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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미인의 호수에 찾아온 고려 왕자 [제13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4.20일 14:39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서호(西湖)의 기슭에 이른 후 제일 먼저 만난 건 실은 시인이었다. 호수를 다리처럼 가로타고 남북으로 길게 누운 언제, 그 언제 어귀에 시인 소식(蘇軾)의 조각상이 그 무슨 표지석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조각상의 뒤에는 또 소동파의 기념관이 있었다.

  소식은 호가 '동파(東坡) 거사(居士)'이며 이 때문에 세간에서 '소동파(蘇東坡)'라고 불린다. 북송(北宋) 시기의 유명한 시인이고 서예가이다.



서호의 언제 어구에 서있는 소동파 입상 그리고 그 뒤의 소동파기념관.

  소동파는 항주(杭州)의 태수로 있을 때 서호에 언제를 쌓았는데,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이 언제의 이름을 '소제(蘇堤)'라고 부른다고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서호에는 또 하나의 언제가 있는데, 당(唐)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항주 자사(刺史)로 있을 때 쌓았다고 해서 '백제(白堤)'라고 부른다.

  언제를 걷다가 뭔가 머리를 툭 치는 게 있다. "아하, 옛날에는 시만 잘 짓는다고 이름난 시인이 되는 게 아니구나."

  그러나 호수에서 주은 속인의 이 '깨달음'은 금세 언제위의 인파에 물처럼 잦아든다.

  소제는 이 언제를 쌓은 소동파처럼 금세 소문이 났다. 남송 때부터 벌써 서호 10대 경물의 첫손에 꼽혔다고 한다. 이름하여 '소제춘효(蘇堤春曉)'이니 '소제의 봄날의 새벽'이라는 뜻. 그러나 서호가 중국 10대 명소의 하나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산수의 지세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14명 제왕의 수도였던 항주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서호는 바로 항주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소제를 준설(浚渫)할 때 서호 호수 바닥의 흙모래를 퍼서 쌓아올렸다. 소동파는 또 부근의 옥잠산(玉岑山)의 흙을 파서 날라 오게 했다고 전한다. 백년 사찰이 있는 곳이었다. 언제는 호수위에 생겨났지만 이로해서 사찰은 지형적으로 왼팔을 잃은 격이 되었다. 소동파가 사찰에 화근을 만들었다는 낭설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사찰의 이름은 혜인사(慧因寺)로 '정혜인연(定慧因緣)'에서 따온 말이다. '선정과 지혜의 인연'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그런데 소동파가 심은 '화근'이 별난 '인연'이 되었을지 모른다. 혜인사는 병란으로 훼손되고 잇따라 보수를 거듭하는 악연을 여러 번 재연한다. 소동파가 사찰에 악연을 맺고 있었다면 오월국(吳越國)의 창시자 전류(錢鏐)는 사찰에 불연(佛緣)을 맺고 있었다. 전류는 불교를 신봉했으며 재위 41년 동안 항주에 많은 사찰과 불교시설을 세웠다. 혜인사는 물론 항주의 유명한 영은사(靈隱寺)와 육화탑(六和塔)도 이때 생겨났다.

  비록 국왕이 세웠지만 혜인사는 나중에 왕자 때문에 이름을 떨쳤다. 배를 타고 온 고려 왕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가만, 항주는 배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듯하다. 상고시기 대우(大禹)가 치수를 할 때 이곳을 들렀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고장은 대우가 배로 물을 건넜다는 의미의 우항(禹航)이라고 불렸다. 훗날 비슷한 발음의 여항(余航)으로 불렸고 또 건널 항(航)자가 같은 의미의 항(杭)자로 바뀌면서 항주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항이라는 이 지명은 아직도 항주에 있으니, 그저 전설로만 치부할 수 없을 듯하다.

  항주에 성인(聖人) 대우가 등장하 듯 혜인사에 승려 의천(義天)이 나타난다. 의천은 고려 문종(文宗) 왕휘(王徽)의 넷째 아들로 속명이 왕후(王煦)이다. 그는 일찍 1067년(혹자 1069년이라고 한다) 최고승통 법계를 받았다. 이처럼 일국의 왕자가 나오지만 혜인사는 결국 항주라는 지명에 가려진 듯 했다. 호수가의 다른 명소처럼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소제에서 불과 1,2㎞의 거리였지만 여러 번 길을 물어서야 사찰을 찾아갈 수 있었다.

  사찰의 이름도 더는 혜인사가 아니었다. 갈림길 어귀에 세운 나무 표시판에 '혜인고려사'라고 밝혀 있었다.



혜인고려사로 가는 길 표시.

  그때 그 시절 사찰은 항간에서 혜인사 아닌 '고려사(高麗寺)'로 불렸다고 한다. 소동파는 '고려사'라는 이 속칭마저 귀에 거슬렸을지 모른다. 원우(元祐) 4년(1089), 소동파는 고려에서 들어온 사찰에 보낸 2개의 금탑을 받지 말라고 상주문을 올리는 것이다. 금탑은 승려 의천이 스승 정원(淨源)을 추모하기 위해 바다 건너 고려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사실상 고려 승려 의천과 대륙의 고승 정원의 불연은 이보다 8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081년, 의천은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에게 서한을 보내 경모의 뜻을 표했다. 정원 법사는 "바람 따라 오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말로 전해주리라"고 답신을 보냈다.

  의천은 부왕(父王) 문종과 그 후의 선종(宣宗)에게 송나라로 갈 의향을 여러 번 진언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1085년, 의천은 선종이 시찰을 나간 틈을 타 시자(侍子) 수개(壽介) 등을 데리고 정주(貞州) 즉 지금의 김포에 내려가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대륙으로 떠났다.

  의천 일행은 밀주(密州) 판교진(板橋鎭) 즉 지금의 산동반도 교주(膠州), 해주(海州) 즉 지금의 강소성 연운항(連雲港)을 경유하여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 즉 지금의 개봉(開封)에 도착하며 국왕 철종(哲宗)의 환대를 받는다. 의천은 계속 남하하여 여항 즉 지금의 항주에 도착했다. 항주에서 예전에 서한으로 만났던 정원 법사와 대면하는 것. 의천은 얼마 후 정원 법사와 함께 북상하여 변경에 갔다가 다시 남하하여 혜인사에 들렸으며 천태산으로 간다.

  의천은 혜인사에 체류하는 기간 사비를 내어 불교경전 7,500여권을 사찰에 비치했다고 한다. 그는 또 거액을 들여 혜인사에 화엄대각과 장경탑을 세우도록 한다. 혜인사가 나중에 고려사로 불리는 이유는 왕자 출신의 고려 명승이 다녀갔기 때문만 아닌 것이다.

  이때 소동파가 아직 항주 태수로 있지 않은 게 다행인 듯하다. 소동파는 54살 나던 1089년 자청하여 항주에 5년 동안 좌천되어 있었다. 그는 고려와의 내왕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명(明)나라 때의 산문집 《서호의 꿈을 찾다(西湖夢尋)》는 항주 일대의 사찰 등을 묘사, 서술한 책인데, 소동파가 국왕에게 "외국인(外夷)이 중국에 자주 드나들어 변방이 열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 상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동파는 또 국왕에게 상주하여 시비를 의론한 것을 묶은 《주의집(奏議集)》에 "복건성의 교활한 상인 서전(徐戩)이 먼저 고려의 돈과 물품을 받고 고려와 거래하여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하면서 서전에게 옥쇄를 채워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소동파가 금탑을 받지 말라고 상주한 이유는 고려가 오랫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았으니 더는 고려와 내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사관 옛터 부근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 조각상, 옛날과 현재가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다.

  다사다난한 고려사는 청(淸)나라 광서(光緖) 초기에 드디어 소실되었다. 그러나 2007년 재건되어 다시 서호 기슭에 나타났다. '혜인고려사'라는 이 사찰 이름은 천 년의 세월을 헤가르고 고려 왕자를 호수 위에 다시 배처럼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참관객들과 함께 입장료를 내고 입문(入門)했다. 당금 뭔가 이상한 기분이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향불은 타오르고 있었지만 승복을 입은 승려가 없었던 것.

  "이건 뭐 불공을 드리는 사찰이 아니고 전시관이네." 일행 중 누군가 구시렁거리는 소리이다.

  휑뎅그렁한 대웅보전에는 청소부 아줌마가 홀로 빗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혹간 한국 스님이 들린다고 하면서 대개 관광팀에 합류하는 경우라고 알려준다. 다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있는 당실(堂室)을 찾더라는 것이다. 당실의 문 위쪽에 '대각(大覺)'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대각은 고려 숙종이 의천에게 내린 시호(諡號)이다.



혜인고려사의 석판에 그려진 의천의 구법노선도.

  당실 앞의 뜰에서 일행은 의천의 천리 행적을 단 한 두 걸음으로 끝낼 수 있었다. 땅에 의천의 '입송(入宋) 구법노선도'가 돋을새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당실에 들어 선 후 의천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당실 중앙에는 의천의 조각상이 있었고 벽에는 그의 일생을 묘사한 12첩의 구리판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맞은쪽의 당실은 전시관이었다. 대륙과 반도의 불교문화 교류에서 유명한 고승과 대덕 22명을 열거하고 있었다. 천태종 제2조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백제의 승려 현광(玄光)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태산에 등장했던 고구려의 승려 반야(波若), 신라의 승려 연광(緣光)은 없었다. 연광도 반야처럼 천태종의 조사(祖師) 지의(智顗)를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깨우쳤다. 그 역시 반야처럼 신이(神異)한 행적을 남긴다. 연광은 죽은 뒤 화장을 했으나 혀만 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가끔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는 소리를 냈다고 전한다. 연광의 전기는 신라의 법화 신앙을 살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의천은 미구에 천태산에 올라 옛 선조의 행적을 따라 답사했을까… 아무튼 의천은 조사 지의의 유적을 첨앙하며 그의 육신탑(肉身塔)의 앞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후 명이 다하도록 천태의 교리를 전파할 것을 발원한다.

  얼마 후 천태산을 내린 의천은 명주(明州) 즉 지금의 녕파(寧波)를 경유하여 동쪽의 정해(定海) 즉 지금의 진해(鎭海)로 간다. 북방이 전란 때문에 북송 희녕(熙寧) 7년(1074)부터 명주는 고려의 출입 통상구로 되고 있었다. 의천이 명주를 떠난 약 20년 후 북송은 고려 공사관(貢使館)을 세워 사절을 접대하는 것이다.

  명주를 드나드는 사절은 그때 벌써 적지 않았다. 의천은 고려국 사절단과 합류하여 그들의 배에 탑승하여 정해에서 귀국길에 오른다.

  1097년, 천태산의 동명의 국청사가 왕궁에 의해 개성에 서며, 의천이 주지로 임명되고 처음으로 천태의 교리를 강설한다. 이때부터 천태종은 고려말기까지 고려불교의 중심종단으로 되어 한국 불교사상은 물론 신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로써 삼국의 승려로부터 시작한 천태의 불연은 오백년 후 마침내 반도에 잇닿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천태산 국청에 설립된 중한 천태종 조사 기념관.

  이야기가 또 다른 데로 잠깐 흘렀다. 의천 일행이 대륙을 떠난 몇 년 후 소동파가 항주 태수로 부임되었다. 그가 고려사 근처의 흙을 파서 언제를 쌓은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런데 문충(文忠)은 또 나중에 고려사를 찾아 부처 앞에서 가람신(伽藍神)으로 되어 사찰을 수호하겠다는 발원을 했다고 《혜인사지(慧因寺志)》가 기록하고 있다. 문충은 소동파가 사망한 후 송나라 고종(高宗)이 내린 시호(謚號)이다. 가람신은 사찰의 호법신이니, 소동파가 혜인사의 수호자로 되려 했다는 것이다.

  소동파가 혜인사의 풍수를 망가뜨린 장본인이라고 하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말로 소동파는 자의든 타의든 가람신으로 되고 있었다. 1996년, 혜인사의 옛터에서 돌조각의 인물상을 하나 발굴했는데, 이 인물상은 손에 홀(笏)을 들고 단정하게 서있는 형상이었다. 홀은 신하가 임금을 만나 뵐 때 조복에 갖춰 손에 드는 수판(手板)이다. 훗날 이 석상이 바로 항주 태수 소동파를 형상한 석상이라는 것이 고증되었다.

  "혜인사에 응분한 죄 값을 치르라고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요?"

  서쪽하늘의 오색노을이 호수에 내려 앉아 물위에 비경(秘境)을 그리고 있었다. '서자호(西子湖)'라는 서호의 다른 이름이 새삼 향기처럼 다가온다. 호수가 항주에서 살던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소동파가 일부러 지은 이름이다.



호수 뒤로 보이는 전설의 뇌봉탑(雷峰塔), 실은 오월국 때 세운 황비탑(黃妃塔)이다.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아닐지 한다. 태수 소동파는 왕자의 선물을 사찰에 들여놓지 않지만, 시인 소동파는 미인의 모습을 호수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과연 '백마' 대신 배를 타고 왔던 고려 왕자는 대륙의 미인을 만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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