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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2] 6군 재봉대 대장 배성춘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5.28일 13:44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1)

■ 리 함

항일련군의 력사를 펼치면 허다한 녀성항일영웅들이 소속 군과 사, 퇀들에서 재봉대원으로 활동하였음을 헤아릴수가 있다. 북만땅에서 활동한 녀성항일영웅 배성춘도 그러하다. 배성춘은 1930년대 초반의 중공탕원중심현위 위원이고 탕원유격대 창시자의 한사람이고 그후 항일련군 제6군의 재봉대 대장으로서 6군부대와 동북항일무장투쟁에 크나큰 기여를 한 녀성항일영웅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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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춘(裴成春, 1902ㅡ1938)은 원명이 배경창(裴敬昌)이고 별명은 손명숙으로 불리였다. 배성춘이 1902년에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리(清道郡云文里)에서 태여날 때 리씨조선은 일본제국주의 침탈로하여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1910년에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하자 그 이듬해 1911년에 배성춘의 부모들은 어린 성춘이와 일가식솔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 오늘의 단동으로 이사하였다. 그후 다시 이주한 고장이 북만 탕원현의 태평천(太平川)이다.

태평천에서 배씨일가는 대지주 경자수(耿子修)의 소작살이를 하여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도박에 물든데서 생활은 갈수록 말이 아니였다. 생활이 너무도 어려운데서 배성춘은 어린나이에 지주집 부엌데기로 살다가 15살되던 해에 부모가 강제로 혼인을 결정한데서 자기보다 열몇살이나 더많은 남자의 밑며느리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1927년에 배씨네는 라북현 오동하툰(梧桐河屯)으로 옮겨 앉았다. 오동하촌은 후에 복흥툰으로 불리였다. 그 시절 복흥툰과 그 일대는 1928년 봄에 황포군관학교 출신 김지강(金治刚,최용건을 가리킴)이 탕원과 라북, 요하, 보청 등 현들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사람들을 혁명의 길로 이끈데서 어딜보나 혁명의 기운이 넘치고있었다. 부모의 강제혼인에 진저리가 난 배성춘은 부녀회에 가입하면서 혁명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안해라고 불리우는 배성춘이 혁명활동에 나서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배성춘이 결연히 가정을 박차고 나가자 남편이라는 사람은 몇번이나 찾아와서 돌아가자고 구슬렸다. 그래도 혁명에로 강단한 배성춘의 마음을 돌릴수가 없었다. 후에는 배성춘이 세 남동생들인 배석철(裴锡哲),배석구(裴锡久), 배경천(裴敬天)을 모두 데리고 군정강습소에 참가하였다.

때는 1932년 초의 일로서 그 무렵 최석천 등이 지도하는 중공요하중심현위는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보청현 소성자(小城子)에 30여명 학원들이 참가한 군정강습소를 꾸리였었다. 배성춘과 그의 동생들은 이들 30여명에 속한 학원들로서 그들 모두가 호림, 요하, 보청, 무원 등 현의 당조직에서 추천한 우수한 남녀청년들이였다. 그때에야 배성춘의 남편은 배성춘의 마음을 돌릴수 없음을 알고 리혼하는 수밖에 없었다.

1932년 봄에 배성춘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5월에 당조직에서는 배성춘을 탕원현에 보내여 당원발전사업을 틀어쥐도록 하였다. 그해 겨울 중공탕원중심현위에서는 제4차확대회의를 가지였다. 손명숙이라는 이름으로 현위확대회의에 참가한 배성춘은 중공탕원중심현위 위원으로 선출되였다.

배성춘은 탕원중심현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위에서 조직한 화장선전대로 한족들이 사는 마을을 다니며 한족들에게 항일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런 그를 두고 뒤에서 《저 처녀는 겁도 모르는가봐. 덜렁거리며 한족집으로 싸다니는걸 보니.》하면서 뒤손가락질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아무일도 없는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은 환한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배성춘이를 한낮 처녀로만 알고있었다.

1933年 초이후 배성춘은 현위위원 겸 탕원현 무풍랑구(无风浪区) 부녀구국회 회장을 맡아나섰다. 1933년 8월 15일 지방 당조직들이 적들에 의해 엄중한 파괴를 당하자 배성춘은 리재덕, 배옥순, 허정숙 등 젊은 녀성들과 함께 탕원유격대에 참가하였다. 배성춘과 남동생들인 배석철, 배석구, 배경천 셋도 탕원현유격대의 첫패의 대원으로 되였다. 탕원유격대에서 재봉대와 후방병원을 꾸리자 배성춘은 재봉대와 후방병원의 책임자와 당지부서기를 맡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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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5월, 탕원유격대는 현내의 한 대지주의 무장을 탈취하면서 재봉침 한대와 천들을 몰수하였다. 재봉침과 천을 본 배성춘은 생각는 바가 있어서 유격대 녀전사들과 함께 재봉대를 꾸리겠다는 보고를 올리였다. 탕원유격대 재봉대는 이같이 량자하 금광부근의 한 밀영에 세워졌다.

재봉대는 세워졌지만 누구도 재봉침을 다룰줄 몰라서 걱정이였다. 배성춘은 생각을 굴리다가 한 마을에서 재봉기술을 좀 안다는 장씨라는 사람을 모셔왔다. 그리곤 천막안에 통나무로 재봉대를 만들어놓고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재봉기술을 익히였다. 인젠 유격대 군복을 척척 지어낼수 있었다.

하지만 탕원유격대 재봉대밀영은 적들의 《토벌》과 습격으로 늘 전이하여야만 하였다. 이해 봄에 량자하 금광부근의 밀영지가 탄로되여 재봉대를 탕왕하골(汤旺河沟)에 전이시키였다. 얼마후에는 또 금산툰으로 옮겼다. 금산툰도 파괴를 면치못하여 재봉대는 이곳저곳 옮겨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는 사이에 재봉대 녀전사로는 배성춘과 리재덕, 박영선 셋밖에 남지 않았다. 김백문 등 10여명의 녀성들이 새로 보충되였다.

1935년에 탕원유격대는 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고 1936년 봄에는 동북항일련군 제6군으로 개편되였다. 배성춘은 6군의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지방당조직에서 몇명의 녀성을 보내주었다. 그가운데는 열세살밖에 안된 리민도 있었다. 그해 여름의 어느날 배성춘과 그의 동지들은 산밖에서 활동하다가 적들의 산으로 토벌을 들어오던 적들과 맞띄웠다. 배성춘은 동지들을 데리고 익숙한 지형을 리용하여 심산밀림에서 적들과 숨박꼭질을 벌리였다. 적들은 우리 사람들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만 대오를 돌려 하산하고 말았다.

6군부대의 군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6군은 모아산에 재봉대를 꾸리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배성춘은 1937년 겨울에 재봉대 동지들을 이끌고 눈보라를 헤치며 로백산으로부터 모아산(帽儿山)으로 갔다. 모아산은 탕원현 이서(汤原县以西), 의란(依兰)과 이춘(伊春) 변계에 위치하였다.

배성춘과 그의 동지들은 톱과 도끼로 통나무를 재껴서는 밀영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사람같이 이악스레 살손을 댄데서 한달반이란 시간내에 커다란 귀틀집을 몇채 지어낼수 있었다. 나무껍질을 벗겨서는 지붕을 얹고 나무토막을 쪼개서는 침대를 만들었다. 모아산 밀영에서 배성춘은 계속 재봉대 대장 겸 당지부서기로 활약하면서 10여명 녀전사들을 이끌어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가며 군복짓기에 온힘을 다하였다.

1937년 7월에 중공북만림시성위 확대회의가 6군의 모아산재봉대ㅡ피복공장에서 열리였다. 조상지(赵尚志), 풍중운(冯仲云), 장란생(张兰生), 리조린(李兆麟 )등 동지들과 군대와 지방의 지도일군들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길동성위 대표 주보중(周保中)도 초청을 받고 회의에 참가하였다. 3군의 선전과장 우보합(于保合)이 회의기록을 담당하였다. 회의기간에 배성춘과 재봉대의 전체 동지들이 회의의 순리로운 진행을 위해 후근복무를 도맡으며 최선을 다하였다.

3
회의기간에 누군가 《우리 항일련군 대오에 영준한 젊은이들이 많은데 여기에 또 이렇게 멋진 처녀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도와서 이들이 연분을 맺게 하는것이 어떠합니까?!》하고 우스개를 하여 회의장은 대번에 끓어 번지였다. 재봉대의 조선족녀전사 리재덕(李在德) 등 나이 조금 이상인 녀전사들은 부끄러워 문밖으로 달아나갔다. 이때라고 조상지(1908년생,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는 회의기록을 맡은 우보합(1914년생)에게 질문을 던지였다.

《자네 눈이 높은데 어느 처녀를 넘겨다 보고 있소?》

《제가 보건대는 리재덕(1918년생)동지가 듬직한데 그쪽에서 의향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보합의 상상밖의 즉석 통쾌한 대답이다.

《응. 자네 잘 보았네. 내가 리재덕이를 잘 알지. 좋은 처녀이구말구. 그런데 6군 재봉대의 주력이여서 배누나가 놓아줄지 모르겠소. 또, 재덕이와 약혼하였던 배경천이 지난해 금방 희생되여서 누나 배성춘이 어떻게 생각는지 모르겠구만.》

조상지와 우보합이 주고받는 말에 끼여든 3군 정치부주임 풍중운(1908년생)의 말이다. 풍중운은 리재덕이를 어떻게 알게 되였을까? 이를 알자면 시침을 몇년전인 1932년으로 돌리여야 한다.

이해 1932년 10월, 25살에 난 강소 출신 풍중운이 중공만주성위 순시원(특파원)의 신분으로 탕원현위 소재지 학립강으로 왔다. 어느날 그는 현위 위원인 김성강의 집에 묵었다가 30여명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다. 김성강이면 15살을 잡은 리재덕의 어머니고 할머니의 명함은 안순희였다. 할머니가 미처 피하지 못한 풍중운보고 벙어리로 나서라고 할때 어머니 김성강은 풍중운의 안경을 제꺽 벗겨서는 자기 품속에 감추고 시골사람으로 나서게 하였다.

그럴 때 토비들이 들이닥치였다. 할머니는 조선서 금방 온 둘째아들이라고, 어머니는 둘째 시동생이고 벙어리라고 시미치를 뗐다. 토비놈들이 풍중운이를 총살한다며 끌고가려할 때 할머니와 어머니는 벙어리 둘째요, 시동생이요 하면서 울며불며 한바탕 《연극》을 놀았다. 친혈육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신통한 《연극》앞에서 흉악한 토비들은 속고 말았다. 그때부터 풍중운은 죽음을 앞둔 생사의 마당에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리재덕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어머님》과 《누님》으로 불렀으니 그후 이 고장을 지날 때면 어머니와 누님을 꼭꼭 찾아보는 풍중운이였다. 풍중운은 또 리재덕의 약혼자가 배성춘의 셋째 남동생 배경천 (6군 4사 2퇀 정치부주임)이고, 지난해 1936년에 희생된 사실도 알고있었다.

조상지는 풍중운이를 통해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있었다. 서로의 이야기가 리재덕과 배성춘에게로 모아지자 조상지는 풍중운보고 우리가 신랑측의 중매로, 배누나가 신부측의 중매로 나서서 리재덕의 사상공작을 하자고 나섰다. 소뿔을 단김에 뽑으려는 태세였다. 그러나 배성춘이 리재덕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니 리재덕의 태도는 자못 견결하였다.



당년의 발자취를 찾은 항일로간부 리민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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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시집가지 않고 언니만을 따르겠어요.》

《지금 부대에 남자들이 많지. 매일 싸우며 산을 넘나들구. 녀자들은 홀몸으로 불편할 때가 많은데 결혼하면 돌보는 사람이 있지 않나. 재덕이도 올해 20살이지. 나만을 평생 따르겠다구? 당치 않을 소리. 지금 조사령과 풍중운이 친히 중매를 서구, 우보합도 훌륭한 남자구 문화도 있구 너무 좋아그래.》

배성춘의 말에 이어 사람들은 리재덕과 우보합 둘이 만나 보도록 하였다. 우보합은 리재덕보다 네살 우였다. 서로 이야기하던중 서로의 신세에 미칠 때 리재덕이 자기 가족의 신세ㅡ독립군 아버지 리상희(李相熙)가 20년대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서 희생되고, 탕원의 영웅어머니 김성강(金成刚, 원명 金顺喜)이 1933년 음력 8월 20일, 《탕원의 12렬사》들과 함께 일제토벌대에 살해된 눈물나는 이야기ㅡ를 말하자 우보합은 무거운 심정으로 성근하게 터놓았다.

《내 이후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테요. 우리 서로 고무하며 다같이 진보하기오!》

리재덕의 얼었던 마음은 금시 풀리였다. 회의 결속을 앞두고 두쌍의 같지 않는 민족의 혼례식을 가지였다. 한쌍은 우보합(만족)과 리재덕(조선족), 다른 한쌍은 오옥광(吴玉光, 조선족)과 리계란(李桂兰, 만족)이였다. 주보중은 리재덕과 우보합의 결합을 두고 맑스와 옌니(燕妮)의 진지한 사랑에 비유하였다. 조상지사령은 그들 두쌍을 보면서 앞으로 혁명의 길에서 서로 관심하고 사랑하고 손잡고 항일하면서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때까지 해로하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모두에게 누나, 언니라고 불리우는 배성춘의도 6군 재봉대의 리재덕, 리계란이 사랑하는 사람과 맞서니 자기 일처럼 뜨거이 축복해 주었다.

먼먼 후날 로인이 된 리재덕의 맘속이야기.

ㅡ당년 우리 혼례에 참석한 대부분 수장들과 전우들은 선후로 항전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보귀한 생명을 바치였다. 지금도 포연이 짙은 전쟁의 나날 심산밀림속에서의 결혼을 생각하면 전우들의 축하소리, 웃음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 싶다. 심심한 그리움이 가슴속에 구비친다.

1937년 8월 우보합이 리재덕이를 3군으로 데려갈 때 리재덕은 친자매처럼 어울리던 6군재봉대의 리민, 리계란 등 전우들과 헤어진다는것이 얼마나 쉽지 않는가를 깊이깊이 느끼였다. 더우기 자기보다 16살이나 이상이고 친어머니처럼 마음을 주며 사랑을 주며 받들어주던 배성춘언니와 떨어지자니 차마 걸음을 떼여 놓을수가 없다. 배언니는 그래도 언니라고 석별의 정을 강잉히 누르며 웃음으로 바래여주지 않는가!



5
1937년 11월에 일제놈들은 동기대토벌에 광분하였다. 전투는 치렬하고 잔혹한데서 부상병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6군에서는 재봉대를 후방병원으로 개편하였다. 이어 부대의 경전군(耿殿军)퇀장과 6군 군의의 호송하에서 서정에 참가하였던 20여명 상병원들이 모아산 후방병원에 들어섰다. 재봉대의 동지들은 배성춘의 지도하에서 이번에는 긴장하고도 번중한 상병원 간호사업에 나섰다. 약품이 따르지 못한데서 그들 녀전사들은 한 겨울의 강추위속에서도 산과 령을 넘나들면서 오미자(五味子)와 구기자(枸杞子) 사철나무(冬青), 까마귀밥(老鸹眼树) 들을 채집하여서는 상병원들의 소염 과 몸춰서기에 보태였다.

1938년 3월 6군부대의 주력이 보청, 부금, 의란, 수빈, 라북 등지에서 활동하고있을 때였다. 재봉대 련락원 조홍생(赵洪生)이 적에게 체포되여 변절하는데서 모아산에 있던 6군재봉대가 탄로되였다. 재봉대는 이 일을 알수가 없었다. 3월 15일 새벽, 배성춘은 여느때처럼 부상병들에게 옥수수죽을 공급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성춘언니, 말울음소리가 들려요!》

바깥보초선의 적정보고였다. 잇달아 총소리가 울렸다. 배성춘의 전투포치에 따라 몇동무는 먼저 부상병들을 엄호하여 사괴석(四块石)으로 후퇴하고 다른 동무들은 반격을 하면서 천천히 물러섰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배성춘이 마지막으로 밀영을 돌아보는데 한번 돌아보는데 어린 녀전사 리민이 그때까지도 부상병들에게 가져갈 죽을 퍼담고있었다.

《적이 왔다. 어서 뛰자!》

배성춘은 날렵하게 리민의 팔을 잡고 산속으로 내달았다. 밀영을 포위하고 다가서던 일본군은 두 녀성이 달아나는것을 보고 고함지르며 뒤를 물었다. 배성춘과 리민은 수림속으로 이리저리 빠질 때 몇발작 떨어져 달리던 리민이 껑충한 왜놈에게 거의 잡히게 되였다. 순간 총소리와 함께 왜놈이 푹 꺼꾸러졌다. 앞에서 뛰던 배성춘이 어느결에 권총으로 그자를 쏘아넘기였던것이다. 그날 배성춘의 침착하고 기민한 지휘로 하여 재봉대는 한사람의 손실도 입지 않았다.

4월에 또 적정보고를 받았다. 배성춘은 먼저 상병원들을 분산시켜 음페시키고는 한 전사를 데리고 《범을 산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으로 유인전술을 썼다. 그들은 일부러 동쪽으로 발자국을 찍어놓으면서 적들을 동쪽비탈로 끌어들인뒤 감쪽같이 남산으로 달려가서 총질하였다. 적들은 다시 남산으로 움직이였다. 결국 적들은 이저리 허둥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맥이진해서 산을 내려갔다. 동지들이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은 배성춘과 전사를 두고 속을 태울 때 배성춘네가 무사히 동지들한테로 돌아왔다.

5월에 6군군부에서는 배성춘과 원 재봉대의 동지들을 군교도대에 편성시키였다. 배성춘은 교도대 2개중대의 정치공작ㅡ당지부서기로 사업하면서 군부와 함께 행동하게 되였다. 그해 6월에는 리민(李敏), 서자영(徐紫英), 조옥규(曹玉奎), 하봉림(夏凤林) 등 30여명과 함께 오동하반(梧桐河畔)의 로등산(老等山)으로 가서 부대의 서정을 조직하여 나섰다. 그사이 배성춘은 녀전사들을 조직하여 서정부대를 위해 탄알띠와 모자 각반 등을 깁는 작업을 벌리였다.



항일로간부 리민(좌1)과 리재덕(좌2) 배성춘의 외손녀 일가와 함께.

배성춘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큰 남동생 배석철이 희생되면서 남긴 두살짜리 딸애 배복남(裴福南)이고

사진속 외손녀는 배석철의 외손녀와 그 일가로 헤아려진다.(리민회고록 상, 중문, 340페지에서)

6
8월에 배성춘은 또 6군 1사의 후군처를 책임지고 일하였다. 배성춘은 6군 교도대의 류수인원들을 이끌고 과회산(锅盔山)으로 가서 6군 1사 정치부주임이고 조선사람인 서광해(徐光海)의 소부대와 만났다.

그해 11월 23일, 배성춘은 서광해와 함께 동지들을 이끌어 적들의 포위를 헤치며 완달산맥(完达山脉)의 보청현 장가요(张家窑)로 갔다. 장가요의 6군 1사의 재봉대밀영이 반역자 진전화(陈传和)가 지휘하는 위만군 35퇀의 포위속에 들었다. 적들은 우리보다 10배나 더 많았다.

적들은 배성춘보고 투항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배성춘은 적들을 조소하면서 신변의 리민 등과 이렇게 말하였다.

《빨리 떠나시오. 내가 뒤에서 동지들을 엄호할테요!》

그리곤 적들에게 멸적의 총탄을 퍼부었다. 찰나 리민 등이 아직 적들의 포위를 헤치지 못하였는데 배성춘은 다시 적탄에 맞았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배성춘은 온몸의 힘을 모아 《구국만세!》를 웨치였다. 항일대업에 나선 한 조선인 공산당원의 심장의 메아리였다.

항일련군 전사들의 회고자료들에 따르면 배성춘은 중등 키(리재덕의 남편이고 항일련군 제3군의 선전과장이였던 우보합은 배성춘의 키가 1.72메터라고 한다)이고 둥근 얼굴에 어글어글한 큰눈, 실히실히한 편에 높은 목소리를 가진 녀성이였다. 중국어는 그닥지 않았으나 일할라치면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힘이 세여 나무를 메고 량식을 운반하는 등 막히는 일이 없었다. 일솜씨도 재고 깐진 편이였다. 기민하고 용감하고 과단한데다가 동지들을 대함이 언제나 시원시원하고 열성적이여서 항일련군의 전사들은 너나없이 배누나, 배언니라고 친절히 불렀다.

배성춘의 세 남동생들도 누나의 이끌림에 혁명의 장도에 오르면서 모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항일의 싸움터에서 희생되였다. 큰 남동생 배석철은 탕원유격대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서 1933년 1월에 탕원유격대 당지부위원으로, 그해 4월에 탕원유격대를 재건할 때 탕원유격대 정치지도원으로 활동, 1933년 6월에 반역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안해와 두살짜리 딸애를 남기였다.

둘째 남동생 배석구는 1932년에 당조직의 파견으로 학강탄광(鹤岗煤矿)에 들어가 로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하며 탄광경찰의 무기를 빼앗아 유격대를 건립하며 싸우다가 탄광의 가스폭발(瓦斯爆炸)로 불행히 희생되였다. 셋째 남동생 배경천은 당년 최석천(최용건)이 꾸린 《송동모범학교》(松动模范学校)의 제1기 졸업생으로서 역시 탕원유격대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1934년 10월 탕원반일유격총대 제3중대 중대장, 1936년 1월 6군 4사 2퇀 정치부주임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5월 11일, 의란원정길에서 희생되였다.

배성춘에게는 또 막내 남동생 배경석이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병을 얻었으나 치료할 돈이 없어 너무 일찌기 이 세상을 떠나갔다. 배성춘의 어머니는 끌끌했던 세 아들을 모두 항일전에서 잃고 너무도 상심한 나머지 운명하고 말았다......

(2015년 3월 21일 정리)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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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 바람 2번 겪어” 이진호 전여친과 헤어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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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겸 방송인 이진호(나남뉴스) 코미디언겸 방송인 이진호(38)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일화를 털어놨다. 이진호는 지난 4월 30일(화)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 ‘신발 벗고 돌싱포맨’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특히 이진호는 이날 방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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