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 낼돈도 없던 아줌마 지금은 5층 빌딩을 경영
임대료가 모자라 첫 음식점은 사정해 맡아
대련시에 전통조선족음식점으로 자리매김한“탠따마(田大妈)전통료리점”의 주인은 목단강시 출신의 전옥자(65세)아주머니다. 그녀와 그의 가족이 겪은 20여년 동고동락 가족창업이야기가 귀감으로 되고있다.
중한수교후 많은 한국기업이 대련으로 입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1993년 봄,40세초반의 전옥자네부부는 두 딸을 데리고 대련시로 갔다.음식점을 하나 맡아 돈을 벌려는 욕망은 불붙듯했으나 손에 쥔 자금이라곤 달랑 5000원뿐이였다.
대련시 사하구의 흑석초(黑石礁)풍경구의 간이음식점을 찾아갔는데 30평방메터정도의 음식점의 임대료를 3만 2000원으로 불렀고 게다가 한꺼번에 지불하라고 하니 억이 막혔다. 온집식구가 싸구려 려관에서 찐빵에 짠지로 겨우겨우 끼니를 에우는 신세라 코막고 답답하였다. 촌티가 그대로 흐르지만 가식없고 절절함을 호소하는 전옥자아주머니가 음식점 보스의 손을 꼭 잡고 만원을 먼저 내고 달마다 500원씩 내겠으니 제발 사정을 좀 봐달라고 애원해 나선것이 통해 결국 그렇게 계약서를 체결해냈다.
여섯번이나 음식점을 바꾸며
창업의 첫 발자국을 뗀 전옥자네는 어수선한 음식점을 깔끔하게 손질하고 본격적으로 영업에 들어갔다. 민족특색료리에 모를 박고 국수,육개장,찰떡 등 조선족음식을 선보였고 값도 싸게 박리다매해갔다. 음식점은 날따라 호황을 이루어 선후로 음식점을 위치며 규모며 여섯번 바꾸었다. 한창 호황을 누리다가 파가이주(动迁)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번마다 어디 가든 맥을 버린적이 없는 그들 집식구들이였다.
한국에 나간 두 딸의 친구들로부터 두 딸한테로 빨리 나오라는 권유전화가 부절했지만 전옥자는 그 때마다 “우리 식구들은 죽을 먹더라도 절대 흩어져서는 안된다.”고 단호히 말하면서 두 딸에게 장사의 비결과 불고기료리기술을 하나하나 익혀주었다.
미국NBA주식회사로부터 기소받아
장사가 자리잡아가며 잘되여간다 싶었는데 전옥자네음식점에서는 1999년 1월,중국상표국으로부터 미국 NBA주식회사에서 전옥자네가 NBA의 “소머리”상표를 사용했다고 주장, 당장 사용을 중지하라고 기소했다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청천벽력이였다. 전옥자는 자기 상표가 미국의 “소머리표”상표와 비슷한 점은 있지만 자기네 상표는 창의적으로 만든것이며 미국상표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단호히 중국상표국에 그 차이점들을 성명했다. 세밀한 조사를 거쳐 중국상표국에서는 미국의 상소는 근거가 없으며 전옥자네 상표는 합법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업면적은 1000평방메터, 5층빌딩으로 바뀌여
전옥자아주머니의 30평방메터규모의 창업장은 오늘날의 1000평방메터로 확장되였으며 3개 분회까지두고있다. 관계부문으로부터 우수경영업체로 표창받기도 했다.지금 영업장은 5층빌딩식으로 되였는데 1층은 마트,2,3,4층은 식당,5층은 종합활동실로 되여 조선족사회의 여러가지 회의,동호회 등 잔치에 애용되기도 한다.한편 음식점은 장애인학생들의 실습기지,대련시조선족들의 전통음식,전통문화기지로 사회의무를 담당하고있으며 또 조선족사회의 허다한 행사에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고있는 전옥자아주머니는 현재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리사로 활약하고있다.
“치부의 꿈은 남의 뒤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사고방식,자기의 몸가짐과 자기의 실력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열려지는것이예요. 우리집 식구들은 외국나들이가 부럽지 않아요.”이렇게 신심가득히 말하는 전옥자는 오늘도 시장경제의 치렬한 소용돌이속에서 “하면 된다”는 올곧은 마음으로 집식구들과 손잡고 창업에 창업을 거듭하고있다.(리삼민)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료녕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