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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렬보도3]길림성축구팀 제1임 감독은 한족…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8.11일 07:16

-조선족축구원로 허명룡옹이 들려주는 길림성축구팀 창단사


올해는 연변축구팀의 전신이였던 길림성축구팀이 설립 60돐을 맞이하는 해이자 우승 50돐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축구팬들은 팀이 언제 어느 때 설립되였으며 초창기 감독은 누구였고 활약상은 어떠했는지 잘 모르고 있다. 이에 기자는 최근 길림성축구팀의 설립시 선수단 멤버였던 조선족축구원로 허명룡옹을 찾아 길림성축구팀의 초창기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허명룡옹에 따르면 길림성축구팀은 1955년 11월에 설립된걸로 기억된다고 한다.(《연변축구운동사》에 서술된 관변측 설립 일자는 8월 1일). 1955년 2월, 축구운동이 활발했던 연변지역은 자체로 축구팀을 묶어 길림성을 대표하여 전국대중도시축구선구권대회(도합 25개 팀)에 나섰는데 대련경기구 시합에서 2등을 따냈다. 그번 시합이 결속된후 길림성에서는 연변팀을 기초로 장춘에서 전업축구팀을 내왔다. 바로 길림성축구팀였다. 특히 그무렵 지역1급에서는 전업축구팀을 두지 못한다는 정책이 있었으므로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가 직속상급단위로 되였고 팀은 길림성 성소재지가 있는 장춘에 보금자리를 틀었다고 한다.

그해 년초 연변팀을 대표해 전국대중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연변팀선수들은 길림성축구팀이 설립되면서 직접 장춘에 남게 되였고 허명룡옹은 이해 12월에 합류했다고 한다. 허명룡옹이 뒤늦게 길림성축구팀에 합류하게 된데는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한몫 한다.



상해홍구체육장에서 길림성축구팀 력사상 첫 동기훈련(첫줄 왼쪽 세번째 허명룡선생).

1932년 8월 15일 석현진(당시 왕청현에 속했음) 수남촌에서 태여난 허명룡옹은 그때 왕청현라자구중학교에서 3학년 담임직을 맡고있었다고 한다. 1953년 연변대학 사지계(력사지리계) 전과반을 졸업하고 석현중학교를 거쳐 라자구중학교에서 력사와 지리를 배워주고 있었는데 2년 뒤인 1955년 12월의 어느날 연변주인사국에서 조동령이 내려왔다.

그때는 중학교 교원들의 인사서류를 현, 시가 아닌 연변주인사국에서 관리하던 때라 허명룡옹은 통지서를 받자바람 연변주인사국을 찾아갔다. 자기가 대체 어디로 조동돼 가는것인가고 물었더니 그들도 모른다면서 길림성인사국으로 찾아가라는것이였다. 길림성인사국으로 찾아가라는 말에 뭔가 짚히는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무렵 장춘시에 조선족중학교가 금방 설립되였는데 혹시 그곳에서 조선족교원이 부족해 그를 조동시키는가보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개인의 사정은 뒤로하고 무조건 조직의 배치에 복종하던 세월이라 허명롱옹은 군말없이 길림성인사국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헌데 정작 도착해서 인사국 해당책임자가 떼주는 소개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개신에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라는 글발이 쓰여있었던것이다. 그때에야 길림성축구팀이 장춘에서 설립됐다던 소문이 떠올랐고 그럼 이제부터 자기가 길림성축구팀 선수로 되는가? 하는 생각에 긴가민가해서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를 찾아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예감이 적중했다.


길림성체육운동회 해당 책임자는 그를 만나자바람 즉시 북경으로 향발해 그곳에서 동기훈련을 준비하고 있는 길림성팀에 합류하라는것이였다. 북경에서 길림성축구팀과 합류한 허명룡옹은 며칠뒤 팀과 함께 상해로 향발, 상해홍구체육장에서 길림성축구팀 력사상 첫 동기훈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허명룡옹에 따르면 길림성축구팀의 제1임 감독이였던 마소화(马绍华•제1대 중국국가팀 초대문기기)선생은 한족이였고 당시 팀의 주력문지기였던 동량일(董良一)도 한족이였다고 한다. 이들 이외 나머지 팀원은 모두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동기훈련이거나 시합때면 자기 이불짐을 꾸려가지고 다녔으며 모든 훈련과 시합이 끝나야만 잠시동안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휴식할수 있었다고 한다.



허명룡선생과 지청룡선생이 구 쏘련에서 기념사진을.

길림성축구팀은 초창기때부터 조선민족 특유의 용맹하고 완강한 박투정신과 남보다 월등한 체력을 바탕으로 쾌속적인 반격을 조직해 소문났다고 한다.

《체육사(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 11)에 따르면 1955년 11월 22일 심양에서 있은 구쏘련 레닌그라드의 제니트팀과의 경기가 길림성축구팀이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있은 외국팀과의 시합이였는데 그번 시합에서 길림성축구팀은 0대1로 패했다. 이해 제니트팀은 중국에서 북경, 심양 등 팀과 도합 11껨의 경기를 소화, 10승 1무라는 전적을 기록하고있었다. 특히 심양팀을 0대9로 제압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반면 길림성축구팀은 0대1로 패해 그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더욱 좌중을 놀래운 사실은 1957년 동기훈련을 마친후 북경을 경과하던 도중에 일어났다. 당시 구쏘련 우즈베크공화국의 강팀이였던 메논팀이 국제시합차로 중국을 방문해 북경선농단체육장에서 국가1팀과 시합을 치렀는데 국가1팀이 형편없이(?) 패했다. 그때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을 맡고있던 하룡원수는 경기가 끝나자바람 3일후 메논팀과 계획돼있던 국가2팀의 시합을 철수하고 길림성축구팀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준비하고 있던 길림성축구팀은 이튿날 시합에 뛰여들었는데 경기를 0대0이란 무승부로 끝내며 국가의 자존심을 크게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길림성축구팀은 당시만 해도 지역축구팀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출국방문시합명액(그전까지 국가팀과 8.1팀, 상해팀밖에 없었음)을 국가로부터 배당받는 영광을 가졌다고 한다.

1958년 년초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특별히 길림성축구팀에 구쏘련 중앙아세아 방문시합을 배치, 그번 방문시합에서 팀은 도합 6껨의 시합을 치렀는데 4승2무의 성적을 따내 중국축구계를 들썽했다. 그 전해 상해팀도 역시 같은 곳에 가서 방문시합을 치렀는데 전패해 귀국했다는 후문이다. 그에 비하면 길림성축구팀의 성적은 경악 그 자체에 비할수 있었다.

특히 당시 상해팀의 진성달(陈成达)과 함께 전국 각 갑급팀중 두명의 대학생 출신 선수로 활약했던 허명룡옹은 팀의 절대주력으로 매 게임마다 출전하며 맹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길림성축구팀 다른 한 창단멤버였던 리광수선생이 《큰땅크》로 불렸다면 허명룡옹은 《작은 땅크》로 불리며 각광을 받았다. 길림성축구팀이 1956년 갑급련맹경기에서 4등, 1957년 갑급련맹경기에서 7등, 1958년 갑급련맹경기에서 4등이란 우수한 성적을 따낸데는 등번호 6번을 달고 하프로 그라운드를 주름잡았던 그의 노력도 깃들어있었다.



구 쏘련을 방문한 길림성축구팀(첫줄 왼쪽 첫번째 허명룡선생).

1959년 길림성축구팀은 재차 국가의 배려로 구쏘련을 방문, 하바롭스크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뜻밖에도 그번 시합에서 허명룡옹은 발목에 큰 부상을 입게 되였다. 개인려권이 아닌 단체려권으로 출국방문을 하던 때라 귀국수속이 복잡해 단독 귀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손옆장을 짚고 팀과 함께 모든 경기를 마친 뒤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귀국해 며칠 지나지 않아 연변체육운동위원회의 해당책임자가 찾아왔다.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이 어려운 허명룡옹을 연변체육운동위원회 사업일군으로 양성하겠다는 계획이였다. 당시에 흔치 않는 대학생출신이다 보니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에 인재를 빼앗길수 있다는 판단으로 먼저 선손을 쓴것이였다. 결국 그번 《인재싸움》에 연변체육운동위원회가 《이겨》 이듬해 고향 연변으로 돌아온 허명룡옹은 연변과외체육운동학교 교무주임에 임직하며 새로운 인생을 걷게 되었다. 헌데 그것도 잠시, 3개월 뒤 허명룡옹은 재차 길림성축구팀에 합류하게 되였다.

1961년 길림성축구팀의 절대대부분 선수가 연변에 고향을 두고있고 또 연변축구가 길림성축구팀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는 판단에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연변에 길림성축구팀을 위탁 관리시키기로 했던것이다. 따라서 길림성축구팀이 연변에 근거지를 옮기게 되면서 허명룡옹은 코치로 새로 팀에 합류하게 된것이다. 그때로부터 장장 3년간 허명룡옹은 전국이 3년 자연재해로 가장 어려운 《대식품시기》를 경과하면서 리광수, 박만복 등 감독들을 도와 길림성축구팀이 저조기를 넘기는데 기여했다.

유감스러운것은 길림성축구팀이 1964년 전국을급련맹전에서 준우승을 따내 갑급팀에 복귀한뒤 이듬해인 1965년 전국갑급련맹전에서 우승을 따낼 당시 그가 조직의 배치로(돈화시로 학습하러 내려갔음) 팀을 떠난 탓에 그해 우승의 영광을 현장에서 함께 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면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설립 60돐, 우승 50돐을 맞이하는 뜻깊은 올해, 연변장백산팀이 그제날의 그 영광을 꼭 다시 연출할것만 같아 자못 가슴이 설레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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