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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백년부락》 두만강반에 일떠서기까지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0.09.30일 13:49
먹고 살기 어려운 때를 지나 여유가 있게 되면서 자연 자기 주위도 살펴보게 되고 민족에 대해서도 두루 생각해보게 되였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그 어떤 곤난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목숨바쳐 이 땅을 지키고 건설하였고 또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키면서 대를 이어 기강을 펼치며 이 나라 이 땅의 주인으로 떳떳이 살아가고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런 민족앞에 내가 해야 할 일 또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가? 10여년간의 해외로무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4년간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며 사회조사를 하는 동안 세집살이에 전기밥솥 하나, 침대 하나 달랑 놓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나를 두고 형제들도 모두 《빈털터리》가 되여 돌아왔다고 혀를 찼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동생이 고향마을에 사놓은 100년이상 되는 전통가옥을 수건하면서부터 저의 민속창업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셈입니다. 지금까지 이 《백년부락》을 건설하는데 200여만원이 투입되였습니다


―귀향로무자 김경남씨의 고백

백년가옥앞에서의 김경남씨.


전국민족사무위원회 전임 주임 리덕수는 이 민속촌 백년가옥의《까래구들》에 올라서더니 이토록 훌륭한 전통가옥을 오랜만에 본다며 신명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그는 민속촌의 개업을 앞두고 친히《중국조선족백년부락》(百年部落)이라는 제자를 써주면서 김경남씨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100년 전통가옥을 수건하니 제비들이 둥지를 틀다


도문시 월청진 백룡촌의 김경남씨(58세)는 10여년간의 해외로무생활을 마치고 5년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외에서 벌어온 돈을 단단히 챙겨넣고 어디에 어떻게 가치있게 쓸것인가 여러 궁리를 하는와중에 셋째동생 김경택이 고향마을에다 사놓은 옛 기와집에 눈길이 쏠렸다.


지은지 50년이나 40년되는 집들도 거의 무너져 없는데 이 집은 지은지 100여년이 되지만 좀 기울어졌을뿐이였다. 홍송원목을 재료로 쓸가싶어 3000원에 사둔 집인데 비워둔지 오래되여 집안팎에 잡초가 무성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이 근처로 얼씬하기 무섭다며 빨리 허물어버리라고 성화들이였다.


아무리 지켜봐도 못 하나 친 곳 없이 100여년이 넘도록 기둥이며 대들보가 맞물려 성한채로 그 오랜 세월동안 버텨온것이 신기할 지경이였다. 지붕의 기와들도 별로 깨진것 없이 여전한것이 허물어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왔고 다시 수건한다면 두고볼만한 가치가 있을상싶었다.


생각을 마친 즉시로 그는 집수리에 달라붙었다. 조심스레 기와부터 줄따라 내려놓고 쟈끼로 집을 뜨고 활차를 리용하여 집을 바로세워놓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난데 없이 제비들이 쌍을 지어 날아들었다. 어느새 정주칸 천정에 제비둥지 3개가 생겼고 안방에도 하나 더 생겼다. 《풍수지리는 짐승들이 더 잘 안다고 하지 않는가.》풍수 좋은 집이라는 예감에 그는 마음이 흐뭇해났다.


천정에 기와를 다시 얹으며 살펴보니 기와장들이 어찌나 단단한지 지붕에서 내리뜨려도 깨지지 않았다. 혹 몇장 끊어진것들이 있어 개굴이나 곡간 지붕을 덮었던 기와 몇장을 올려다 보충하며 원자리 그대로 얹어보니 딱 맞아떨어졌다. 벽도 흙벽으로 바르고 한지로 문풍지를 하여 전통가옥의 옛 모습대로 복원해놓으니 여름철에도 집안은 선선하였다.


《토벽은 워낙 밖의 온도가 아무리 뜨겁거나 차거워도 열전달이 되지 않기에 여름이면 선선하고 겨울이면 따뜻합니다. 저 문에 바른 한지 역시 바깥 온도와 습도를 종이자체가 처리합니다.》그는 신나게 소개를 하였다.


집앞에는 또 샘이 깊은 드레박우물까지 있었다.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우물부터 파고 말뚝을 박았다더니 그 우물이 지금까지 수원이 말라들지 않고 수심이 2메터이상으로 깊었다. 우물을 가셔내고 새롭게 시설을 설치, 전기로 샘물을 뽑아 주위에 늪을 만들고 우물가주위에 수양버들까지 심어놓으니 한결 운치가 돋보였다.


백년가옥을 수건하면서 그는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가슴뜨겁게 느꼈다. 그는 근처에 사는 원 주인의 조카벌 되는 사람을 통해 그 집 내막을 상세히 알아본즉 워낙 1893년 조선이주민 박여근(朴如根)이라는 상인이 목수 한사람에게 맡겨 이 집을 3년만에 완공하였는데 원목홍송은 장백산에서 떼목으로 실어내렸고 기와는 조선에서 줄배로 실어들였다고 한다. 그 집뒤에는 또 10년후에 원 주인의 딸이 시집가게 되자 나머지 재목으로 지어준 딸집이 역시 90여년의 세월을 기록하며 원모습대로 서있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있는 집을 혼자만 두고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왔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와보고 조상들의 지혜를 느껴알게 하기 위해 이 집을 중심으로 토벽집 13채를 짓고 돌 500차를 실어들여 돌담을 쌓으면서 민속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김경남씨는 지난해 5월부터 줄곧 이 민속촌건설에 있는 자금과 정력을 모조리 몰부어오고있었던것이다.

백년가옥력사비를 새기는 작업에서 현장지도를 하고있는 김경남씨(왼쪽 두번째)


동북3성 일주 한국에까지 나가 조선족민속문물을 거둬오다


동생과 함께 집을 짓고 돌담을 쌓고 민속기물들을 얻어들여 순수한 조선족전통농가마을을 꾸미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래전 《4대골안》에 갔다가 남몰래 묻어둔 석마돌이 생각났다. 《4대골안》은 워낙 20세기 30년대초 《북간도 해란강참안》당시 일본토벌대에 의해 처참히 유린당한 화현리 14개 조선족촌중의《학교촌》으로 불리던 곳이다. 일본토벌대에 의해 마을은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총칼에 찔리고 불붙는 집안에 갇혀 잔혹하게 학살되였다.


살아남은 촌민들은 나중에 그 피비린 고장을 떠나 이 백룡촌에 자리잡으면서 당년의 력사견증물의 하나인 학교앞에 서있던 수양버드나무를 파다 새 삶의 터전인 백룡촌학교앞에 심어놓기까지 하였다. 당시 육중한 석마돌은 그대로《4대골안》산중턱에 남아있었는데 20년전에 이 석마돌을 발견한 김경남씨는 《언젠가는 이 석마돌의 의미를 찾아볼 때가 올것》이라는 생각에 남들 모르게 흙으로 깊이 묻어놓았다.


동생 경택이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그 석마돌을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찾을수가 없었다. 경남씨의 안내하여 끝내 그 석마돌을 찾아냈으나 육중한 석마돌은 끄떡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안깐 힘을 써서야 겨우 나무발구에 싣고는 3메터, 5메터씩 좀씩 움직여가며 드디여 옮겨오고야 말았다.


경남씨는 수소문끝에 원 주인집에서 당년 청산맞을 때 마을의 한 가난한 집에서 오지독을 분여받은것을 지금까지 보존하고있다는것을 알아내였다. 그가 찾아가보니 윤택이 흐르고 무늬양식까지 이쁘게 띄운 고품격의 한쌍의 오지독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상들의 지혜와 기술과 재능을 전시하는 좋은 일에 쓰겠다고 도움을 청하니 주인은 애지중지 윤택나게 닦아온 기물을 두말없이 내놓았다.

이웃마을에 월청진의 첫 토기장인이 아들에게 남겨준 지그릇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갔다. 력사를 따져보니 역시 100년도 넘는 토기였는데 가볍고 단단하며 보기에 자연스럽고 미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월청진의 첫 토기장인의 재간과 기술이 슴배인 이 지독을 몇백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 후대들이 두고두고 오래도록 볼수 있도록 장인의 명함을 기록하여《민속촌에 영원히 모셔두겠다》고 의도와 의지를 말씀드렸다.


그러니 그 역시 기쁜 마음으로 조상의 유물인 지독을 그에게 맡기면서 로인님들이 쓰던 철다리미와 물독까지 함께 무상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오래된 문물이 돈이 되는줄을 알고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는 쓰지 않고 버리는 물건일지라도 그가 돈 주고 사겠다고 하니 엄청난 값을 부르는지라 엄두도 못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지난 일년동안 아예 동북3성을 답사하며 파가이주한 조선족마을을 찾아 김치굴에 버리고간 지그릇들을 파서 김치를 버리고 독을 가셔가면서 옛기물들을 거둬들였다.


1994년경 한국의 장사군들이 조선족마을을 돌면서 문물이 될만한것들은 죄다 값을 올려 거둬가는 바람에 별로 남은것들이 없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에서 조선족민속문물들을 경매에 붙인다는것을 알고 한국에 나가 궤짝이며 놋그릇들을 도로 사들이기도 하였다.


백년부락을 건설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문물수집에 나섰지만 워낙 30년전부터 문물에 관심을 갖고있은지라 지금껏 크고작은 옛민속기물들을 근 500점 소장하였다. 이 모든것들을 《연변의 가을》민속절 농가락(农家乐)행사차 9월 16일자로 대외에 개방하면서 전부 《백년부락》에 진렬해놓고 전시하고있다.

《참 알고도 모를 일입니다. 지그릇들도 어떻게 구웠는지 오래된것일수록 가볍고 단단하고 자연스럽고 예쁩니다. 현재의것도 화려하고 예쁘지만 그것이 마음에 와닿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가 얼마나 대단한가 탄복이 갑니다. 후대들이 이런 문물들을 보면서 사색할수 있게 하고 계발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싶습니다.》그는 사뭇 진지하게 소감을 피력하였다.


이 재부는 저혼자의 몫이 아닙니다 촌민들과 함께 운영하고 함께 혜택을 나누겠습니다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해외에서 벌어온 돈만으로도 얼마든지 충족하게 잘살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백년부락》에 모든 재력과 정력을 쏟아붓는데는 그로서의 리유가 따로 있었다.


그는 백년전통가옥을 중심으로 조선족민속부락을 세움으로써 민속문화관광차원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숨결을 느끼게 하고싶었다. 또한 우리 후대들이 전통농가생활을 체험하면서 민속에 대한 료해와 보다 많은 풍속, 례의범절을 배워 알게 함으로써 민족적정기를 살리려는데서였다.


그는 백룡촌의 5개 촌민소조에서 각기 《백년부락》의 집 한채씩 맡고 순대, 두부, 떡과 같은 민속음식들을 만들어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앞으로 일체 음식들은 무공해, 록색유기농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쓰고 생태자원을 복구함으로써 관객들은 여기서 순수한 민속음식을 맛볼수 있을뿐만 아니라 그 제조과정과 기술을 직접 관람할수 있고 또 체험도 할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땅가마도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떡도, 주먹밥도 쥐여주면서 풋풋한 인정이 살아숨쉬는, 사람사는 동네의 진풍경을 연출할 계획이다.물론 여기에서 생기는 수익은 각 촌민소조의 몫으로 돌려지게 된다.


《지금 백룡촌과 월청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관심하고 촌민들 또한 성심으로 지원하고있는한 이 민속문화관광사업은 꼭 잘되리라 믿어마지 않습니다. 민속문화관광업이 흥성하여 각 촌민소조의 수입이 높아지고 촌민들마다 실제혜택을 보게 된다면 마을을 떠났던 촌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는데 일조되지 않을가 생각됩니다.》


그는 지금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외국으로 나가다보니 본마을 학교는 언녕 없어지고 월청진학교로 다니는 아이들이 백룡촌과 이웃 2개 촌을 합해도 9명뿐이라며 깊이 탄식한다. 민속촌건설로 눈코뜰새없이 보내면서도 그는 자가용으로 3개 마을 아이들의 등교를 도맡아오고있다. 그러는 《아저씨가 좋아요》 애들이 응석을 부리고 재롱을 피우면 차안은 온통 웃음꽃으로 피여난다. 그 시각 또한 경남씨에게는 한낱 이름할수 없는 행복이란다.


《지금 대개는 아이들 학교때문에 시내로 들어가는 집들이 많고 또 돈벌이를 떠나는 집들이 있으나 결국은 환경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나 우선 환경을 개변해야만 귀향에 도움이 되는겁니다. 발달한 나라에서는 잘사는 부자일수록 농촌으로 가는데 우린 못살면서 도시로 들어가니 이것은 방향이 틀린것입니다. 이런 국면을 타개하려면 누군가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나부터라도 한번 나서보자고 생각한겁니다.》그의 견해였다.


좋은 풍속 한가지라도 더 개발하고 석자깊이 땅을 파서라도 좋은 문물 발굴할겁니다


그는 이 민속촌을 건설하면서 도문에 잡았던 주거지를 아예 이 민속부락에 옮겨와 살고있었다.《아버지, 어머니곁에 와 살아야지요…》말끝을 흐리며 저도 몰래 한숨을 짓던 그의 두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하게 맺혔다. 그는 더는 주체할수가 없어 손에 쥐고있던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굽을 찍어냈다.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길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해외로무생활을 하다보니 부모님의 림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로 구척사나이가 울고있었던것이다.늘 말이 없던 아버지, 《4대골안》에서 백룡촌으로 내려올 때 자두나무를 뿌리채 옮겨다 싹을 키워 집집마다 나눠주시던 아버지, 봄이면 온 마을은 자두꽃으로 단장하고 가을이면 집집마다 자두열매를 따갖고 시장에 갖다팔아 생활보탬을 하던 그날이 생생하기만 하다. 어머니 또한 남을 돕는 일을 천성으로 행해오시면서 자식들의 본보기로, 마을의 《어머니》로 옳곧게 살다가신분 아니던가. 그런 부모님을 그리면서 그는 자두열매가 무르익는 가을철이 오면 온마을 자두보따리를 새벽같이 차에 실어 시장에 갖다드리군 한다.


《부모님들이 세상뜨면 상두를 메는 옛 풍속같은것도 개발해보고싶습니다. 지금은 자기를 낳아키워준 부모님이 세상을 떠도 풍속습관을 몰라 인사도 바로 하지 못하는 페단이 있는가 하면 되는대로 차에 실어 보내기도 하는데 참 안됐지요.》그는 자신이 살아오는동안 쭉 살펴봐도 로인을 존중하고 가정이 화목한 집안이 잘되더라며 우리 전통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8평방메터 더 될가싶은 통참돌을 실어다 《효도석》으로 가공하고있었다. 마을에서 로인을 공대하고 진심으로 부모들의 제사라도 잘 챙겨올리면서 고인을 기리는 효심깊은 자식들을 물색하여 이《효도석》을 사용하면서 얼마간 무상으로 먹고 자고하면서 생활할수 있도록 할것이란다. 그는 자신이 못다한 효도를 다른 사람이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라도 장려하고싶다고 토로한다.


그는 타향살이 10여년에 고향산천과 고향사람들을 잊어본적 없다. 백룡은 워낙 전설의 고장이였다. 먼 옛날 두만강건너 조선 함지산에 청룡과 백룡이 함께 살았는데 사춘기에 이르러 청룡이 백룡에게 청혼을 하자 부끄러워난 백룡이 두만강을 건너 이 마을앞 《도래굽이》에 와 쉬여갔다고 이 마을을 《백룡촌》이라 불렀다고 한다.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전설도 하나의 재부이고 자랑이였다. 그는 전설 깃든 이 고향땅을 더욱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아름답게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열과 사랑을 바쳐 민속창업의 새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디고있다.

두만강너머로 바라보이는 조선의 함지산.

이미 복구된 백년전통가옥.

집앞에 있는 드레박우물터.

100여년전 원 집주인집에서 쓰던 오지독 한쌍 (맨앞에 놓인 독과 맨뒤자리에 놓은 독.)

월청진의 첫 토기장인이 자식들에게 남겨준 토기그릇(왼쪽구석에 놓인 큰 지독.)

제비가 둥지를 튼 백년가옥 정주간.

한국에서 도로 사들인 조선족농궤.

《4대골안》에서 실어내린 석마돌.

야장칸.

농가일각.

농사용 달구지.

가공중에 있는 《효도석》.

《해란강참안》을 겪은 《학교촌》력사의 견증인 수양버들은 의연히 백룡촌학교자리에 서있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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