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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집거구문제에 대한 사고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2일 20:48
연변대학 미래연구소 허명철



Ⅰ 문제의 제기



20세기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국내 시장경제가 진일보로 활성화되고 주변국제환경의 완화, 특히 중한관계의 정상화가 실현됨에 따라 오래 동안 폐쇄상태에 있던 조선족사회도 그 문호를 개방하고 국내외경제문화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해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주로 농촌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들의 중국내륙지방에로의 진출과 외국나들이가 시작됨에 따라 민족문화의 보존과 경제발전에 있어서 주요한 보루역할을 해왔던 일부 집거구 특히는 농촌 집거구가 해체되게 되었고 생육관념의 변화와 경제생활의 상대적 빈곤으로 하여 연변지역에서의 조선족인구는 마이나스장성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의 감소와 집거구의 해체는 또한 상당수의 조선족학교들이 학생래원의 부족으로 문을 닫게 하였고 이는 직접적으로 민족교육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체민족인 한족에 비해 인구수량이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열세에 처해 있는 조선족사회가 이제 기존의 집거구마저 지켜가지 못한다면 자연 민족의 정체성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는 판단에서 일부 사람들은 조선족사회의 미래를 암담하게 보고 있으며 세계화란 슬로건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21세기에도 우리 조선족사회가 한 세기 넘게 고이 간직해 온 자기의 민족적인 특성과 문화적인 전통을 계속 지켜가고 발전시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현실적인 원인의 하나가 바로 과거 우리가 민족정체성을 확보해 올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었던 인구, 교육, 집거구 민족집거구는 동일한 소수민족이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역사적인 원인으로 하여 중국의 민족분포는 한족을 주체로 하는 여러 민족의 대잡거로 되어 있지만 대다수 소수민족들은 그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집거구를 갖고 있으며 조선족도 동북3성을 중심으로 많은 집거구를 갖고 있다.(『민족지식수책』민족출판사 1990년, p29)

가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우리가 과연 자체의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21세기에도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생존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심각한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을 진행하려면 우선 필요한 것이 연구자의 연구자세정립과 시각전환이라고 보아진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과거 지향적이거나 현실유지라는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된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과거 지향적인 사유방식을 바탕으로 21세기 조선족사회의 발전전략을 제정한다면 우리 민족은 세계문명과 자연히 멀리 하게 될 것이며 그 대가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업화경제논리나 실용주의적인 논리를 떠나서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를 시대성, 민족성, 발전성 등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해 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민족의 새로운 발전전략을 구상해 보는 것이 비교적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바로 미래지향적인 사고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과거 우리가 자체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지켜올 수 있었던 원인과 집거구가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 및 일으키고 있는 역할에 대해 객관적인 분석을 진행하고 그 기초 상에서 오늘날 전통적인 농촌집거구 해체와 민족교육의 위축, 그리고 이들이 파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현시대 민족정체성유지에 관련해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와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이주시기 조선족집거구 형성과 그 원인

주지하다시피 중국조선족사회는 특정된 역사환경과 조건하에서 이주민과 그 후손들을 근간으로 형성된 특수한 민족공동체이다. 이러한 민족공동체는 주로 19세기후반부터 시작된 파산된 농민들의 대량적인 이주를 원류로 형성된 것이다. 중국조선족 역사의 시작을 대체로 1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으나 고구려설, 원나라설, 명말청초설 등 여러 가지 주장도 있다. 박창욱: 『중국조선족역사연구』연변대학출판사, 1995년 참조.

다시 말하면 중국조선족은 이주민으로 중국에 건너와 정착한 韩민족의 한 갈래로서 이들은 중국 땅에 분포 정착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과 다른 하나의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구성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후에는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으로 부상하였으며 그 신분도 “불법이민”에서 중국헌법의 인정과 법률의 보호를 받는 합법적인 “중국공민”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민으로서의 조선족이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기까지에는 일정한 역사적 과정과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조선족은 이주시초부터 중국공민이 된 것이 아니다. 조선족이란 단순히 전통적 의미에서 말하는 종족이나 혈연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정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개념임을 명기해야 한다. 국적이나 민족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범주에 속하지만 중국조선족은 단순한 역사적 의미보다도 정치적 의의가 더 농후하다. 우선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으로 편입될 때 개개인의 자원의 원칙아래 법적인 절차를 받고 편입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 온 규정에 의해 편입된 것이고 편입된 후에도 조선과의 특수한 정치적 혈맹관계 및 조선족과 조선과의 혈연적인 관계 등 원인으로 하여 사실상, 감정상에서 국정관념이 매우 모호했던 것이다. 예하면 1958-59년 사이 조선에서 복구건설을 위한 인재지원을 요구했을 때 중국에서는 조선족을 모집해 보내 주었고 1960-62년과 1966-69년 사이 조선에 건너 간 중국조선족에 대해 조선은 자국민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정인갑:「한민족공동체와 재중동포」『한민족공영체』1999년 제7호, p159-160 참조.

즉 중국조선족은 선명한 민족적 특성과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중국국적에 가입했고 중국헌법의 인정을 받는 한 개 소수민족공동체인 것이다. 한준광: 『조선족』, 민족출판사, 1996년, p13.

백여 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족은 이미 한반도와의 지리적인 연대관계에서 벗어나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민족적인 문화성격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어느 민족이나 자체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면 우선 그 문화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조선족이 자체의 전통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집거구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타향에서 민족적 촌락은 사향의 마음을 달래고 서로 협조하며 생활하는 기본단위일 뿐만 아니라 민족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발전하는 생존공간에 대한 확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물리적 문화적 공간의 존재가 있었기에 조선족은 이주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이 곳에서 민족정체성보존에서의 관건인 문화교육과 언어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생활습관과 예의범절을 잃지 않고 대대로 물려주었으며 의식주 생활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은 이주초기부터 중국의 광활한 지역에 산재되어 있은 것이 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북3성의 농촌지역에서 집거생활을 해왔으며 또한 이러한 집거생활에 의거해서 오늘날까지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정신철: 『중국조선족사회의 변천과 전망』, 요녕민족출판사, 1999년 p2.

그럼 조선족이 이주초기부터 집거구를 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건국전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조선족이 이주초기부터 이국 땅에서 능히 자체의 집거구를 형성하고 보존할 수 있었던 주요원인을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생존수단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중국 동북지구에 대량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던 이주민들의 주요성원은 파산된 농민들이었다. 당시 조선북부지역에서 연속 몇 해 동안 발생한 심각한 天灾와 가혹한 人灾로 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이별하고 강을 건너 중국동북지역의 편벽한 곳을 찾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기 시작하였다. 초기 조선족선민들은 그 이민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비교적 익숙했던 생존수단에 주로 의거했고 无霜期가 짧은 동북지역에서 벼 재배 시험하여 1875년 통화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였다. 이는 수전 농사에 익숙했던 조선족이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중국 땅에서의 정착생활을 가능케 하였다. 그때로부터 조선족은 주요하게 수전 농사를 통해 자기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수전 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아 동북각지로 진출하여 조선족의 분포지역을 확대시켰다. 수전 개발은 수원지를 중심으로 자연 우리민족이 모여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고 또한 수전 농사에 필요한 관개수로공사는 일정한 규모의 노동력을 수요하였기에 한전농사보다도 쉽게 집거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둘째는 상부상조의 공동체의식이다. 인연, 지연, 혈연을 중히 여기고 예로부터 상부상조하는 마을공동체의식을 키워왔던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도 초기 집거지 형성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비록 자신들의 생활형편도 넉넉하지 못했으나 “조선에서 갓 이사온 사람들이 서로 이집저집 다니며 온 겨울 먹어도 밥값을 받는 법이라곤 없었다.” 북경조선족청년학회 편:《중국조선족이민실록》(한희운가정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그리고 “조선에서 이민들이 들어오면 이집저집에서 강냉이며 감자며를 몇 마대씩 모아서 가져다 주군 했으며” 위의 책, 권봉희가족편.

지어 조선에서 온 가족들을 데리고 돈 한푼 없이 찾아와도 “이웃집들에서 사발이랑 접시랑 저가락이랑 모아서 살림을 차려줬다.” 위의 책, 권석진가족편.

한반도에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았고 서로의 안면도 없었지만 일단 이국 땅에 와서는 모두가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좋게 지냈고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생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미덕과 공동체의식이 초기 조선족집거구 형성에 큰 역할을 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셋째는 민족교육과 종교이다. 남달리 교육을 숭상해 왔던 우리민족은 생활난으로 이국 땅에 건너와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자녀교육만을 잊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선족의 이주사가 바로 조선족교육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족선민들은 그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향학열만은 식지 않았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장차 출로가 있다는 도리를 명심하고 있었던 조선족선민들은 중국에 건너온 후 “이사를 해두 늘 학교 있는데루 이사했다.” 위의 책, 황치일가족편.

학교나 서당을 중심으로 이민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자연적으로 집거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학교교육운동과 더불어 조선족주민들의 단결의 기둥으로 되고 정신적인 기탁으로 된 것은 종교였다. 종교는 조선족농민들이 생활상의 어려움을 이겨 가는 힘이었으며 또 그들을 단결시키고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 응집력으로 되였다.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1: 『개척』민족출판사 1999년, p321.

넷째는 일제에 의한 강제이민이다. 1931년 〈9․18〉사변 후 일제는 동북을 저들의 전략적인 후방과 기지로 만들기 위해 이민계획을 작성하고 435개 이민“개척단”을 동북에 파견하였으며 조선총독부와 위만주국은 또 《재만선인지도요강》을 제정하고 해마다 조선에서 1만 가구를 이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들은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른바 집단개척민으로 많은 조선농민들을 저들이 동북에 설정한 39개의 이주구역에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는바 1937년부터 1941년 사이 2만 4천여 호의 조선농민들을 동북에 이주시켰다. 일제의 계획적인 집단이민책의 실시는 다른 일면에서 놓고 보면 조선족사회의 초기 집거구 형성에 일정한 도움이 되였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요인들로 하여 형성되었던 초기 조선족집거구가 그 당시 사회적 자연적 여건에서 능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선민들이 중국 땅에 이주해 온 뒤 자신의 두 손으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자원적이고 집단적인 인구이동이 거의 없었고 지방통치당국에 의한 강제이민행위도 없었기에 집거지역에서의 규모가 큰 인원이동이 기본상 근절되었다. 이리하여 단순한 삶의 터전과 생활공간확보를 목적으로 형성되었던 집거구는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온정기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선민들이 처음 생활의 터전을 잡았고 그 기초 상에서 형성했던 집거구는 대부분 인가가 드물고 문화적으로도 불모지였던 중국동북지역은 원래 청정부의 봉금지역이었기 때문에 지역에 비해 인가가 드물었고 관내 한족들의 관동진출도 조선족의 천입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주초기 동북지역 특히 농촌지역에는 근대문화전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조선족이 문화적으로 열세에 놓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졸고: 「중국조선족문화가치의식을 논함」,『북방민족』1999. 제4기, p100 참조.

편벽한 산골이었다는 점도 초기 집거구 형성과 보존에서 홀시할 수 없는 한 개 변수이다.



이주민의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초기 집거구는 이국타향에서 이민들의 망향의식과 마음을 달래고 서로 의지하고 협조하면서 생활하는 생존의 기본단위로 역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권에서 자체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오는 보루작용도 하였다. 이러한 집거구 존재가 있었고 또한 집거구에서 형성되었던 문화적인 힘이 있었기에 조선족선민들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중국봉건통치세력들의 “삭발역복”과 같은 민족동화정책에 맞서 싸우면서 자기민족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으며 또한 민족경제를 형성 발전시킬 수 있는 최초의 경제적 문화적 토대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Ⅲ 집거구 해체에 대한 분석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조선족은 이민의 신분을 떠나서 헌법의 보호를 받는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었고 자치권리도 향수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당의 정치적 배려, 경제적 지원, 문화적 보호는 중국조선족사회가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문화를 지켜오고 발전시켜 올 수 있는데 유력한 힘으로 되었다. 어찌 보면 건국 후 조선족사회가 자체의 민족성을 보존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체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도 중요했겠지만 그 보다 더 주요했던 것은 당의 올바른 민족정책의 실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국내 소수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려 왔던 중국공산당은 민족평등을 기본원칙으로 민족정책을 제정하고 실시하였으며 각 민족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여러 면에서의 발전에 관심을 돌리고 동일민족이 비교적 집중되어 있는 지역에는 자치제도를 실시하여 민족자치지역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각 민족의 언어와 문자 및 풍속습관을 존중한다는 정책을 제정하고 각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자유로운 발전을 권장하였다. 이와 같은 소수민족보호정책은 조선족집거구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등 사업의 순조로운 진행에 많은 편익을 제공해 주었고 집거구 거주민들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을 크게 제고시켰다. 이는 당시 산재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성원을 흡인하기에는 아주 충분하였다. 집거구 생활환경의 개선과 산재지구에서 집거구에로의 이동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집거구를 보다 공고히 하게 되였다.

그 외에도 당시 중국에서 실시했던 호적제도와 같은 사회제도적 장치도 대량적인 사회인구이동, 특히는 농촌인구의 도시진출을 거의 불가능케 하였고 교통과 통신수단의 미발달 등 원인으로 하여 이주시기 형성하였던 집거구는 건국 후에도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일부 지역은 자치권리까지 행사하게 되어 조선족사회는 기존의 집거구를 토대로 안정된 사회정치경제환경 속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조선족은 정치적으로 민족자치권리를 향수하고 중국공민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수전 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경제구도를 구축하고 발전시켜 왔다. 민족교육에 있어서도 50년대에 이미 초중교육을 보급시켰으며 유아교육으로부터 고등교육에 이르는 민족교육체제를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자기의 민족적인 특색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자기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과 미풍양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후대들에게 전수하였다. 정신철: 『중국조선족사회의 변천과 전망』요녕민족출판사 1999년 p44-46.

그러나 20세기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조선족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일부 문제점들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특히 90년대에 와서는 이런 문제점들이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모종 의미에서 조선족사회정체성의 존속여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집거구 문제와 민족교육문제는 상식적으로도 민족정체성의 유지와 쉽게 연결되어 오기 때문에 현재 조선족사회의 주요한 관심사항의 하나로 되고 있다. 김관웅교수는 『중국조선족 한글문학의 역사적 사명』이란 글에서 집거지의 형성과 집거생활은 중국조선족이 150여 년 동안 중국문화속에서 자기 문화의 정체성,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굳건하게 생존해올 수 있었던 첫째가는 요소라고 지적하였다.

《종합신문》1998년 5월 18일자 참조.

오늘날 조선족집거구 특히 농촌집거구의 해체를 불러일으킨 주요원인에 대한 학계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주로 두 가지에 귀결된다.



하나는 조선족사회의 인구자연장승률의 하강에 따른 인구감소이다.

집거구형성과 보존에는 일정한 수량의 인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장시기 실시되었던 중국정부의 산아제한정책, 농촌인구가 도시에로의 이동, 현대 청년들의 생육관념의 전환, 자녀양육과 교육에서 지출되는 경제적인 부담의 증가, 농촌조선족청년들의 남녀비례 불균형 등 요소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하여 최근 들어 조선족사회의 인구자연장승률을 급격히 내려가고 있으며 지어 마이나스장성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사회의 인구감소 유래를 연변지구를 실례로 놓고 보면 조선족은 50년대 초에 몇 만명 조선족청년들이 참군 혹은 경제건설지원으로 조선에 나갔고 60년대 초의 경제곤난시기에도 문화대혁명시기에도 수천 명이 조선에 건너갔다고 한다. 오늘날 개혁개방이후에는 수많은 헤아리는 조선족이 산해관을 넘어갔고 외국에 돈벌이를 떠났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이 여성이고 그것도 생육기에 처해 있는 20-30대 여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청도시 조선족직업소개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여성들은 간단한 서류를 번역하고 컴퓨터를 다룰 수 있으면 한국기업에 거의 취직이 되며 음식점을 비롯한 기타 업종의 취직도 가능한 반면 남성들은 남다른 특장이 없으면 학력이 아무리 높다해도 취직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것이 도시진출에서 여성이 남성을 초과하는 원인이 아니겠는가고 필자는 생각한다. (《요녕조선문보》2000년 4월 28일자 관련기사 참조)

그리고 산아제한정책실시에서도 조선족은 앞장에 섰는바 1983년도 연변에서의 산아제한률은 91.4%였는데 1996년에 와서는 99.29%에 달하였는바 많은 조선족가정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하였다. 결과 1991-1996년 조선족인구출생수는 0.96만에서 0.43만으로 줄어들었고 반면에 조선족의 중로년인구사망률은 77.95%로서 전국의 평균수치와 한족의 평균수치보다 각기 3.21%와 4.77% 높았으며 량학민 외:「연변조선족인구마이나스장성 현상태와 그 원인 및 대책」,『문화산맥』(4)

1997년에는 조선족인구의 자연장성률이 처음으로 마이나스장성을 기록하게 되었다.



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은 인구이동이다.

인구이동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호구를 원거주지에 두고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공간(지역)위치의 변동을 말하는데 국내에서의 인구이동을 놓고 주로 농촌에서 농촌에로,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도시에서 도시에로 등 네 가지 형태가 있다. 侯文若: 『全球人口趋势』, 世界知识出版社, 1988年版, p243.

조선족의 인구이동은 이동지역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바 하나는 국내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국외이동이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 인구이동는 양적으로 그 비례가 중국내 기타민족보다 훨씬 높은바 국내 인구이동은 주로 농촌에서 도시로, 소도시에서 연해 개방도시에로의 이동이며 인구이동의 주체는 조선족농민들이다. 따라서 인구이동은 농촌인구의 상대적인 감소를 초래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농촌집거구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



오랜 시기동안 조선족농민들은 단일한 벼농사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왔으며 자신의 피 타는 노력과 민족정책의 혜택을 입어 경제적으로도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공민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민족자치권리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조선족사회는 전통적인 생활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벼농사 위주의 경제구조도 개변시키지 못하였다.

사실 건국 후 몇십 년 동안 조선족은 당의 민족정책의 보호아래서 생존해 왔는데 이는 정부와 정책에 대한 의뢰성을 강화시켰고 이러한 의뢰성의 강화는 모종 의미에서 조선족의 주체적인 창의성과 진취성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사회가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군체로 성장하고 헌법의 인정을 받는 한 개 족성을 지니게 된 데에는 상당한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조선족은 이민초기와는 달리 경제적인 생존보다도 정치적인 생존을 더 중히 여기였고 어찌 보면 지나치다 할 정도의 정치적인 민감성을 보였다. 결국 개혁개방의 실시와 시장경제체제의 도입과 더불어 국가차원의 정책적인 보호가 줄어들고 모든 것은 치열한 시장경쟁을 통해 획득해야 할 때 우리는 시장경쟁의식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시대에 뒤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뒤늦게나마 과거의 폐쇄적인 생존방식과 농경문화에 대한 반역으로 조선족농민들은 대량적으로 연해개방도시와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집거지 해체를 비롯한 전반 조선족사회의 심각한 변혁을 초래하였다.



특히 20세기 80년대에 들어와서 보급되기 시작한 농촌호도거리는 농민들의 생산적극성과 자주성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생산의 자주성은 그만큼 집단에 대한 의뢰성을 약화시키고 각자 능력에 따른 다각경영을 유발하였으며 생산적극성과 노동효율의 제고는 개개인이 실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다. 능력, 시간, 잉여노동력의 출현 및 정책상의 생산경영자주성 권장과 보호는 단일한 벼농사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도전을 가능케 하였고 빈곤에서 하루속히 탈출하려는 욕구는 모험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도시진출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시경제체제개혁과 엄격한 간부인사제도와 호적제도의 완화는 객관적으로 농촌인구의 도시이동에 편리를 제공해 주었다. 조선족여성들의 김치장사로부터 시작된 도시진출은 나중에 음식업, 무역업, 관광업, 유흥업 등으로 확장되었고 반면에 농촌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흑룡강성 녕안시 조선족향촌의 총 노동력가운데 촌을 떠난 사람이 35%를 차지하고 명성조선족촌의 80여 호 가운데서 일가족이 몽땅 떠난 집이 79호나 된다. 길림성 구태시 홍광조선족촌의 387호 가운데 50호가 촌을 떠났고 400여명 노동력가운데 촌을 떠난 사람이 반수를 차지한다. 보도에 따르면 1990-1996년 사이 동북3성에서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한 조선족인구는 2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종합신문》, 1997년 1월 6일자 참고.

조선족인구이동의 또 하나의 현저한 특점은 한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이다. 20세기 9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의 개방정책이 날로 심화되고 주변국제환경이 날로 완화됨에 따라 조선족은 지연, 인연, 혈연 등 우세를 이용하여 해외진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족은 그 대부분이 국경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대조선, 러시아 무역과 보따리장사로부터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자 즉시 “한국나들이”붐을 이루었다. 초기의 친척방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산업연수, 노무송출, 섭외혼인 등 여러 가지 도경을 통해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만 해외노무로 간 연인원수는 3만 명 이상에 달했고 연변에서도 97년 초까지 해외에 파견된 각종 노무일군이 연인원수로 3만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 시집간 여성수도 엄청났다. 한국영사관에서 밝힌 통계 자료를 보면 한국에 시집간 조선족여성이 1993년에는 1463명, 1994년에는 1995명, 1995년에는 7683명으로 나타났고 1996년에는 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종합신문》1997년 4월 7일자 참조.



조선족농민들이 집거구를 떠나 도시로, 해외로 진출하게 된 주요 동기는 빈곤에서의 탈피와 새로운 생존방식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원인은 사실상 농촌조선족학교 교육의 부진이다. 일찍 50년대에 이미 초중교육을 보급시킨 조선족의 교육열과 교육수준은 전국적으로도 앞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지나치게 교육보급에만 주력해 왔기에 학교분포구조와 교육수준제고에 일정한 문제점이 존재하게 되었는바 학교가 분산되고 규모가 작으며 교육시설이 구전하지 못한 등 폐단으로 하여 농촌학교와 도시학교와의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심해졌다. 게다가 줄곧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유지되어 왔던 조선족교육사업은 시장경제의 도입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학생래원, 자금난 등 원인으로 하여 조선족학교분포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학교분포조정에서 우선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히 농촌학교이다. 분포조정을 거친 후 비록 기숙제 도입 등 여러 면으로 농촌학교교육의 출구를 모색하고 있지만 농촌학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욕망을 여전히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하여 일부 부모들은 자식들의 장래를 고려해서 무작정 도시로 진출하여 자식의 뒷바라질 해준다. 어찌 보면 농촌학교교육의 부진이 경제적 낙후성과 더불어 농촌집거구의 해체를 초래했다고도 할 수 있다.

Ⅳ 집거구해체가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과거 우리가 집거구의 존재를 토대로 민족경제를 진흥시켰고 민족교육을 보급시켰으며 자기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지켜왔다고 한다면 오늘날 농촌집거구의 해체는 사실 다른 측면에서 조선족사회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다.



우선, 농촌에 남아도는 인력을 해소하고 농촌경제의 집약화를 추진하였다. 농촌경제체제개혁에 따라 실시된 호도거리는 농민들이 생산경영의 자주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생산적극성과 노동효율성을 크게 제고시켰다. 그리고 과학영농의 도입과 보급은 농촌에 잉여노동력과 여유시간을 산생하였는바 이는 다각경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향진기업체의 운영과 개인들의 도시진출은 농민들의 경제적인 수입을 증가시켰고 또한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보다 많은 땅을 다룰 수 있게 되어 간접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되었다. 예하면 흑룡강성 해림시 조선족농촌의 경우 총 노동력의 1/3은 도시에 진출하고 1/3은 해외노무로 나갔기에 결국 나머지 1/3이 되는 사람들이 전체가 다루던 밭을 다루게 되어 농업생산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토지의 집중과 향진기업의 운영, 그리고 당지 실정에 따른 다각경영은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제고시켰고 농촌경제의 집약화, 산업화에로의 이행을 가속시켰다.

심양시 은하참조선족향 만융촌사람들은 90년대 초반부터 지리적 인적 우세를 빌어 여러 가지 우대정책으로 국내외 자금을 유치하여 현재까지 27개소의 기업체를 세웠고 농, 공, 상 종합운영을 통해 “만융기적”을 창조하였다. (《연변일보》2000년 2월 4일자 참조)

다음, 농민들의 도시진출은 조선족사회의 경제구조를 개변시켰다. 과거 조선족인구의 약 80%가 농업생산에 종사하였으며 그 대부분이 단일한 벼농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의 도시진출과 더불어 크게 개변되었는바 현재는 제2, 제3산업이 전반 민족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농업생산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내려가고 있다. 연변자치주의 경우를 놓고 보면 GDP에서 제1, 제2, 제3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80년의 23.6%, 51.2%, 25.2%에서 1999년의 17.6%, 42.0%, 40.4%로 변화되었고 『연변통계년감』(1998) p35.

요녕성 조선족촌의 경우 1995년도 총생산액이 명확한 106개 촌 가운데 제2, 제3산업의 생산액이 제1산업을 초과한 촌이 64개로서 전체의 60.4%차지하는데 그 가운데서 제2, 제3산업의 비율이 90%이상 점하는 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요녕성민족사무위원회 소수민족언문공작판공실 편: 『요녕성조선족촌기본정황표』참조.

더욱 중요한 것은 도시진출은 사람들의 전통적인 관념을 개변시켰고 의식구조의 심각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도시진출과 더불어 현대산업문명과 도시문명을 접하게 된 조선족농민들은 전통적인 소농경제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현대사회의식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혈혈단신으로 도시에 진출하여 생활의 터전을 닦는 가운데서 시장경제에 적응할 수 있는 자립의식, 경쟁의식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해외나들이를 했던 사람들은 경제적인 부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경영관리사상과 현대사회의식을 접수하여 개인의 소질제고도 가져왔다. 이러한 의식전환과 관념갱신은 우리 민족사회변혁과 민족문화의 질적인 비약을 추진하였으며 전반 조선족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되였다.



그러나 전반 중국사회전환기에 나타난 농촌집거구의 해체는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동반하고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기존의 농촌집거구 해체에 따라 초래된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는 우선 민족교육문제이다. 인구이동에 따른 농촌집거구의 해체는 민족기초교육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농촌인구의 감소는 학생래원을 줄어들게 하였고 학생래원의 고갈로 일부 농촌학교들에서는 부득불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 1908년 10월에 민족의 유지인사들에 의해 세워졌고 80년의 역사를 자랑해 오던 유서 깊은 정동중학도 학생래원의 고갈로 1999년 8월 문을 닫아야 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관련기사는 《연변일보》1999년 11월 26일자 참고.

학생래원의 고갈, 학교규모의 축소, 교원류실, 교육경비부족 등 원인으로 인한 농촌학교교육의 위축상태는 농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향토에 대한 애착심과 생존능력은 갖고 있으나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여 무작정 도시진출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인구이동과 농촌학교교육의 위축은 하나의 악성순환에 말려들고 있다.



집거구해체가 물의를 빚고 있는 또 다른 원인은 민족언어문자의 상실을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조선족자치지역에 속해있는 연길시에서 한족소학교와 초중을 다니는 조선족학생이 1998년도에는 1891명이었고 1999년도에는 2000명을 넘고 있으며 안도현 명월진에 학족학교가 2개 있는데 재학중인 조선족학생이 900명이 된다고 한다. 《연변일보》, 2000년 3월 11일자 관련기사를 참조.

그 주요원인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한어를 더 잘 배우기 위해서가 83.00%를 점하고 경제부담이 감소된다가 9.80%를 점하였다. 한어를 잘해야 장차 중국 땅에서의 생존에 유리하고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조선족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보편심리인 것 같다. 즉 민족언어와 문자도 중요하지만 언어에 대한 이해가 실용적이고 언어는 단지 교제의 도구라는 측면에서 한어를 선호하고 있는 것 같다. 언어는 사람들의 사유방식이나 심리적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민족성원간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대전제이며 민족문화를 전파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가에서는 우리말과 글을 “민족의 얼을 지키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독자성 특성을 지키는 유일한 문화적 장치요, 방성”이라고 보고 있다.

(김관웅:『중국조선족 한글문확의 역사적 사명』)그러나 한어가 중국에서 통용언어로 되고 있는 이상 이미 그 민족적인 의의를 상실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한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동한 민족과 문화간의 지식교류를 진행하는 것에 불과하며 언어동화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헌팅톤도 통용언어는 언어차이와 문화차이를 처리하는 방식이지 그 차이를 소멸하는 방식이 아니다. 통용언어의 사용은 결국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인정을 강화하게 되며 사람들도 자체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통용언어를 사용하면서 기타 민족과 교류를 진행하는 것이다고 하였다.(『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건』중역본, 1998. p49-50참조)

이점은 현재 조선족사회에서 일고 있는 “외국어공부”나 “컴퓨터학습”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연변주 해당부문의 집계에 따르면 전주적으로 외국어양성쎈터와 외국어전문학교가 50개소가 있는데 연길시에만 38개소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연길시 조선족중소학교 수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한어를 선호하는 경향은 산재지구에 있는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더욱 심각하다. 산재지구의 조선족2세, 3세들은 지어 일상교제에서도 자기민족언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길림성 반석진 조선족을 상대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26-35세 사이의 조선족중 조, 한어 겸용자가 97.1%를 차지하고 본민족어를 모르는 자가 2.9%를 차지한다. 18-25세사이의 조선족중 조, 한어를 겸용하는 자가 75.8%, 조선말을 모르는 자가 24.2%, 중학생가운데 조, 한어 겸용자가 60.2%, 조선말을 모르는 자가 39.8%, 소학생가운데 조, 한어 겸용자가 45.5%, 조선말을 모르는 자가 54.5%, 학령전 어린이 중 조, 한어 겸용자가 39.1%, 조선말을 모르는 자가 60.9%라고 한다. 그리고 길림성 잡거지구의 조선족 학령전 어린이 중 한족학교에 입학하는 수자도 날로 증가되고 있는바 반석진은 42.5%, 통화현은 51.7%, 휘남현은 32.4%, 집안현은 40%, 장춘시구역은 85.3%, 길림시구역은 85%, 서란진은 54%, 교하진은 25%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안화춘:「21세기에 대비한 중국의 조선족인구문제」,로주철 주편:『조선민족문화연구』요녕민족출판사 1999년, p223-224 참조.

특히 북경, 천진, 상해와 같은 대도시에서 사는 조선족청소년들은 거의 90%이상이 조선문자와 언어를 모르고 있다.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인문성이나 혹은 민족문화보존의 차원을 떠나서 언어를 단순하게 일종 교제수단이라고 볼 때 교제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산재지구에서는 그 교제대상을 찾기 힘들기에 아예 한어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집거지의 해체는 그 만큼 우리민족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일가에서는 보고 있다.

그리고 연변자치주의 경우 조선족인구비례가 감소되고 농촌인구의 대량적인 이동으로 하여 조선족이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가 문제시되고 있다. 1952년 조선족자치주성립 당시 연변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인구비례는 64.0%에 달했고 조선족간부가 차지하는 비례도 74.00%에 달했는데 현재는 43.00%밖에 점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족인구비례도 현저히 내려가고 있는데 1999년도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의 총인구는 218.6만 명인데 그중 조선족인구는 84.7만 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38.8%를 차지하는데 이는 지난해에 비해 0.1%이 내려간 것이다.

연변주 통계국:《1999년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에 관한 통계》

연변주정협의 이길웅선생은 90년대 연변조선족인구장성률에 근거하여 추측한데 의하면 조선족의 인구비례가 2030년에 가서 8.73%밖에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추세대로 한다면 조선족자치주는 유명무실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조선족 스스로가 자치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된다.



총적으로 농촌조선족학교기초교육의 불경기상태가 날따라 심각해지고 학생래원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반면 한족학교로 전학하는 풍조가 심해지고 있으며, 조선어와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의 축소, 그리고 조선족인구의 자연장승률의 하강 등은 결과적으로 민족정체성의 확보를 위협하게 되며 민족문화의 동화를 가속시킨다고 보고 있는데 이 모든 문제들의 초점이 결국 집거지해체와 민족교육의 부진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Ⅴ 집거구해체에 대한 문제의식

상술한 원인으로 논란 속에 처해 있는 집거구해체를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가. 과연 위기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제성장과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김호웅교수는 중국조선족은 여직껏 비교적 폐쇄적인 집거구를 가지고 전통적인 문화교육을 보존해 왔는데 이는 하나의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으나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오늘 사회에서 우리가 계속 폐쇄된 생활을 한다면 민족의 생존이 어렵게 되며 도시산업화의 발전과 더불어 도시인구가 팽창되고 농촌인구가 감소되는 것은 동서양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현상으로서 중국의 조선족도 바로 이 보편화과정을 밟고 있다고 보고있으며 농촌인구의 도시진출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하였다. 《종합신문》, 1997. 5. 12.

그리고 집거구해체에 따른 문제들을 또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이 문제의 해답에 앞서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의미하고 있는 민족이란 무엇이며 민족의 존속에서 집거구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느냐 하는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민족이란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 개 생활공동체를 가리킨다. 민족의 혈연적 공통성은 언어와 풍속 및 심리적 특질 등 민족문화의 특성을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바탕으로 되며 뿌리깊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하는 전제조건으로 된다. 민족적 영토는 민족을 이루는 사람들의 생존과 발전을 조건짓는 터전이며 민족의 언어적 공통성과 문화적 공통성이 이루어지게 하는 기초이다. 언어의 공통성은 민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표징이며 언어는 특히 민족의 자아의식과 창조된 능력을 키워주는 기본수단이다. 한 개 민족이라 할 때 혈연, 지연, 풍토적 환경을 같이하면서 오랜 역사적 공동생활을 해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동의식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민족의식이고 민족적 전통이다. 이런 의식과 전통이 보다 더 세련되면 결국 민족정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최재희: 『인본주의윤리학』, 일신사, 1984, p.281

민족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본토민족에 대한 고찰을 토대로 한 것으로 이민으로 구성된 조선족사회에 대해 어느 정도 적합할지는 진일보 고찰해야 하겠지만 현대사회에서 국경도 무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구식의 근대민족국가의 토대에서 형성된 민족개념을 현시대의 시각에서 새롭게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현대 민족은 주요하게 일종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민족의 운명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특정된 문화의 평화적이고 지속적이며 자주적인 발전과 자유로운 번영에 대한 기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세계 각개 민족의 사회발전도 모종 의미에서 그 나라 국민이 민족역사와 민족운명에 대한 부단한 해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민족에 대한 이해에서 문화적인 성격을 부각시킨다면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우리가 집거구에 의존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민족문화를 지켜가야 한다는 주장은 우선 그 전제에 대한 검토가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즉 중국의 한 개 공민으로서의 중국문화와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야 하는 것인지-- 이 점에서는 집거구해체가 거론될 이유가 없다.--아니면 조선민족으로서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가야 하는 것인지-- 이 점에서 출발한다면 한반도문화를 그대로 접목시키거나 혹은 수용하면 된다-- 혹은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주체성을 자각시키는 중국조선족문화를 지켜가야 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자체문화를 지켜간다는 것은 이미 조선족문화와 중국문화 및 한반도문화와의 어느 정도의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특색의 조선족문화건설문제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아마 이 점에 착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조선족문화를 형성하고 지켜갈려면 우선 이 문화를 창조하고 영위해 갈 매개물 즉 주체가 있어야 하는바 이러한 주체의 생존을 위해 일정한 수량의 조선족성원과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辐射할 수 있는 문화원 측 조선족집거구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홍우교수는 집거구건설의 필요성을 언어의 생존, 민족문화의 생존과 발전, 민족성격의 보존 등 세 가지 측면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홍우: 『조선족의 전망』,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6. p.98-99 참조

이 점에 대해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의되어야 할 점은 집거구에 대한 현대적 이해이다. 발달된 통신과 교통수단은 기존의 시간공간개념을 초월하여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지구촌의 모든 성원들을 일일생활권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였다. 과거 한 개 촌락을 기본단위로 하는 봉폐적인 집거구 개념은 이미 시대발전에 훨씬 뒤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집거구건설 혹은 집거구 보존을 논할 때 응당 집거구에 대한 관념갱신이 앞서야 한다. 과거의 시간공간개념으로 오늘 사회현실을 대한다면 우리는 현대문명과 멀리하고 살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아직도 과거의 집거구개념에 대한 이해 단계에 멈추어 서서 기존의 농촌집거구의 해체를 념두에 두고 민족의 위기설까지 거론한다면 이러한 거론자체가 일종 새로운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구축된 농촌집거구였다면 우리의 희망은 바로 도시에 새롭게 일떠서고 있는 새로운 집거지 즉 정보화, 산업화문명을 기반으로 부상되고 있는 “코리아타운”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농촌집거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집거구 형성과 이러한 형성과정에서 부딪치고 있는 문제점들, 이를테면 자녀교육, 도시에서 민족교육의 실시문제 등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초기 집거구 형성에 있어서 우리는 앞에서도 이미 지적한바 있지만 주로 수전농사에 따른 생존수단에 많이 의뢰하였다. 당시 수전농사를 주요한 생존수단으로 간주해왔기에 우리민족은 토지를 떠날 수 없었고 농경문화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이미 산업화단계를 넘어서 정보화사회로 변모하고 있으며 네트워크화사회, 디지텔경제는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다원화한 생존수단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리고 중국사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대외개방정책, 인력시장의 개방 등도 우리들에게 생존공간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시대발전의 요구에 비추어 본다면 기존의 농촌집거구 해체는 일종 필연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자기민족 정체성 유지 하나만으로 밀물처럼 몰려오는 지구촌시대의 “문화산업”의 공세를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다.

조상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이 땅을 우리 세대에 와서 버린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쉽게 접수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새 생명 탄생전의 고통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민족의 아름다운 내일과 휘황찬 발전을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하고 국내에서 국외로 진출하여 민족의 전통문화와 현대문명을 하루속히 접목시켜 시대적인 도전을 맞받아 민족의 비약을 실현해야 한다.



Ⅵ 맺는 말

오늘날 우리는 농경문화시대와 전혀 다른 이른바 사이버시대에 살고 있다. 사이버문명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으며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생존방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또 한차례 일대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선 먼저 시대의 맥박을 진단하고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과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문화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구의 수량과 성격 그리고 그 인구집단의 유동성을 통해서 정보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고 이 같은 과정은 공동체의 문화적 성격을 객관적으로 규명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지향하는 문화의 미래상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족농민들의 대량적인 도시진출은 바로 우리민족 전통문화의 현대적 이행의 시작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새로운 생존방식에 대한 갈망을 대변해 주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도전을 회피하고 기존의 사유패턴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우리 민족을 또 하나의 “인디안인”으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오늘날 지식혁명을 통한 네트워크고속도로의 형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될 뿐만 아니라 천재일호의 기회로도 되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부합되는 의식전환과 관념갱신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집거구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며 또 이러한 작업을 통해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모종 의미에서 보면 특정된 문화권에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보존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그 민족군체의 실재성이라고 보고 있다. 민족정체성확보나 민족문화의 전승에 있어서 그 핵 작용을 할 수 있는 집거구의 역할은 자못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집거구가 있다고 해서 정체성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민족정체성확보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 과거 우리가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정체성을 보존하려면 우선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고 공동의 심리의식을 키워야 하는바 이를 위해서는 외적인 것 보다 내적인 의식교양을 통해 스스로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자체의 민족성과 문화를 지켜가게 해야 한다.

민족집거구의 축소는 민족언어와 문자를 비롯한 전통문화의 소실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민족학교의 규모도 점차 축소시키고 있지만 반면 민족의 자아의식을 강화시키고 있다. 타민족문화권에서 생존하게 된 이동인구는 결국 자기결속력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느끼면서 민족의식이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직껏 우리가 중국의 모든 사회적인 구도조정에 수동적으로 말려들었다면 오늘날 도시진출과 네트워크참여는 조선족사회의 자주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농경문화에 대한 반역과 새로운 삶의 방식 추구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삶의 개척은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개개인의 엄청난 대가도 있겠지만 전반 민족사회에 있어서도 곤혹을 치르게 된다. 민족의 생존을 위한 도시진출은 집거구해체를 의미하고 집거구해체는 결국 민족생존을 위협하게 된다는 논리로 이어져 조선족은 현재 이율배반적인 모순속에 처해있다. 이러한 모순심리에서의 해탈은 관념의 전환에 있다 즉 과거의 관습과 사유방식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시각에서 사회변혁을 통찰해야 한다. 의미 있는 것은 오늘날 해체되고 있는 것은 기존의 농촌 집거구이고 반면 도시에 새로운 “코리아타운”이 일떠서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족의 연해 지구에서로의 진출은 이미 기정사실로 된 이상 우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드려 위해, 청도, 대련, 북경, 상해, 천진 등 도시들에 새로운 집거구 형성을 적극 추진하며 조사에 따르면 현재 대련시에 조선족인구 5만여 명과 거주신고를 한 상주한국인이 700여 명이 있으며 위해시에 조선족인구 2만 명과 거주신고를 한 상주한국인이 3000여명이 있으며 청도시에는 조선족인구 3만여 명과 거주신고를 한 상주한국인이 1만여 명이 있다고 한다. (《길림신문》1999년 11월 25일자 관련기사 참조)

우리민족의 생존공간을 부단히 확장해야 한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불법, 강제, 핍박에 의한 수동적인 이민행위로 인가가 한적하고 외계와 동떨어진 산골을 택하여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삶의 자세를 바꾸고 주동적이고 주체적인 선택행위로 보다 좋은 삶의 추구를 위하여 세계문명에 접근할 수 있는 개방도시에로의 진출을 시도해야 한다. 현대화한 농촌과 현대화한 도시의 상호 호응은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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