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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명 렬사 순난지를 찾아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11.24일 10:52
[력사인물탐방] □정호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도시 연길시의 옛 전임 서기가 잠든 묘소를 찾은 발걸음이 내내 무거운건 아직도 야산이나 개천 혹은 늪가에 무주고혼으로 매몰된 렬사해골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에 섬뜩하기때문이다.》 -필자, 지난 여름 《28명렬사순난지》기념비를 찾아서.

나는 연길북쪽 외곽을 행선지로 답사를 떠났다. 길영료양원과 연길구조관리소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일떠선 입구가 보였다. 오른쪽 강냉이밭 가운데 웬 렬사비가 우뚝 서 파노라마를 그려줄줄이야... 정길남삼촌이 렬사인지라 어디 가나 렬사비를 무심히 지나친적 없다.

이렇게 초행길에 만난 원 중공동만특위 선전부장이며 연길구위 서기 조기석이다. 조기석(曹基錫)은 일명 조영훈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1904년 3월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군 록야동 시골의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05년, 첫돌을 갓 잡은 조기석을 남겨두고 부모들은 한많은 세상을 등진채 눈을 감았다. 차차 크면서 삼촌이 부모맞잡이고 자기는 외롭다는걸 느꼈다. 삼촌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삼촌댁을 《어머니》라고 끔찍이 따랐다. 1912년 삼촌이 권솔일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도강하자 조기석도 간도에 들어섰다. 조기석은 맘씨 고운 삼촌덕분에 연길현립 제2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게 됐다. 그러다가 1921년 조기석이 졸업하던 해 삼촌은 일가식솔을 휘동해 룡정 룡광동으로 이사했다.

1923년에 조기석은 정치배경속의 룡정 동흥중학교에 진학했다. 어쩌면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진입한셈이기도 했다. 지속적 혁명사상으로 무장하게 된 조기석은 학교내 진보적인 조직인 《학생만회》에 참가해 반일애국의 뜻을 키웠다. 그는 늘 진보적 학생들과 어깨를 들이밀고 농촌에 내려가 야학도 꾸렸고 문예공연회, 강연회 등 다채로운 형식으로 인민들에게 반일애국사상을 선전했다.

그는 지식의 천박성을 절통하던 나머지 더불어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깊은 학문연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1925년, 그는 중퇴하고 일본 도꾜에 건너가 《로동조합평의회》에 참가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뛰여들었다. 허나 어디라 없이 금전화로 전락된 일본의 사회환경에 좀처럼 적을할수 없었다. 그러던차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전쟁을 발동했다는 희소식을 꿈속에서처럼 접했다. 1926년에 그는 일본을 떠나 광동에 이르렀다. 1927년초에 그는 조직의 배치에 의하여 구강에 주둔하고있는 국민혁명군 모부에서 총을 잡고 투쟁에 나섰다. 구강은 현재의 양자강연안이다. 구강에 주둔하고있는 국민혁명군 모부에서 조기석은 손에 총을 들고 용감하게 싸웠다.

장개석의 《4.12》반혁명정변이후 그는 병을 핑게로 부대를 단연히 탈출하고말았다. 사려끝에 끝내는 연변으로 돌아왔다. 때는 1928년이였다. 1929년 봄, 그는 국자가 북산촌에 이사한후 즉각 분발된 혁명의력으로 처자와 갈라져 본격적인 분공투신에 몰입할수 있었다. 그는 홀가분하고도 자유로운 몸으로 연길현 세린하공립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고 사생들에게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애국선전과 반일투쟁을 동시에 유기적으로 밀도 있게 벌려나갔다. 1930년 1월, 그는 학생들을 조직해 조선의 광주애국학생운동을 성원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조기석은 《〈5.1〉투쟁행동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주야를 이어 동분서주했다. 그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왕청현 하마탕에 가서 군중투쟁을 조직했다. 1930년 여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혁명투쟁중에서 시련을 거친 조선족 선진분자들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였는데 그 가운데는 조기석동지도 포함됐다.

1931년 8월, 중공동만특별지부는 중공연화중심협회로 확건됐고 10월에는 중공동만특별위원회가 설립됐다. 연길현위산하에 있던 연길구도 연길시를 중심으로 한 의란구, 팔도구로 세분했다. 조기석동지는 중공연길구위 서기로 임명됐다. 그는 상급조직의 지시에 따라 당의 기층로선을 건립하고 군중을 발동하여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부녀회, 소선대, 공청단 등 군중단체들을 내왔으며 여러가지 형식의 혁명투쟁을 활발하게 벌여나갔다. 소영자, 마반산, 북산, 남양촌, 와룡동, 산관툰, 동거우, 시거우 등 농촌들에 내려가 점을 잡고 기층당지부를 조직하고 광범한 군중들을 반일투쟁의 렬화속에 뛰여들게 했다. 한편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부녀회, 소년선봉대, 공청단 등 군중조직을 활발하게 발전시키도록 직접적인 지도사업을 진행하고 시시로 구체적인 정황을 검사하고 독촉했다. 그는 또한 연길감옥내의 투쟁도 힘껏 성원했다.

1931년 봄, 그는 마반산 오암동에서 연길구의 수백명 군중대회를 소집하고 일제의 침략만행을 성토하고 봉건적 착취제도를 폭로했다. 《붉은 5월투쟁》으로부터 활화산마냥 일어나는 혁명의 거세찬 불길에 질겁한 일제와 그 주구들은 미친듯한 <<대검거>>를 실행해 수많은 혁명자들을 체포하고 연길감옥에 구금했다. 조기석은 당시 공청단연길구위서기였던 유종걸(일명 유형효)동지와 함께 면밀한 사업방안을 비밀리에 작성하고 유종걸동지에게 위임해 직접 진척하도록 약정했다. 옥중에 있는 공산당원들은 김훈을 주요책임으로 한 중공감옥지부를 건립하고 탈옥을 계획했다. 이것을 알게 된 조기석동지는 유종걸동지와 배합하여 적극적으로 옥중동지들이 무난히 탈옥하도록 밖에서 활동해 결국 내외협공을 다그쳤다.

《9.18》사변후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항쟁에로 떨쳐나설것을 호소했다. 그는 당구위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강태익, 강상호, 박광춘, 원남희, 원동희 등 5명 동지들로 《소작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구체적인 투쟁방안을 세밀히 연구했다. 1931년 11월 5일, 연길, 해란 등지의 수백명 농민들을 령솔해 소영자의 대지주 송보송과 《3.7》제의 정당한 요구를 내놓고 담판을 가졌다. 이때 무리한 시거우 공안분주소놈들은 담판석에 뛰여들어 5명 대표들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결국 몇몇 농민대표들이 체포됐다. 조기석은 즉시 연길구산하의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부련회, 소년선봉대 등 2000여명의 혁명군중들을 동원해 시거우공안분주소를 겹겹이 포위하고 놈들의 야만적 행위를 질책하면서 대표를 내놓을것을 강경히 요구했다. 인민군중들의 무비의 위력앞에서 공안분주소 소장은 2명 대표를 내놓으면서 3명의 대표는 이미 연길공안국에 압송했다는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이에 격분한 수천명 군중들은 조기석동지의 지도하에 11월 6일 밤에 홰불을 추켜들고 공안분주소 소장을 붙잡아 앞세우고 곧추 연길 국자가에 설치한 위연길현부로 달려갔다. 시위대렬은 소영자로부터 국자가에 이르는 구불구불 긴 구간에 늘어섰는데 무려 5000여명에 달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앙양된 기세앞에서 현장이 체포한 3명의 대표를 고스란히 내놓을수밖에 없었다. 승리한 군중들은 대렬을 지어 다시 소영자로 되돌아와 대지주 송보승의 곡식낟가리를 헐고 《3.7》제보다 더 가져간 곡식을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한차례 성세호대한 추수투쟁은 예상한 소기의 목적에 도달해 승리의 희열을 달콤히 맛보았다.

이튿날은 11월 7일, 바로 로씨야 10월사회주의혁명승리 14돐이 되는 뜻깊은 명절이였다. 조기석동지는 추수투쟁승리의 동풍을 빌어 10월혁명기념활동을 조직할 계획으로 밤도와 수백장의 삐라를 찍고 포스터를 그리고 썼다. 11월 7일 새벽, 삐라와 포스터를 살포하러 나갔던 연길녀자사범학교와 직업중학교 단원들은 도중에서 적들에게 발각되였다. 이것을 계기로 놈들은 혈안이 된채 닥치는대로 생사람을 마구 붙잡았다. 조기석동지도 북대촌에서 적의 손에 걸려들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같이 체포된 사람들중 유종걸동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조기석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조기석동지는 그날 저녁에 탈옥문제를 두고 이 궁리 저 궁리 애를 태우며 전전불매했다...

이튿날부터 창부들이 입는 시뿌연 덧저고리우에 질끈 띠를 두른 조기석동지는 자칭 맹추와 자작 《머저리》로 둔갑하고말았다. 바보연기로 시선을 따돌리고 새로운 계획을 펴나갈 잡도리였다. 그는 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올무렵, 매개 류치장을 돌며 대소변을 받아내는 자질구레한 잡부배역을 핍진하게 연기했다. 반면인물이자 자진해 탄원한 악역으로서의 내속이 따로 있어 그토록 극성을 부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간수들을 만나면 반벙어리 흉내로 떠듬떠듬 뇌까렸다. 하루도 아니고 련 며칠동안 멍청이배역을 반복했다. 그러자 차츰 웅성거리며 수군거린다.

《거지같은 얼간이를 잡아온 우리가 더 어리보기야.》

《그래도 울 대신 매일 청소하고 똥 치니 여간 고맙지 않나? 일손을 덜고 쿠린내 덜 맡으니 살것 같다.》

간수들끼리 키들거리며 서로들 어깨를 쥐여박는다. 무척 잘코사니를 부르던 놈들은 끝내 20일만에 조기석을 감옥에서 쫓아내버렸다. 축출이다.

1932년 이른봄, 조기석동지는 연길구 산하의 400여명 농민형제들을 지휘하여 마반산 오암동에서 주구청산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리창순, 김병국 등 5명 친일주구의 죄악을 폭로하고 당장에서 즉각 청산하고 오암동굴안에 묻었다. 그때로부터 인민들은 오암동을 일제주구들을 잡아두었다고 하여 개골이라고 불렀다. 대회후 군중들은 주구와 반동지주의 식량을 빼앗아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봄철기황을 무난히 넘기도록 했다.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서 모진 타격을 받은 일본침략자들은 1932년부터 시작해 경찰과 위만군들을 동원해 동만에서 인민들에 대한 대량적인 《토벌》과 살육을 공공연하게 감행했다. 연길구에서도 춘황투쟁후 일제주구가속의 고발과 더불어 《검거풍》이 일어났다. 한창 회의를 하고있던 조기석 등 20여명의 동지들은 살벌한 놈들의 포위속에서 불행하게 붙잡혔다. 후에 알고보니 4월 1일, 주구가정의 변절자 밀고로 춘황투쟁이 있은후 그는 회의도중에 20여명 동지들과 함께 적에게 체포됐던것이다. 이 소식에 접한 남양동의 남녀로소 200여명 군중들은 북산촌에 달려와 북산촌 군중들과 함께 체포된 혁명동지들의 탈환투쟁을 본격적으로 줄기차게 벌였다. 군중들은 맨주먹으로 혁명동지를 실은 놈들의 자동차를 포위했다. 그러기를 무려 다섯시간 남짓하게 버텼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놈들은 밤이 되면 더 위험할것 같아 급기야 기관총을 꺼내들었다. 당장에서 리을룡 등 무고한 군중 13명이 참살을 면치 못했다...

1932년 음력 3월 7일, 연길에서 30여리 떨어진 연집강구로 연길일본령사분관경찰서놈들이 수갑을 찬 28명 사람들을 압송해가고있었다. 조기석이 맨 앞장에 섰고 그 뒤를 따라 수갑을 찬 동지들이 따라섰다. 그들은 연집강을 따라 북쪽골안으로 올라가고있었다. 혼솔들이 궁상맞게 너덜너덜 떨어지고 끄나불이 비죽비죽 내돋았는데 드러난 살결은 피멍이 져서 거무죽죽했다. 허나 얼굴마다에는 굴강하고 비장한 빛이 유난히 감돌았다. 맨 앞장에서 힘찬 걸음으로 걸어가던 조기석동지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수갑을 찬 두손을 높이 들고 경찰놈들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개자식들, 네놈들이 끝장날 날이 멀지 않았다. 너희들은 총창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소멸하고 군중을 학살하려고 날뛰느냐? 오늘 비록 우리 몇 사람을 처단할수는 있지만 우리 인민은 꼭 네놈들을 이 땅에 매장하고야말것이다...》

그의 추상같은 호령에 잠시 멍해있던 일본경찰서놈들은 악에 받쳐 총박죽으로 조기석동지의 입을 막아쳤다. 찰나, 조기석동지는 눈앞이 아찔해났고 눈앞에서 불꽃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아픔을 참으며 선지피와 함께 부러진 이발을 놈들의 상판에 콱-내뱉았다.

《퉤- 이 개놈들아!...》

급해난 놈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의 입을 마구 틀어막았다. 놈들은 조기석을 비롯한 28명 혁명자들을 황망히 한 초가집에 몰아넣었다. 죽음의 그 시각, 조기석동지는 초가문을 박지르고 태연히 서서 구호를 높이 웨쳤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

우렁찬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며 저 멀리 들판으로 산야로 퍼져나갔다. 질겁한 놈들은 승냥이마냥 덮쳐들어 총창으로 그들을 마구 찔러 사랑채안에 쓸어눕혔다. 야수같은 놈들은 혁명동지들에게 기관총사격을 하고도 성차지 않아 또 초가집에 불까지 질렀다. 휘발유를 친 사랑채에서는 대뜸 불기둥이 치솟았다. 삼단같은 불길속에서 조기석동지와 기타 혁명동지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튿날, 놈들이 사라지자 군중들은 재더미를 헤쳐가며 28명 혁명렬사의 유골을 모아 합장했다. 영생불멸의 혁명렬사들의 빛나는 영웅업적을 기념하여 인민들은 그곳을 《28명 혁명렬사 합장터》라고 불렀다.

중화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항일에 몸 바쳐 싸워온 우수한 공산당원이며 훌륭한 연길구위서기였던 조기석동지는 이렇게 일생을 혁명에 남김없이 다 바쳤다. 지금 연변혁명렬사릉원 렬사공묘에 조기석렬사묘가 제1패 다섯번째 줄에 남쪽을 향해 안장돼있다.

1985년 봄, 연변박물관 연구원 리송덕이 룡정시당안국 적위서류에서 이곳을 발견했다. 연길시 시지 판공실의 김찬수와 중공연길시위 당사판공실의 리현호주임에게 의탁해 근 2년간의 시간을 들여 이곳의 28명 순난자가 혁명동지였음을 고증했다. 렬사 조기석의 딸, 박경흡의 아들, 유중화의 딸, 리춘식의 손자, 최기순의 아들 등을 찾아 순난자 19명의 명단을 확인했고 아직 9명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1995년 최장산은 마반산 6대 강국철이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강호익이 희생된후 강국철의 부친 강천익이 희생된 곳에 가서 동생의 유체를 찾아내려고 하였으나 휘발유를 쳐서 약 30여명이 희생됐는데 누가 누군지를 도저히 알아낼수 없어 희생된 동지와 죽은 사람들의 유체를 한곳에 매장했다고 했다. 사망자중 몇명은 신분이 똑똑하지 못한지라 주구인지 혁명동지인지 사안을 확인 못한 사람 몇이 있었다.

2000년 가을, 도문시박물관 최장산은 또 도문시철도정무단에서 리직한, 28명 렬사중의 한 사람인 박경흡의 아들 박룡갑을 찾아갔다. 그도 1951년도 항미원조전쟁터로 나갈 때 어머니께서 손을 꼭 잡아주며 그의 아버지가 희생된 과정을 생생하게 재삼 들려줬다고 했다.

일부 사료들에서는 당시 총살당하고 화형에 처한 혁명전우들이 30여명이라고 기재됐으나 1996년 3월 7일, 연길시위와 연길시인민정부에서 공동으로 건립한 《28명렬사순난지》라는 기념비의 비문을 기준했음을 부언으로 남긴다. 렬사비의 높이는 3.2메터, 비석의 밑부분에는 28떨기의 진달래를 새겨 1932년 순난당한 렬사들을 상징하고 비석 개두부분은 추수춘황투쟁의 홰불을 상징한다. 조기석동지를 비롯한 렬사들의 기념비 주위는 벽돌집이 즐비하게 들어선 새농촌 전원풍경이 둔을 쳤다. 해방과 평화를 찾은 새 강토우에서 선렬들의 넋이 후대들에게 전해지고있다는 공감을 가져보았다. 바지랑대에서 펄럭이는 이불거죽과 솟을대문에 날아오르는 비둘기와 타오르는 굴뚝연기와 지어는 콩콩 짓는 강아지울음소리조차 살아 숨쉬는 이 땅의 복음과 풍경으로 안겨와 무척 경건해졌다.

연길북쪽 외곽에 세워진 28명 렬사 기념비를 둘러볼수록 감회가 깊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도시 연길시의 옛 전임 서기가 잠든 묘소를 찾은 발걸음이 내내 무거운건 아직도 야산이나 개천 혹은 늪가에 무주고혼으로 매몰된 렬사해골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에 섬뜩하기때문이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혹은 전혀 몰랐던 연길시 항일투사유허를 참배하면서 나는 형적행적을 찾지 못한 삼촌을 비롯한 수많은 무명렬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리였다. 조기석렬사도 새 날의 까치소리에 잠을 깨며 영생불멸의 숨결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줄 알고있다. 나의 삼촌 정길남렬사와 함께...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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