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국내로 압송된 광현호 선상살인 사건 피의자인 베트남 선원 B씨(84년생, 남)와 V씨(84년생, 남)
회식 중 뺨맞자 급선회 지시…강제하선 우려한 베트남선원 '칼부림'
소통 부재·비인격적 대우 등 갈등 내재…"외국서 국내 영장 집행 첫 사례"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인도양 원양어선에서 한국인 선장이 외국인 선원을 격려하려고 벌인 회식은 참혹한 선상살인의 비극이 됐다.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다툼은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선장의 엄포와 선박 급선회 지시로 이어졌고 강제로 하선(下船) 당할 위기감을 느낀 베트남 선원은 선장과 기관장을 차례로 살해했다.
갈등이 폭발한 이면에는 초보 선장 등 상급 선원과 외국인 선원 사이의 소통 부재와 비인격적 대우, 권위의식으로 인한 갈등이 내재돼 있었다는 지적이다.
◇ 선상살인으로 이어진 양주 회식
지난달 19일, 광현호에서 선상 회식이 열렸다.
평소 선원들이 맥주 1캔씩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던 광현호에서 선장이 수고한다며 이례적으로 양주와 수박을 내왔다.
화기애애하던 회식은 베트남 선원 V(32), B(32)씨가 선장 양모(43)씨와 언쟁을 벌이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V, B씨는 삿대질을 하며 "요요요∼"라고 선장을 비아냥거린 것이 발단이었다.
베트남어로 '건배'를 의미하는 요를 욕설로 이해한 선장은 V씨 등과 멱살잡이를 하다가 뺨까지 맞자 "계속 이러면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기관장 강모(42)씨도 B씨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집으로 보내버리겠다"고 말했다.
화가 난 선장은 2등 항해사에게 "배를 270도로 돌리라"고 지시한 뒤 선내 방송으로 조타실로 베트남 선원 6명을 집합시켰다.
해외 선상살인 국내 현장검증
이전에도 선장에게서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동갑내기 친척인 베트남 선원 V, B씨는 선장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동쪽(90도) 어장으로 이동 중이던 광현호는 서쪽(270도) 세이셸 방향으로 180도 급선회해 이러다간 강제로 하선(下船) 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타실에서 동료들을 흉기로 위협해 선장 살해를 모의한 이들은 동료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유 하우스 고(You house go·집에 가)"라고 말하는 선장을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어 B씨는 선실에서 잠자던 기관장 강씨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살해했다.
B, V씨는 해경 조사에서 "선장과 기관장이 '집으로 가라(GO HOME)'고 해서 화가 났다"고 범행동기를 진술했다.
◇ 소통 부재·비인격적 대우 등이 선내 갈등 키워
광현호 선사 광동해운은 지난해 2월 출항 이후 조업실적이 부진하자 올해 4월 선장을 양씨로 교체했다.
다른 회사에서 항해사로 일하다가 원양어선 선장을 처음 맡게 된 양씨는 광현호 외국인 선원과 쉽게 융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씨는 두 달 넘게 선원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조업이나 선상생활 도중 욕설을 많이 내뱉는가 하면 지난달에는 모항인 세이셸 빅토리아 항에서 선원들의 육지 상륙 문제를 두고 선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국인 승선 기피로 인력난에 허덕이는 원양어선 업계가 중국 동포는 물론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다국적 선원의 고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광기의 살인현장에서 피의자 2명을 맨손으로 제압하고 4일간 안전하게 운항해 추가 피해를 막은 한국인 항해사 이모(50)씨는 "외국인 선원과 한국인 선원이 그 나라의 간단한 인사나 이름 정도는 불러주며 서로의 문화와 인격을 존중해줘야 한다"며 "한국인 선원이 권위의식을 탈피해 평소 친분을 유지한다면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술 유단자인 항해사 이모씨가 피의자를 제압하는 모습
해경은 피의자 검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씨에게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