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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41. 내인생의 첫 보금자리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02.25일 13:40

인력거를 만들어놓고 세식구 함께 앉아 찍은 기념사진.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결혼식하는데 돈을 얼마나 가져올수 있는가고.


아무리 생활이 곤난하다고 해도 일전도 없이 어떻게 가정을 일구겠는가? 총각은 씨물씨물 웃을뿐 대답을 못한다.


총각을 떠나보내고 결혼날자를 기다리고있는데 하루는 추월이가 두주먹을 쥐고 헐레벌떡 달려와서 문에 들어서기 바쁘게 묻는것이였다.


《야,너 애기를 낳을수 있냐?》


나는 일시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 멍해있었다. 《글쎄,시범하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추월이는 그제야 너무 어처구니 없는 물음을 물었다는것을 느끼고 배를 끌어안고 웃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추월이는 총각쪽에서 마음에 든다고 태도표시는 하였지만 그래도 이쪽에 무슨 요구라든가 바라는것이 있을것 같아 그쪽 소개인에게 물어보았던 모양이다.그랬더니 별다른 요구는 없는데 남자아이든 녀자아이든 하나 낳을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란다.


나는 그런 물음을 묻는 사람도 그렇고 그 말을 전하려 달려온 추월이도 너무 한심해보였다.아무리 어떻다 해도 어떻게 처녀한테 그렇게 물어볼수가 있을가?


한달이 지나 그이는 날자를 딱 맞추어 간단한 옷가지들 챙겨가지고 찾아왔다. 그해 2월 4일이 받아놓은 결혼날자였다.우리는 세번밖에 만나지 못하고 선을 본지 3개월도 되기전에 결혼을 하였다.


나는 일생에서 제일로 중요한 경사를 치르기 위하여 회사에 나가 웬만해서는 주지 않는 휴가를 어렵사리 이틀이나 맡아가지고 돌아왔다.


결혼식은 아버지와의 관계로 몰래하는것이니깐 량가 친척들 한사람도 청하지 않았다.그저 식당에 가 한상 차리고 추월이네 내외 ,주인집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나의 어머니와 언니,동생들을 청해 한때 먹는것으로 끝냈다.


푹죽소리도 없고 일가친척들과 많은 친구들의 축복도 없어 서글프기는 하였지만 나와 남편은 자기들에게 속하는 가정을 일구어 새생활을 할수 있다는것 만으로도 만족을 느끼고 꼭 열심히 남부럽지 않게 잘살리라 다지고 또 다지였다.

나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한 신혼생활이지만 그래도 즐겁게만 느껴졌다.처음에는 남편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같이 있으며 보니 너무 따뜻하고 잘 생각해주고 무슨 일이든 잘 해주어 정말 도움이 많았다.


아침이면 남편이 먼저 일어나 불을 때고 밥을 짓는다. 밥을 먹은 뒤 남편이 설걷이를 한 다음 함께 출근한다. 저녁에 함께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남편이 저녁을 지어서 차린다.


비서처에 일이 밀려 야근해야 되는 날에는 남편이 모든것을 해놓고 사무실에 와 기다리다가 끝나면 같이 돌아가군 한다. 무슨 일이나 나절로 하는데 습관이 되였던 나는 처음에는 남편의 세심한 공대에 습관이 되지 않아 늘 부자연스러웠다.심지어 내가 공동변소에 가도 계속 따라다니니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인차 적응되여 또 무슨 일이나 남편이 해주기를 기다리는것으로 변해버렸다.사람의 의뢰심이란 이렇게 무서운줄 몰랐다.이대로 나가다가는 기생충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되기까지 하였다.

신체장애로 아이를 못가질가봐 근심하였는데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하게 되였다. 그러니 남편은 더욱 지극정성이다.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할뿐더러 출근해서도 산하기업에 취재하러 갈 때면 꼭꼭 동행해주었다.그의 살뜰한 보살핌이 나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였는지 모른다.남편이 이렇게 다함없이 지지해준덕분에 나는 임신한 몸으로 신문을 한기도 지체없이 훌륭하게 꾸려나아갈수 있게 되였다.


일을 잘할수 있어 즐거운것도 있겠지만 그당시 나를 제일 기쁘게 한것은 아이를 가졌다는 기적같은 사실이다. 사실 나는 결혼하면 아이를 낳을 신심은 없었다.왜냐하면 나와 학교를 같이 다니던 소아마비환자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일찍 결혼하였는데 거개가 결혼한지 5, 6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였기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부부들은 7, 8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숱한 약을 먹다가 그래도 안되니 남의 아이를 입양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는것을 내눈으로 직접 보았다.그래서 없지않아 근심을 했는데 이렇게 속도전일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녀자로 태여나서 아이도 못 낳는다는것은 정말 상상도 하기어려운 고민일것이다.나는 그래도 운이 좋게 적시적으로 아이를 가져 진정한 녀인으로 살수 있게 된것이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른다.아마 내가 30년동안 고생하면서 착하게 살아왔기에 하나님이 나한테 보내준 천사일것이다.나는 무슨 일이 있든 꼭 이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우리라고 결심하였다.


나는 내가 장애인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걸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유감스럽기도 하여 이 아이만은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건강하려면 배속에 있을 때부터 영양을 골고루 잘 섭취하여야 한다.그러려면 잘 먹어야 되겠는데 나는 웬지 먹고싶은것이 없다. 다른 임신부들은 자꾸 먹고 싶고 또 먹고싶은것이 생각나면 밤중에라도 구입해서 꼭 먹고야 직성이 풀린다는데 나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구해서 먹고싶은것이 전혀 없엇다.그래서 나는 낮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앉아 시장에서 파는 먹거리들을 한번씩 머리속에 떠올려보군 하였다.그래서 먹어보지 않은것이 생각나면 퇴근해서 남편과 함께 곧바로 시장에 가서 사먹군 하였다.


만삭이 되여가는 배를 그러안고 남편과 함께 시장돌이를 하는것은 너무 즐거웠다.주머니사정이 좋지 못하다보니 어떤 물건은 사기 힘들었지만 제법 흥정까지 해가며 될수록이면 가지가지를 다 먹으려고 애를 썼다. 어떤 때에는 정말 돈이 없어서 일인분만 사가지고 나혼자 먹을 때가 있었다.그래도 남편은 의견이 없다.남편은 되려 자기한테 신경을 쓰지 말란다.


나와 남편은 나이들어서 얻는 자식인지라 아이를 위해서라면 먹기 좋아하는것을 먹을뿐만 아니라 싫은 음식도 서슴치 않았고 아이한테 나쁜것이라면 절대 금지하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임신 6개월이되여 병원에 검사하러 가니 의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때는 서른살을 먹고 임신하는것도 드물었지만 웃몸이 너무 비대한데다 쌍지팽이까지 짚었으니 놀랄만도 하였다. 의사선생님은 그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이라며 얼른 걸상을 가져다 나를 조심스레 앉힌다.그러지 않아도 출근했다가 사무실 복도에서 넘어진적이 있었다. 젊은이 셋이서 나를 일궈세우다못해 안되여 나절로 벌벌 기여 사무실에 들어간적도 있었다. 온몸이 군데군데 멍이 들었지만 아이는 끄떡 없었다.아이도 나를 닮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것 같았다.아무튼 무사하니 무지 감사하기만 하였다.

한편 나는 어머니로 된다는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것을 알았다. 아이가 8개월이 되니 나는 크나큰 배를 그러안고 장애인차에 오르기도 힘들었다.


그때까지 매일 가슴을 조이고있던 어머니는 더는 출근하지 말라고 야단이다. 출근하지 않으면 수입이 없어지는데 그러면 원래 바쁜 생활이 더욱 쪼들려가지 않겠는가? 생활보조는 어머니가 하겠으니 아이한테 별탈이 생기지 않도록 빨리 휴가를 맡으란다. 내가 그때 그 몸으로 출근한다는것은 너무 무리였다.


나도 출근해도 그전처럼 회사 산하기업을 누비면서 취재활동도 할수 없게 되자 차라리 휴식하는것이 좋겠다싶어 산휴가를 앞당겨 맡았다.그로부터 나는 매일 가벼운 운동이나 하고 태동을 느끼면서 출생날자만을 고대하여 기다렸다.드디여 임신 열달이 되자 나는 예산날자를 이틀 앞두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자연분만은 불가능한 일. 그길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으란다.하지만 나한테는 입원을 할 돈도 없었다. 어머니는 이때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였다는듯이 나한테 돈을 가져다주는것이였다.나는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부모의 돈으로 대학교공부까지 마쳤으면 결혼해서부터는 어머니의 그늘밑에서 떠나야겠건만 아직도 어머니의 등을 쳐대니 너무 한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아이를 가지지 말고 생활이 어지간이 온정되고 돈도 얼마간 모여놓은 뒤에 아이를 보자고 하였는데 어머니는 반대해나섰다. 아이들이란 태여날 때부터 제먹을 걸 갖고 태여난다나. 우리들이 나이도 많은데 지체할것 없이 낳을수 있으면 빨리 낳는것이 옳은 처사란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의 말을 따른것이 백번 잘한것 같다.


어째든 어머니 말대로 해서는 랑패가 없었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나는 열두번째로 수술대에 올랐다.앞에 열한번은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때한것이다.그후 근 20년동안 병원출입을 하지 않다보니 이번 수술은 정말 겁이 났다.주사바늘을 찌르는것마저 아찔해났다.


간호원이 태줄을 끊고 아이를 나한테 안아보이는데 어찌나 우렁차게 울어대는지 수술실이 쩌렁쩌렁하였다. 나는 입을 벌리고 우는 딸애를 보면서 내 신세에 이렇게 건강한 아이를 낳은것이 너무도 장하게 느껴졌다.제일로 기뻐하는 사람은 그래도 어머니였다.

이날은 바로 성탄절 전날이였다.온 겨울 눈이 내리지 않더니 그날 따라 가벼운 눈이 보기 좋게 날리는것이였다.그래서 동생이 《설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딸애의 출생은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을 이어가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가려다주었다.


한편 일전한푼 쥔것 없이 결혼한 우리들은 극심한 생활난에 봉착하였다.설상가상으로 내가 취직했던 그 회사도 부도가 나 경제원천이 없게 되자 정말로 곤난하게 되였다.어머니께서 집세도 대주고 쌀도 가져다 주니 그렇지 굶어죽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성격이 괴벽하다보니 어머니는 늘 아버지 몰래 돈을 모았다가는 비상시에 쓰군 하였다.어머니의 도움으로 한고비 또 한고비 넘기면서 그럭저럭 생활해나가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될수록이면 어머니께서 무엇을 가져다 주면 한사코 사양하군 하였다. 그때면 어머니는 가정이라도 일구어 아이까지 낳고사니 그나마 시름이 놓인다며 나같은 자식을 낳은 죄로 약간 힘을 보태고있을뿐이니 미안해 할것도 없단다. 정말 못 말리는 어머니이시다.

한편 나는 남편한테 달구쳤다.어느때까지 장모님의 신세로 살겠는가? 뭘 하든지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되지 않겠냐.


남편도 급하지 않은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식도 없고 재간도 없으니 뭘 해야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보다 못해 언니가 나의 남편을 자기가 일하는 공장 림시공으로 취직시켰다.밤대거리도 없고 일도 별로 바쁘지 않아 괜찮겠다고싶었는데 한달 로임이 고작 88원밖에 안된다.한달 집세 50원을 내고나면 기본생활도 유지하기 바쁘다. 남편은 할수 없이 그 일을 그만 두고 자영업을 하기로 하였다.


큰 밑천도 들지 않고 재간이 따로 없어도 될만한 일을 찾아낸것이 아이스크림장사였다.하지만 그 일도 쉽지 않았다. 잘 팔리는 날에는 그래도 10원벌이는 되지만 안 팔리는 날에는 다 녹아버려 전날 번 돈을 되려 밀어넣어야 하는판이다. 아이스크림 장사가 시원치 않으니 이번엔 양고기뀀을 만들어 팔았다.나는 돌도 되지 않는 딸을 데리고 낮에는 남편을 도와 양고기뀀을 뀄으나 저녁에는 시장에 나가 도울수수 없으니 그 장사도 안되였다.


이것도 저것도 안돼 고민하던끌에 나는 남편한테 인력거를 몰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생각밖으로 남편은 뗑하고 돌아서는것이였다.농촌에서 값없이 살다가 겨우 도시로 와 운명을 좀 고쳐보려고 하였는데 또 그런 하찮은 일을 해야 되겠는가? 마을사람들이 알면 자기를 비웃을것이란다.


나는 일에는 귀천이 없다고 남편을 달래기 시작하였다.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먼저 자립을 해야 한다.일이야 귀하든 천하든 돈을 벌어 가정을 유지해나간다면 부끄러울것 하나도 없다.도둑질도 아니고 자기 힘으로 땀을 흘려 돈을 버는데 천하긴 뭐가 천하단 말인가? 고이 앉아서 부모형제들이 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국가에 손을 내밀기보다는 엄청 떳떳하지 않겠는가? 허영심이 많은 사람들만이 일의 귀천을 따지이니 우리는 그런 말을 받아듣지 말고 꼭 자기 힘으로 착실하게 살아가자고 거듭 말하였다.


처음 남편은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하도 끈질기게 매일이다싶이 말하니 한달만에 끝내 버티지 못하고 겨우 응낙을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 즉시로 언니한테서 돈 800원을 꿔다가 한 공장의 기술공장장으로 일하는 매형한테 맡기면서 인력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공장장으로 일이 몹시 바쁜 매형이지만 짬짬의 시간을 리용하여 한달만에 그럴듯한 인력거를 만들어왔다.


나는 남편더러 인력거에 뼁끼칠을 곱게 하도록 하였다. 며칠 품을 들여 일체 수속까지 마치고 남편은 내키지 않은대로 인력거를 몰고 드디여 거리로 나갔다.


떠밀다싶이 남편을 내보낸 나의 마음은 결코 편안치 않았다.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켜 혹시 무슨 변이라도 당할가봐 가슴을 조이고있던 나는 점심식사하러 들어온 남편의 얼굴을 보고 얼마간 긴장을 풀수가 있었다.남편의 얼굴에 오랜간만에 웃음꽃이 할짝 피여있었던것이다.


반나절사이에 24원이라는 《목돈》을 벌어온 남편은 왜 일찌감치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단다. 그후 남편은 많이 벌 때도 있었고 적게 벌 때도 있었지만 하루평균 20원벌이는 할수 있어 우리들의 기본생활은 보장할수 있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거기다 아이도 별탈 없이 잘 커주니 가난하게 살면서도 나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수 있었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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