 유격대에 참가했다. 밀산유격대가 성립된후 리근숙은 하다허즈 항일부녀회를 이끌고 유격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 다. 그들은 낮에는 산에 올라가 여러가지 나물을 채집해 오고 밤에는 신, 보자기, 배낭 등 물품을 만들었으며 자금을 모아 유격대에 필요한 생활필수품들을 사들였다.

  1935년 11월, 벌리현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5련 내부에 파벌분쟁이 나타났는데 수시로 병변을 일으키고 일본군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군장인 리연록은 심중하게 고려한 후 리근숙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리근숙은 파견되여 간후 그당의 통일전선정책을 선전하는 한편 일본군대가 저지른 수많은 죄행을 폭로하였다. 리근숙의 헌신적 노력으로 제5련 병사들속에서 애국열정을 크게 고조 되었으며 .제5련의 대부분 병사들은 리근숙을 따라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넘어왔다.

  1936년 7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리근숙을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파견하였다. 리근숙은 어린시절에 가졌던 공부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음을 모질게 먹고 어린 딸을 유모에게 맡기고 류학길에 올랐다.

  1939년 7월, 리근숙은 3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하지만 당시 동북항일동맹군 제 4군이 원 주둔지에서 전이하였기에 리근숙은 부대와 련계가 끊어져 하는수없이 동경성으로 돌아가 지하당사업을 전개하였다.

  1939년, 녕안현 동경성의 당조직은 길동국 송일부서기의 변절로 엄중하게 파괴되였다. 게다가 리근숙의 큰아버지가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되는 바람에 리근숙의 항일활동은 많은 제한을 받게 되였고 조직의 배척을 받게 되였다.

  1940년 여름, 리근숙은 불행하게도 일본군대에 체포되였다. 적들은 높은 봉록과 관직으로 유인하기도 하고 각 종 잔혹한 고문을 들이댔지만 리근숙은 시종 입을 열지 않고 당 기밀과 군사비밀을 엄수했다.

  1941년 4월의 어느날 밤, 리근숙은 동경성에서 일본헌병대에 의해 살해되였다. 희생될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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