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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도(香道), 사찰의 세계로 향한 비밀코드[제25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10.28일 09:35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정정현(正定縣)에 소문을 듣고 방문객이 대거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이었다.

  사실상 정정현은 천 년 전부터 신기한 곳으로 이름났다. 옛날 연남(燕南)의 고도(古都)였고 경기(京畿)의 병풍이었다. 와중에 융흥사(隆興寺)는 역대로 제왕이 여러 번 주필(駐蹕), 행차 도중에 숙박하던 곳이었다.

정정 현성의 옛 성문.

  옛말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하물며 천 년의 세월이 흘러갔음이랴. 나중에 강 건너 남쪽의 석가장(石家庄)이 오히려 유명한 곳으로 되었다. 명(明)나라 때 비로소 생겨난 마을이지만 청(淸)나라 말 기차역이 서고 잇따라 민국(民國) 때 교통이 발전하면서 드디어 하북성(河北省)의 소재지로 된 것이다.

  정정현은 청나라 말부터 정치가 부패하고 전쟁이 빈번히 일어지면서 건축이 퇴폐하고 인가가 멀어졌다. 비록 공화국 창건 후 문물 복구와 보호가 시행되었으나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낡은 습관에 찌들고 삶과 생명을 잃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명산의 사원에서 향을 피우고 향내를 즐기던 의례는 언제부터인가 더는 형식을 이루기 힘들고 있었다.

  "품의 향을 즐기고 참배할 수 없어요. 예도(藝道)를 할 수 없는 거죠."

  옛 기억의 음침한 날씨와 숲의 생각은 드디어 꽃의 향연을 열고 있었다. 1982년, 정정현에 당 부서기로 부임한 습근평(習近平)은 고적을 조사하고 문물을 수리, 보수했다. 솔직히 그가 아직은 국가주석이 아닐지라도 기문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시골의 시작된 이야기는 사람들을 신선하고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 무렵 관객은 정정현에 해마다 급증했으며 3년 후인 1985년에는 연 50만 명이나 찾아왔다고 한다.

  최씨 성의 기사는 택시 도중에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했다. "중국은 하북성에 쏠리고, 하북성은 정정현에 쏠린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1970년대부터 이곳에 왕림했어요. 친필 글을 쓴 영도자도 있는데요."

  듣고 보니 정정현에 오고 있는 사람치고 융흥사를 모르는 경우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융흥사라기보다 대불사(大佛寺)라고 부른다고 현지인들이 말하고 있었다. 사찰의 천수관음불상은 높이가 무려 21.3m로 중국 현존한 최고의 동주(銅鑄) 불상이라고 해서 생긴 속명이라고 한다. 관음불상은 일찍 송(宋)나라 개보(開寶) 4년(971)에 만들기 시작했으며 개보 8년(975) 완성했다.

  그러나 신라인의 사신이 하북도(河北道)의 진주(鎭州, 지금의 정정현)에 나타날 때에는 관음불상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이때 돈황(敦煌) 석굴의 제61굴 '오대산도(五臺山圖)'는 5대(五代,907~960) 시기의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벽화 '오대산도'가 사막의 천년 석굴에 출현한 원인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산서성(山西省)의 오대산은 하남성(河南省)의 백마사를 이어 두 번째로 절이 섰지만 중국의 불교 성지에서 첫 번째로 꼽는 산이다.

  "꼭 가야죠, 불자라면 한번은 순례해야 할 성지이지요."

유명한 천수관음 불상, 대불사라는 이름을 만든 원인이다.

  '오대산도'는 오대산 지역의 불교 사적(事迹)과 역사지리의 그림인데, 높이 3.5m와 길이 13.5m로 제작되어 돈황의 석굴에서 가장 크고 세밀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신분이 각이하고 직무가 다른 행인들은 모두 보살을 신봉하여 저마다 공물을 봉송하고 오대산을 오가고 있다. 와중에 반도의 인연은 오대산에 특별한 것 같다. '오대산도'에서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 즉 신라의 공양 사신은 유독 말을 타고 또 최고 신분인 장관이다.

  실제로 자장(慈藏, 590~658) 법사가 문수보살을 오대산에서 친견하고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받았다. 나중에 이 사리를 반도에 가져가서 세웠는데, 지금 한국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부르는 그 절이다.

  '오대산도'에는 신라인이 장관이라고 한명만 출현하는 게 아니다. 벽화의 오른쪽 아래에는 신라의 관원과 사신, 통역관, 마부 등 5명을 분간할 수 있다. 그들은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옷깃에 둥근 단령(團領)을 입고 있다. 이 복두는 신라 때의 남자라면 즐겨 쓰던 머리였다고 한다. '오대산도'의 왼쪽 아래에는 또 '고려왕사(高麗王使)'가 있는데, 둥근 옷깃의 상의와 무릎까지 장포를 내려 입었다.

  신라(57~935)와 고려(918~1392)는 '오대산도'에서 시기가 공존하고 있다. '고려왕사'는 신라인 사절단과 관복이 다르지만 같은 양식의 흰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참고로 돈황의 석굴에는 또 제13굴에 고구려인으로 깃털을 4개 꽂은 조우관(鳥羽冠)이 있고 제237굴에 백제인이 확인되어 있다. 제17굴에는 신라 혜초(慧超, 704~787)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되었다.

  혜초는 780년에 즈음하여 오대산의 절에 입적했다고 하는데, 그 역시 오대산에 갔다면 진주를 거쳐서 간 것으로 전한다. 하필이면 진주가 오대산으로 향한 유일한 통로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의 '오대산 진향도'의 보석(補釋)에 따르면 오대산으로 통하는 동선, 중선, 서선 3갈래의 노선은 모두 정정현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더구나 진주 현성은 호타하(滹沱河) 일대의 평원에서 유일한 천험이다. 최씨는 진주 성벽의 동서남복 둘레가 무려 24리 된다고 말했다. 성벽의 서북쪽 일부가 훼손되었을 뿐 대부분 장벽이 남아있었다.

  성벽은 호타하의 범람을 이겨냈고 또 전란을 막아낼 수 있었다. 미구에 강남의 사람들도 북쪽의 성벽에 이주하였으며 성벽을 보수했다. 그리하여 한두 해 운수가 기울어도 성에는 수확이 있었고 기근이 시달리지 않았다.

  당나라 말, 삼진(三鎭)이 중앙 조정의 통제를 거의 탈리했다. 이 가운데서 성덕(成德) 절도사가 진주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화가 바뀌어 복으로 된 셈이었다. 당나라의 왕조는 운명이 심상치 않았지만 진주에는 운수가 형통하고 있었다. 이 무렵 당나라의 무종(武宗)이 거국적인 폐불 사건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성덕 절도사의 통제로 진주는 폐불 영향을 얼마 받지 않고 있었다. 백성들은 여전히 해마다 초하루 날과 열닷새이면 어김없이 대불사에 가서 향을 피우고 예배를 했다고 한다.

  오호라, 나라는 모두 흩어지고 서로 싸우고 있었으며 사찰은 안전을 기원하여 향촉을 높고 밝게 올리고 있었다.

  이 무렵 진주에 불교의 흥성이 가능했으며 많은 사원이 구조가 마련되고 있었다. 동위(東魏) 흥화(興和) 2년(540) 설립된 임제사도 기실 이때 임제원(臨濟院)라고 이름을 고쳐 들었다. 임제종을 창설한 의현(義玄, ?-867) 선사는 그때 진주에 주둔하다고 있었던 것이다. 임제선원은 바로 반도의 불교 선종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신라 시대의 도의(道義, 생몰년 미상) 국사는 784년 당나라에 가서 지장(智藏, 735-814) 대사의 선법을 전수하며 821년 귀국한 후 처음으로 남종선(南宗禪)을 전했다. 지장 대사가 바로 당나라의 고승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이다. 마조 도일은 선종의 초조初祖달마(達摩)를 이어 8조(八祖)로 된다. 신라시대 이후 고려 말의 고승 보우(普愚, 1301-1382)에 이르기까지 반도 불교의 선종은 모두 임제종의 법맥을 잇고 있었다.


조주의 관림원을 마주한 곳에 서계 유명한 석교가 있다.

  이야기를 다시 제 곬으로 돌아가자. 일본 고승 엔닌(圓仁)은 이 시기 법난(法難)을 피하고자 석가장 남쪽의 조주(趙州)에서 정정 현성으로 북상하며 미구에 오대산으로 향한다. 이 내용은 훗날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求巡禮記)'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이 기록에 나오는 조주 관음원은 한(漢)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196~220) 때 세운 사찰이다. 관음원에서 "조사(祖師)가 남긴 신발 한쪽 아직도 찾지 못했네"라고 게송을 짓고 있는데, 이 때문에 관음원 근처의 석교는 1,400년이 되는 걸작 못지않게 유명한 화두를 남기고 있다. 근년의 일이지만, 한국 불교와 다도계의 요인이 관음원에 화두를 찾아왔으며 사찰에 한중우의선차기념비를 세웠다.

  한국의 승려는 관음보살의 대불사에 자주 들리고 있었다고 사찰 직원이 말했다. 패쪽에 분명 융흥사라고 이름을 짓고 있었지만 직원은 그냥 대불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산문을 지나고 있는 시내버스의 이름에도 융흥사가 아니라 대불사라고 적고 있었다.

  사실상 사찰의 첫 이름은 이 융흥사나 대불사가 아니었다. 일찍 수(隋)나라 개황(開皇) 6년(586)에 '용장사(龍藏寺)'라는 이름으로 개창되었다고 한다. 송나라 때 불향각(佛香閣), 대비각(大悲閣), 전륜장각(轉輪藏閣) 등이 건립되었고 이어 원(元)나라와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 계속 중수를 했다고 전한다. 사찰 이름이 다시 바뀐 때는 강희(康熙) 15년(1706)에 황제가 융흥사라는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라고 한다.

  관객들이 정정현에서 대불사의 이름을 찾는 까닭은 관음불상 때문이 아닐지 한다. 천수관음은 송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명령을 하달하여 사찰에 내렸으며 하북성 네 보물의 하나로 되고 있었다.

  정작 사찰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유난히 끌고 있는 것은 불상보다 홰나무인 것 같았다. 젊은 친구 몇몇이 홰나무를 빙빙 돌면서 공경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 홰나무는 무려 1,300여년 역사가 되며 '장수의 나무'라고 불린다고 비석에 적고 있었다.


관광지의 천녕사에 안전 개념을 선전하고 있다.

  "아저씨, 우리랑 함께 홰나무를 돌면 좋을 건데요." 젊은 친구들이 일행을 넌지시 권하고 있었다.

  홰나무는 중국에서 상서로운 나무로 생각하고 중국인도 매우 귀하게 여긴다. 누군가 홰나무의 틈새에 또 행전의 동전을 끼워놓고 소원을 빌고 있었다.

  "복이 있는 나무라고 하는데요, 자연히 의지하고 보호를 해주겠지요."

  실제로 송나라 태조는 이 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가 좋은 조짐의 두루미가 나무 가지에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 길조의 정경을 만나게 되자 사찰에 신심을 얻었으며 관음 불상을 지었다고 전한다.

  인간은 새가 깃들면 즐겁고 새가 떠나면 슬픈 것 같다. 문득 홰나무에 청나라의 옛 시가 떠오른다.

  달 밝고 별이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 (月明星稀.乌鹊南飞)

  나무를 세 차례 빙빙 맴돈들, 어느 가지에 의지하랴. (绕树三匝.何枝可依.)

  새들이 나무에 앉아 있고 사람들이 나무에 거닐고 있어서 숲은 적막하지 않았다. 얘깃거리는 이보다 다른 내용이었다. 북쪽의 승려가 없는 대불사는 입장료를 받고 있었고 동쪽의 승려가 있는 임제사는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임제사가 오히려 대불사보다 훨씬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인 듯 했다.

  마치 사찰의 이야기가 오묘하게 심겨 있어서 글 하나가 같은 듯 다른 듯 각이하다. 사찰에 만든 향도의 세계가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옛날 신라인은 오대산에 다녀갔고 진주 현성을 만나갔다. 오대산의 사찰처럼 진주의 사찰을 찾아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대산도'에 있는 비밀의 코드는 종내 깨칠 수 없었다. 알듯 말 듯한 옛 벽화의 세상을 다 읽으면 안 되는 영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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