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학원 장춘 광학기계연구소 원 연구실 대리주임인 장축영은 일찍 새중국의 광학설계분야의 과학실험 공백을 메워준 사람이다.
장축영은 1962년에 북경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한후 우리나라 저명한 광학전문가인 왕대형의 연구생으로 되였다. 1965년에 27살인 장축영은 연구생 졸업후 장춘광학기계연구소에 배치되여 광학연구사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 광학 렌즈의 화질면의 기술은 거의 공백이였다. 장축영은 연구팀을 데리고 우리나라 첫 광학전송 함수측량 장치를 건립했다.
1975년에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진기와 대형 투영기 렌즈를 수입해왔다. 장축영은 연구팀을 거느리고 측량장치를 통해 제품의 질적인 문제를 발견해냈으며 관련 증거를 공상 검사국에 보냈다. 외국상인들도 장축영팀이 제공한 증거를 보고 “중국 전문가”라고 감탄했다. 이로써 장축영은 국가를 위해 십여만원의 경제적 손실을 피면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나라의 존엄과 영예를 지켜냈다.
1982년 6월 12일 장축영은 성도에 가서 천문 망원경 공간 모의장치를 검수할때 과로로 쓰러지게 되였다. 6월 15일 그는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성도에서 서거했는데 그때 나이가 43살이였다. 섭영진 원수는 그에게 “지식인의 우수한 대표”라는 제자를 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