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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순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CCTV 한국어방송] | 발행시간: 2016.04.01일 09:52
53년 전 스피드스케이팅 1500m 종목서 금메달 따내

  [CCTV.com 한국어방송] 3월 중순, 동양인으로서 첫 세계 스피드 스케이팅 우승을 따낸 조선족 나치환(羅致煥·75)선생을 흑룡강신문사 CCTV닷컴 한국어방송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했다.



1963년 일본에서 우승에 오른 나치환 선수(가운데)./자료사진

  70대 중반이었지만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선생은 "그때 그 순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며 말문을 열었다.

  나치환 선생이 말하는 그때 그 순간은 1963년 2월 24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열린 제56회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난 이변이다.

  당시 21살이었던 나치환 씨가 스피드 스케이팅 1500m 종목에서 구소련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쟁쟁한 유럽 선수들을 제치고 동양인으로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중국 대표선수로 출전했던 나치환은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스피드 스케이팅 벽'을 무너뜨렸다. 전세계가 놀랐다. '동방의 병자' 취급을 받으며 안중에도 들지 못했던 중국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말이다.

  한국의 배기태 선수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87년 네덜란드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500m종목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보다 24년이나 먼저 세계 정상에 올랐다.

나치환씨가 2008베이징올림픽 때 하얼빈구간 성화봉송주자로 뛰고 있다. /자료사진

  지금은 하얼빈체육학원 구내의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100㎡ 남짓한 아파트, 소박하게 장식된 응접실 벽면을 가득채운 상장과 상패, 사진만이 화려했던 그의 과거를 말해주는 물증들이었다.

  1941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룬(海倫)시 동태조선족마을에서 5남매 중 중간에 태어난 나치환 선생은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공부하다 그후 3년은 테리(铁力)시 따꿔먼즈조선족초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이화(绥化)조선족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때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는 유화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때 체육시간에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했고 뒤늦게 빙상에 입문했지만 그는 천부적 소질을 나타냈다. 1957년에 치치하얼(齊齊哈爾)체육학원에 입학한 후 빙상 선수로서 본격 훈련에 돌입한 그는 1959년에 하얼빈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회 스피드 스케이팅 1500m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이듬해 2월 중국을 대표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빙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나치환씨가 1963년에 일본에서 1500m 종목 금메달을 따낸 후 환한 모습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자료사진

  당시 19세였던 나 씨에게 세계의 벽은 높기만 했다. 500m 15위, 1500m 29위, 5천m 22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세계무대에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그는 62년 2월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00m 5위와 1500m 4위 등을 기록해 48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인종합 6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좁혔다.

  나치환 선생은 당시 하얼빈에서 한달간 구소련 코치인 스제인의 지도를 받았다.

  1963년은 빙상선수로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은 해였다. 그해 2월에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개최된 세계대회에서 노르웨이 선수를 따돌리고 1500m에서 마침내 1위에 오르는 감격을 맛봤다. 같은 대회에서 500m와 5천m에서도 각각 2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어 일약 세계 빙상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유럽 선수들의 독무대였던 세계대회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게다가 키가 170센치밖에 안되는 중국 조선족 출신인 나 씨가 우승했다는 사실은 일본인에게도 커다란 놀라움을 안겨줬다. 지금도 가루이자와에 가면 당시 우승자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나 선생은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 선수의 수준이 밑바닥이라며 업신여겼고 호텔도 안 좋은데 묵게 했다. 심지어는 연습도 못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나 씨가 우승을 차지한 후에 태도가 급변했다고 한다. 나 씨는 자신이 우승한 직후에 축하선물로 사과상자를 들고 숙소까지 찾아왔던 재일동포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 선생은 "중국 빙상계는 한때 조선족들이 주도했는데 지금은 조선족선수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그의 입에서 정홍도, 이태권, 박달화, 임세준, 김창복, 허명숙, 김영애, 최순자(지린성, 전국1등), 김미옥 등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50~60년대 전국 대회에서 1등부터 6등까지 조선족 선수들이 독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1971년부터 헤이룽장성팀의 코치로 일하다가 1985년부터 1996년까지는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했었다. 1997년부터 퇴직했던 2004년까지 또 다시 헤이룽장성팀의 코치로 활동했었다.

  헤이룽장성팀의 코치로 활동하던 기간에 조선족선수를 선발하려고 여러곳을 다녔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인 첫 세계빙상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에서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핀란드 세계대회에서 한때 같은 빙상팀에서 활동하다 조선으로 건너간 뒤 조선대표로 출전한 과거의 동료선수를 접촉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트집을 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국가배신분자, 자산계급체육분자 등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금상태에서 중국어로 반성문을 쓰느라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중국어 수준이 그닥 좋지 않았는데 반성문을 쓰느라 사전을 많이 뒤졌지요. 그래서 그때 중국어 수준이 많이 늘었어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흑룡강신문사 cctv닷컴 한국어방송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받고 있는 나치환선생. /본사기자

  그는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들어선 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을 맞아 '가장 걸출한 운동선수'로 선정됐고 1988년에는 '신중국 체육개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994년에는 건국 45주년을 맞아 '45명의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나 선생은 1997년에는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고비를 겪기도 했다. 막대한 치료비 때문에 금으로 된 세계대회 우승메달까지 팔려고 생각했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과거 동료와 체육계 인사 등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35년 만인 1998년에 다시 일본나가노를 방문하게 되었으며 동계올림픽에 참석해 성화주자로 되었다.

  그는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던 기간 한국의 빙상코치 및 선수들과도 인연을 쌓았다. 1993년 중국대표단 감독 신분으로 미국에서 열린 빙상대회에 참석했는데 당시 한국대표단 고 김기수 단장과 교류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술도 못하고 담배도 안피웁니다. 퇴직후에는 등산도 하고 낚시도 합니다. 한주일에 2-3번씩 헬스장에 다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불편합니다. 단련하면 땀이 나고 가뿐합니다. 체육인들은 움직여야 몸이 편합니다"

  나치환 선생은 연세가 많지만 자가용을 몰고 다닐 정도로 건강한 신체로 여생을 즐기고 있다. 현재 베이징하이탠구빙상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수봉 김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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