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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38.오매에도 갈망하던 첫 출근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2.24일 10:09
이튿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고마운 기자분을 따라 그 회사에 갔다.


육체로동을 할수 없는 몸이라 비서처에 배치되였다. 인사과의 나이 지긋한 과장님은 오는 사람마다 여차여차 수준이 높다고 자칭하는데 정작 일을 시켜보면 거의 허망이더라며 제대로 시키는 일이나 할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하겠단다.


나는 온갖 정력과 재능을 다 바쳐 본때 있게 일을 잘하리라 다지고 또 다지였다. 난생 처음 근사한 일자리를 얻어 첫 출근을 하는지라 마음은 날아갈것만 같았다. 꿈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것이였다.


비서처 사무실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책상옆에 있는 빈 걸상에 앉아 기다렸다. 반나절이 지나도 한사람도 얼씬하지 않았다. 출근했으면 일을 해야 되겠는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인사과에서는 내가 할 일은 번역이라고 하였지만 무엇을 번역해야 하는지 그런 일거리는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통 알수가 없었다.


다른 과실에 가 물어보려고 해도 면목도 모르는데 말을 건넬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람을 데려다 놓았으면 무슨 일이든 시키겠지 하고 멍하니 앉아 기다리는데 저녁 퇴근시간이 되여도 잠잠하다. 첫 출근날,나는 이렇게 멋적게 하루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다가 공밥 먹는 신세가 되지 않을가 근심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명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꾸지람 들을걸 각오하고 여차여차 좋더라고 소곤소곤 말씀드렸다. 나의 기쁜 마음을 어머니한테 한시 급히 전하고싶었던것이다.


다음날 제시간에 맞추어 출근하니 사무실에서 이쁜 색시가 청소를 하고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자기는 《쇼쨩》이라고 부르는데 타자원이라고 소개하는것이였다. 타자원이라는 말에 나는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온 하루 멍하니 앉아만 있지 말고 타자하는것을 배우면 좋지 않겠는가? 내가 도움을 청하니 쇼쨩은 쾌히 응낙하는것이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총공사의 부경리라는 사람이 찾아와 나더러 광고문을 책임지고 쓰라며 《광고학》이라는 책을 주는것이였다. 할일이 있으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몰랐다. 언어학이 전공인 나는 《광고학》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나는 새로운 학과를 공부할라니 타자훈련을 할라니 또 제때에 시장정보를 얻기 위하여 여러가지 신문을 뒤질라니 점점 바빠지는것이였다.


어느덧 한달이 지나 월급을 타는 날이 되였다. 나는 갓 입사하였기때문에 회사에서 제일 낮은 월금을 받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제대로 된 월급인지라 가슴이 설레이기만 하였다. 그리 두툼하지도 않은 돈봉투는 무겁게만 느껴졌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헤고 또 헤여보았다. 웬지 번마다 수자가 달라지며 도저히 맞게 헤여지질 않았다. 이 봉투를 아버지한테 드려 점수를 딸 생각을 하니 웃음주머니가 절로 흔들거렸다.

(아버지는 몇십년동안 어쩌고 저쩌고 나를 혼내주었지만 이제 이 돈봉투만 쥐여드리면 모든것이 눈녹듯 녹아버릴것이다. 세상에 돈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라고.)


나는 퇴근길에 먼저 시장에 들렸다. 얇은 돈잎으로 온 집식구들의 선물을 사려니 모자랄것 같아 차라리 한상 차려 식구들을 대접하는것이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리바리 사가지고 집에 이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퇴근하여 와있었다. 오늘 저녁 내가 한상 잘 차린다고 낮에 내가 미리 알렸기때문이다. 기쁨은 나누어야 배로 되는 법이니까.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 셋이서 지지고 볶고 법석을 떠는데 아버지께서 정주간에 나오시더니 찬장에서 묵은 반찬을 한접시 내려놓고는 약주를 드시는것이였다.


이러는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느껴진 어머니는 반찬가 금방 다되니 좀만 기다리라고 말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듣는척도 하지 않는다. 나는 또 연출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참 꼭 이렇게 처사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자식을 키우느라면 욕할 때도 있고 더러 눈 감아주는 법도 있겠건만. 아버지의 사전에는 용서라는 두 글자는 전혀 없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용서를 바랄만큼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싶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풀줄 모르는 아버지한테서 생전에 나의 이 소원이 이루어 질려나 모르겠다.)


이렇게 나는 기쁜 날에 기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우리들끼리 대충 먹고 일어나버렸다.


저녁을 먹고 나머지 돈을 어머니한테 주니 아버지한테 드리라고 손질한다. 나는 두려워 두근거리는 가슴을 눈잦히며 돈봉투를 간신히 아버지의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내가 정주간에 기여나오기도전에 아버지는 《필요없다!》하면서 돈봉투를 도로 내던지는것이였다. 나는 무한한 모욕감을 느꼈다. 온몸에 찬 기운이 돌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오는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니깐 아버지는 나와의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것을 선포하는것이다. 나는 이 집에서 오래 머무룰수 없다는것을 직감하였다. 그렇다고 당장 집을 나올수는 없었다.


나는 버틸만할 때까지 버텨보리라 마음먹었다. 정 안되면 방법을 대보더라도 서뿔리 집을 나올수 없는 신세였다. 시집도 가지 않고 멀쩡한 부모를 떠나 운신도 바로 못하는 주제에 집을 따로 잡으면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할가. 그리고 출근하느라고 바쁜데다 세집까지 맡고 나가면 무엇이든 나혼자 해야 되겠으니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주방 하수도가 메여버렸다. 설걷이를 하던 나는 어머니더러 구정물을 변소에 버려달라고 하였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노발대발한다. 무슨 일이든 자기절로 하는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한테 심부름을 시킨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자기절로 할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변소는 주방칸을 나가 복도에 있는데 너무 높아서 성한 사람도 드나들기 힘들다. 그런데 나보고 그리로 구정물을 버리라고 하니 어디 될 말인가?


나는 집을 나올 때가 되였다고 느껴졌다.

아침에 출근해서 청가를 맞고 거리로 나온 나는 연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모님을 모셔올 예산이였다. 이모님이 곁에 있어줘야 짐을 가지고 집을 나올수 있지 나혼자라면 절대로 짐같은건 챙기지도 못할것이다.


저녁에 이모님과 같이 집에 들어선 나는 밥을 먹을념도 하지 않고 덮던 이부자리와 입던 옷들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차를 불러 싣고는 곧추 친구의 집으로 향하였다.

옛날부터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잘 아시는 이모는 별로 말리지도 않는다. 이모님의 앞인지라 아버지는 내가 하는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다 보지도 않는것이였다.


모든것이 순조로왔다. 세집도 찾아놓지 못한 나는 이튿날부터 국경절 련휴인지라 집을 찾기에 나섰다. 이틀동안 헤매던끝에 친구의 도움으로 약 7, 8평방메터 되는 집을 세맡을수 있었다.


집조건은 말이 아니였지만 문만 열면 친구네 원 집에 닿을수 있어 처녀의 몸으로 혼자 있기에는 그래도 안전할것 같았다. 불을 지핀 다음 한번 싹 닦아내고 내짐을 챙겨놓으니 집같은 느낌이 들었다. 썰렁하기는 하지만 나에게만 속하는 공간이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련휴가 끝나 출근을 한 첫날 어머니는 나에게 필요되는 가정기물들을 챙겨왔다. 전기밥가마며 전기솥 그리고 칼도마, 사발까지 구전히 갖춰왔다.


나의 독신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아침이면 일찍 얼어나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펴놓는다. 물이 더워나면 쌀을 씻어 앉히고 채소를 씻어서 반찬을 볶는다. 나는 늘 두때 먹을것을 해놓는다. 때마다 새로 해먹기 힘들기때문이다. 아침식사를 다한후 가마를 깨끗이 닦아내고는 점심거리를 넣어둔다. 점심때가 되면 따뜻하지는 않지만 너무 차지도 않다.


그때 사무실에 일이 너무 많았던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에 늦게 돌아올 때가 많았다. 저녁 9, 10시경에 돌아오면 불을 지피기가 제일 싫었다. 그래서 주인집 아버님이 내가 퇴근하기전에 종종 불을 지펴주군 하였다. 혼자 있을 떄 누군가가 도와준다는것보다 더 고마울데가 어디에 있겠는가?


주인집에서는 음식도 자주 내다주군 하였다. 하지만 홀로 있으니 밥맛도 없어진다. 그래서 때를 거르기가 일쑤였다. 어머니가 닭알을 두근 사왔지만 어느때까지도 먹지 못하고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건강관리를 못한다고 집으로 들어가잔다. 하지만 나는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해도 마음이 편하니 그걸로 대단히 만족을 느꼈다. 다시는 아버지의 독살스런 눈길아래에서 살고싶지 않았다. 30년동안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찔해난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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