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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3.22일 13:19
별빛도 정다운 강변에서/사랑을 속삭이는 련인들이여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이밤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이 땅을 찾아준 은인들을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이는 길림신문사 문예부 기자를 지낸 리선근선생이 1979년도에 조선족녀항일투사 최희숙의 사적을 취재하고 작사를 한 노래“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의 1절이다.

리선근선생은 행복한 생활에 대한 가송과 함께 생명을 바친 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무거운 주제의 대화체형식으로 노래말을 지었다.

이 노래의 핵심키워드는 “렬사들”이다.

노래는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잊지 말것을 절절히 부탁했다.

이는 천번만번 옳고 지당한 부탁이다.

최근에 필자는 도문시 퇴직간부인 리종권선생의 자서전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를 몇번이나 통독하면서 이 책을 청소년교양서로 추천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필자는 리종권선생의 글을 빌어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라는 노래의 주제를 다시 한번 사색해보았다.

리종권선생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렬사의 후대로 23살에 청상과부로 된 공산당원 어머님의 참된 교양으로 70성상을 당과 인민의 부지런한 황소로,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청백리로 떳떳하게 살아왔다.

이하는 리종권선생의 자서전“나는 이렇게 살아왔다”의 두개 단락의 일부다.

“아빠가 원망스러워”

…조선전쟁은 가렬처절하였다.

1952년 10월 14일, 미군은 7개 보병영과 18개 포병영을 투입하고 200대의 폭격기로 길이 2700메터, 너비 1000메터 되는 상감령고지에 폭탄 600개, 포탄 30만발을 투하, 발사하였다.

상감령전투에서 지원군 7100명이 사망, 8500명이 부상, 16개 국 련합군 11300명이 사망, 1360명이 부상당하였다.

조선전쟁의 여파는 도문까지 뻗치였다.

어느 날 내가 영화관 매표구 부근의 조그마한 식품상점에서 사탕 몇알을 사가지고 상점문을 나서는데 “따따따”하는 기관총소리가 귀를 째며 들려왔다.

미국 비행기가 한창 철도역을 소사하는것이였다…

조선전쟁터에서 흉흉한 소식들이 날마다 들려오고 도문에 조선난민들이 몰려오더니 난민고아학교까지 세워져 수백명이나 되는 내또래 고아들이 고아학교생활을 하였다 …

그래도 나는 참혹한 전쟁터에 친인을 보낸 어머니가 왜 밤마다 울고있는지를 알수 없었다.

“엄마, 울지 마.”

“나 공부 잘할게. 아빠처럼 큰사람이 될게.”

“그래 그래, 응. 나 안 울게. 엄만 그저 울어보고싶어 그러는거야. 어서 자자.”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였다.

우리는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했다.

나는 기차소리만 울려도 아빠가 오는가고 역에 나가 아빠를 기다렸다 …

할아버지는 동네 군일집에 가시면 폭음으로 고주망태가 되여서 돌아왔다. 한번은 왜소한 할아버지가 고개길마루에 올라서자 그만 쓰러져버렸다. 할아버지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고모와 함께 정신없이 고개마루로 달려갔다.

“귀송아(큰아들로 작자의 아버지임ㅡ필자), 너희들 다 어디에 있는냐? 내가 뭐냐? 무슨 혁명가야? 왜 세 자식을 나라에 다 바쳐야 하니? 난 너들의 아버지로 살고싶다. 너들의 받아다 주는 술을 한잔이라도 마셔보고싶단 말이다 … 이 못난 자식들아! 남들은 다 있는데 너희들은 왜 가버렸느냐 …”

“내 아들들아, 나 어쩌라고 … 귀철아! 귀석아! 귀송아!”

전방에 보낸 세 아들의 이름을 서로 오가며 부르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할아버지의 목갈린 웨침소리는 피를 말리고 간을 말린다. 쓰러진 할아버지의 두손엔 풀잎이며 흙부스러기가 손이 터지도록 쥐여져있다.

할아버지는 땅을 치며 통곡한다 …

1955년 가을 아버지가 조선전쟁에서 사망되였다는 부고와 함께 렬사증이 구정부로부터 내려왔다.

할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며 기나긴 탄식을 했고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했다.

나는 아버지의 령전앞에 무릎을 끌고 아버지를 회억해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세살때 단 한번 돈화에서 허리에 권총을 찬 멋진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어슴푸레 남을뿐이다. 그것도 사진으로 본 기억이다.

“아버지는 왜 우리만 남겨놓고 갔는가?”고.

“왜 아빠 없는 아이라고 아이들에게 몰리우고 가시를 당해야 하는냐?”고.

나는 어머니를 붙안고 울었다.

아버지의 “군인적인 사랑”은 나와 어머니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어머니는 한눈 팔지 않고 나를 아버지의 씨긁이라면서 한평생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살아왔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서 저세상으로 갔을가?”

그저 달랑 사진 한장과 혁명렬사증뿐이다. 사진은 추억을 남겼지만 렬사증은 원한만 남겼다.

…생사리별의 고통속에서 어머니가 병들어 누웠다.

어린 나는 어머니를 구할 길이 없어 설음이 북받쳤다.

설명절이면 남들은 조상을 모시고 폭죽을 터뜨리며 웃음꽃을 피웠지만 한산한 우리 집엔 위문왔다는 이들이 집도 들어오지 않고 푸른 잎도 없는 붉은 종이꽃 한송이를 외벽에 달랑 달아놓고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라”는 말만 남겨놓고 가버리군 했다.

그래 이것이 아버지의 “태산보다 높은 죽음”과 “영생불멸하리라”는 업적의 대가란 말인가?

그후 벽수촌에 렬사비가 세워졌다.

퇀장급의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이 첫머리에 새겨져있었다. 아버지는 퇀 참모장으로 1950년 9월 포항 뒤산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25세, 어머니는 23세, 나는 5살. 그리고 셋째삼촌도 1954년에 미군의 폭격에 전사하였다. 그때 나이 21살이였다.

“아버지를 내놔라”

나의 오촌외숙인 김영선도 사평전역과 남창전역에 참가하여 일급영웅칭호를 받았고 다시 해남도 해방전쟁에 참가한후 비밀리에 조선에 파병되였다.

외숙모는 혼자의 농사일로는 두 모녀가 살아가기 힘들어서 60년대초에 룡정에 와 어둑한 단칸짜리 고방을 세맡고 딸 문자를 공부시켰다. 그후 문자누나는 가두판사처의 일손을 돕다가 림시로 저축소에 취직하고 18원의 로임으로 모녀가 근근득식을 하였다.

그런데 문자누나가 출근하여 얼마 안되여 그들이 농촌에서 왔다는 리유로 하방호로 획분되여 다시 농촌으로 가란다.

가두판사처 사업일군들이 매일 집에 찾아와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라며 성화를 부렸다. 전선에서 영웅이였던 아버지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외숙모가 새우등으로 땅을 핧다싶이하면서 가두일군들을 찾아가 제발 하방만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문자누나는 집을 찾아온 간부들 앞에 엎드려 두손을 싹싹 문지르며 빌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농촌으로 못갑니다. 갈데도 없습니다 …”

문자누님은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리성을 잃고 “나의 아버지를 내놔라 …아버지를 내놔라”고 한없이 울부짖다가 어머니품에 안기여 쓰러졌다.

이런 사정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던 나는 16살 나이에 조선정부와 최용건위원장에게 편지를 써 이들의 비참한 사정을 호소하며 렬사증을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렬사증이 내려오면 농촌에 쫒겨가지 않을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1962년 여름, 외숙부의 렬사증이 발급되여 행방불명이던 그의 처신이 해명된데서 포로가 아니냐며 의심하며 모녀를 왼눈으로 흘겨보던 사람들의 기시도 풀렸다.

당년에 중국인민지원군들에게 드리는 선물인 하얀 사기컾에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이라는 빨간 글이 새겨져있었다. 그 컾으로 하여 우리는 사랑을 느꼈고 그 컾을 받쳐들면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긴듯하였고 그 컵에서 희망찬 앞날을 그려 았다…

인젠 그 컾도 깨지고 우리의 인생도 죽어간다.

“아빠의 덕이란 도대체 무엇일고?”

“청상과부를 남겨놓고서도 아빠는 저세상에서 편할가?”

나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

지난 세기 50년대초, 방금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이였지만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爲國)이라는 신성하고 힘찬 구호를 웨치며 조선전쟁터에 수천수만의 중화아들딸들이 달려나갔다 . 자료에 따르면 당년에 50만 조선족인구에서 6만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중화민족의 해방과 항미원조 보가위국 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됐다.

그렇다면 죽을것을 각오하고 전선에 나가는 참전용사들이 갈망한 보가(保家)란 구경 무엇이였을가?

아마도 용사들이 눈을 감으며 바랐던 보가(保家)는 필경 부모, 안해, 형제, 자녀의 안녕과 모든 후세들의 자유와 평화, 행복한 생활이였을것이다!

리선근선생의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의 답이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잊지 말자”라면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의 바람은 또 무엇일가?

필자는 렬사들의 바람이란 역시 가족과 친인들의 안녕과 행복이였을것이라고 믿고싶다.

렬사들의 이런 바람을 숙제로 오늘날 전쟁 없는 평화의 현실을 살고있는 우리들은“혁명렬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해왔으며 렬사들의 후대에 대한 관심에 얼마만한 정력을 기울였을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함께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에 자문자답을 해보아야 할것이다.

/오기활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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