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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렬취재 1] “황혼이 다가와도 저녁놀은 아름답게”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14.10.15일 14:39
[중국조선인60세이상작가계열취재1]


“황혼이 다가와도 저녁놀은 아름답게”





“나의 인생은 어언 석양길에 들어섰고 글쓰기에서도 오래잖아 황혼이 다가올 것이다.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불 태워 쓰는 글로써 내 인생의 저녁놀을 조금이라도 어여쁘게 물들이고 싶은 욕망, 아직도 살아있다.” _김응준


김응준, 그의 숙명은 문학이요, 그의 천명은 시인이다. 광풍이 련련히 몰아치고 고패치는 그 세월에 한때 억울한 서리를 맞고 변강 벽지에 가서 움츠러들어 거의 절필하다시피 했던 시절에도 그는 마음속 깊이 알게모르게 움틀거리는 문학에 대한 욕망을 앞으로 언젠가는 터치울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때는 일찍 그가 뿌리를 내린 중국 변강의 땅 훈춘으로 이른다.




가난한 학창시절

그는 1934년 10월 14일(음력)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태평구(현 해방촌)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적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그때 아버지는 검정귀버섯을 팔아 공부를 계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산에 갔다가 전염병(왜놈들이 패망하기 직전 동북대륙을 휩쓸던 그 몹쓸 전염병 콜레라로 인해)에 걸려 결국 열흘만에 사망하고 연이어 삼촌과 여동생을 모두 잃었다. 태평소학교를 다녔던 그는 어릴적부터 공부를 유난히 잘하였지만 가난한 살림때문에 부득불 학교를 중퇴했어야만 했다. 이젠 농사를 하려고 하던 찰나, 1942년 로을룡선생의 간곡한 권고 하에 그는 2년간 짚신을 신고서 밀강소학교에 통학을 하게 된다. 그 시절, 가난한 살림에 도시락을 싸갖고 가지 못하여 배고픔을 달래러 마을 관자집에 들어가서 타래떡 냄새를 맡군 하였는데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었다. 5,6학년을 밀강소학교에서 마치고 또 다시 집안일을 도우려고 다짐을 하였다가 초중입학시험 일주일 전 전학손선생의 “초중에 입학하면 5원의 조학금을 받을 수 있고 또한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라”는 의미심장한 얘기에 생각을 바꾸었다. 후에야 그는 그때 전학손선생이 통신학부에 “앞으로 계속 노력하면 우수한 머리에 무한한 발전을 기할 것이다.”라는 글을 쓴 것을 보고 희망찬 앞날에 대한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초중입학시험 결과 12명중 2명이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도 포함되었다.

훈춘중학에 입학하여 과외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한 그는 작문경색에 나가 우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앞으로 걷게 될 문학의 길에서 재능과 소질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수 있다.

고중에 올라갈 무렵인 1952년, 그는 리학용 담임선생님의 권고로 학비가 안드는 연변한어사범학교(로동자문화궁 서켠에 있는 공상은행 사무소 자리에 허름한 단층 벽돌집)에 입학하였다. 이는 나중에 연변대학 중문계로 입학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학교에서는 자연과를 설치하지 않고 주로 중문을 몇개 과목으로 나누어 배우는 외에 조선어, 정치, 력사, 지리, 음악 등 과목을 더불어 가르쳐주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할 길은 막히고 문과를 전공하는 길밖에 없었다. 초중시절 문학에 흥취를 갖고있었고 작문 경색에서 입상한적도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문학의 길을 가려고 다짐하였으며 고리끼와 푸쉬킨, 조기천 등 문학거인들의 작품을 남김없이 열독하였다. 드디어 1954년 초 처녀작 <<념원>> 이 연변문예에 발표되었다. 그 이듬해인 1955년 5월에는 작품 <<령을 넘으며>>가 역시 연변문예에 발표 되었는데 1956년 8월 연변작가협회 창립시 학생신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문예상과 함께80원의 상금까지 받아안았다. 그 80원의 상금으로 그는 여동생을 데리고 볼품없는 초가집에서 살고있는 어머니에게 50원을 보내여 새로이 집을 장만하게 하였다. 1955년 그는 연변대학 중문계로 입학하게 되는데 1956년 말부터 1958년 7월까지 북경대학 중문계로 연수를 떠난다. 이러한 좋은 기회가 따라준 것은 연변한어사범학교 시절인1955년의 사연이 계기가 되었다. 그해 5월, 교도주임은 우수한 학생들을 불러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할 자격에 부합되는 학생들을 선발하겠다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운동대회에서 문예대회, 졸업생대표발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는 마침내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북경대에 연수를 가게 된 첫걸음이었다.

연변대학 중문학부에서 그는 <<고추밭이야기>>, <<내 조국의 생일에>>, <<뜨거운 마음으로>> 등 작품을 발표하였고 북경대학 시절에는 <<선녀들도 부러웁게>> 등 다수의 글을 써냈다. 북경대학은 중국 최고의 학부인만큼 일류의 학습환경을 구비하였고 동방어문학부에는 도서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는 이 자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열람식에서 2년동안이나 폐문독서를 하며 문학지식을 늘였다. 고문과 열독에 몰두하였으며 <<공사인민들은 당을 생각하네>>라는 한문으로 된 7언시도 발표하였다.




훈춘에서의 20년 세월

시작이 좋아 한창 부풀어오르던 이 시절, 반우파투쟁이 일어나 기술실무만능주의(白专道路: 문학에만 열중하고 정치적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하였다.)로 “우파언론이 있고, 공청단원 1년간 보류, 사용제한”(有右派言论, 留团查看1年, 限制使用)이라는 처분을 받고 1959년 8월 훈춘시 제2고중에 분배받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14년동안 한어교원사업에 충성하였고 모범공청단원이 되면서 사회주의 교양운동으로 인해 공작대대장 리용눌으로부터 1965년 6월에 재해방 되면서 입당을 하였고 부교무주임으로 승진하였다. 문학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을 그때, 리상각과 김성휘, 김철 등 문학친구들의 권고로 다시 필을 든 그는 <<없어진 고개>>, <<운전수>>, <<옥수수다락>>, <<아버지의 사발>> 등 작품을 써냈다. 1973년, 그는 훈춘시 서기 김성화의 추천으로 훈춘시 외사반공실 주임으로 전근하게 되어어 6년간 그곳에 있었다. 그후 1978년 즈음 훈춘시 진교향당위서기로 1년간 종사하다가 1979년 3월 훈춘을 떠나 연변작가협회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편제가 없어 1년간 연변군중예술관 “해란강”잡지(문예지)의 편집을 맡게 되었고 1980년 3월부터는 연변인민출판사에 30년의 청춘을 바쳤다.




문학의 봄날

문학의 꽃망울을 틔우려다 사그러든 그는 다시 문학의 봄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지식분자들이 걸어온 역사를 돌이키며 해방받지 못한 울분을 토한150행에 이르는 <<중년의 노래>>를 발표하였고, 1984년 10월에는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쓴 연변문학상을 수상한 <<사랑의 애가>>(대표작가운데의 하나)를, 1980년대 말에는 100수에 달하는 인생3부작인 연작시 <<불타는 황혼>>(연변문학상 수상작품), 사랑주제 <<사랑별곡>>, 겨례의 역사 <<깊은 뿌리>>를 써냈다. 이 시기에 쓴 가요 <<연변사람>>은 2007년도 장백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1993년 해외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는 1993년에는 러시아, 1996년, 1997년, 2000년 3차례에 거쳐 약 2년간 미국에 머물었다. 그 시기 그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며 손군들을 키우는 등 일들을 하였으며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픔으로 <<그리움삼만리>>라는 기행시집을 써냈다. 그리고 자본가의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맑스의 <자본론>중 잉여가치의 이론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곳의 선진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여 문학의 전통에서부터 현대에로의 탈바꿈을 시도한 그를 평론가 우상렬은 “인류를 내다보는 시인”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2006년 3월, 그는 연변시인협회를 창립하여 현지창작과 도서출간, 시상식 등과 같은 활동들을 활발히 펼치고있다. 그는 장백산의 웅위함은 수많은 여러 봉우리들에 있다고 말한다. 시인협회의 창립 역시 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좋은 시를 뽑아 웅기중기 솟아서 이채를 돋구어 새로운 각자의 향기를 풍기게 하기 위함에 있다고 한다.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 류수처럼 구름처럼 무정한 세월은 흘러흘러 그의 생에도 어언 황혼의 석양무렵이 다가왔다. 이팔청춘에 아침노을을 곱게 짜보려고 직기에 올라탔다가 때아닌 서리를 맞고 광풍에 휘말려 가슴깊이 상흔을 남긴적도 있었다만 문학에로의 사랑, 시에로의 사랑은 올곧이 인이 박혀 그한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좋은 시절을 맞이하여 봄바람을 타고 꽃노을을 짜는 직기에 다시 오른지도 30년의 세월, 그리고 지금도 짜고있는 저녁노을쪼각이 앞으로 우리의 겨례가 나아가는 앞길에 한송이 꽃댕이나 한오리 옷고름으로 날릴수만 있다면 그는 흔쾌히 웃을 것이다. “시쟁이”인 그는 인생의 황혼이 바득바득 다가오는 석양무렵에도 그냥 분초를 다투어 연소하고 있다.




김응준시인 략력

u 1934년 10월 14일(음력)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태평구 출생

u 1959년 연변대학교 중문학부 졸업후 훈춘시 제2고중, 훈춘시외사판공실 근무

u 1979년이래 문학편집, 연변인민출판사 편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시인협회 회장, 시총서 <시향만리> 주필 력임

u 1954년 처녀작 발표, 시집 ≪별찌≫, ≪남자와 녀자와 사랑과 시≫, ≪김응준시선집≫ 등 17부 출간, 편저 ≪세계명언≫(공저), ≪문학묘사사전≫(공저), ≪문학명작소개≫(공저) 등 출판

u 수필 “솜저고리에 깃든 이야기” (1962), “진달래꽃”(2005) 등 60여편 발표

u 시초 “사랑의 애가”, 련작시 “불타는 황혼”, 련작시 “연변사람”, 가요 “사랑아 어찌 늙으랴”, “두만강천리” 등 60여편 수상


김응준시인 출판시집

1. ≪별찌≫(1988년)

2. 장시집≪사랑의 향토≫(1994)

3. ≪남자와 녀자와 사랑과 시≫(1999년)

4. ≪그리움 삼만리≫(2002년)

5. ≪사랑새를 기다린다≫(2004년)

6. ≪남으로 나는 기러기떼≫(2005년)

7. ≪최후의 밀회≫(2005)

8. ≪깊은 뿌리≫(2006년)

9. ≪불타는 황혼≫(2006년)

10. ≪사랑별곡≫(2006년)

11. ≪어머니 장백산≫(2006년)

12. ≪사랑은 날개≫(2006년)

13. ≪장미꽃 함께 있으면≫(2006년)

14. ≪마감 웃는 꽃≫(2006년)

15. ≪하얀 손수건≫(2006년)

16. ≪연변사람≫(2009년)

17. ≪김응준시선집≫(2009년)

18. ≪외로운 마을≫(2009년)

19. ≪사랑으로 가는 길≫(2014년)

김응준의 소년시절

김응준의 청년시절



2000년, 샌프로시스코, 유람선위에서의 김응준


해란강닷콤 류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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