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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개국대전5분전 나는 모주석에게 통역했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04.11일 11:10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4)

새 중국 초대 일어, 조선어 통역 최빈선생을 찾아서

○ 박정웅 윤봉현 김홍화 인민넷 기자



조선에서의 나날들(오른쪽 세번째).

저명한 일어, 조선어 통역원 최빈선생, 그는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이 천안문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하기 바로 5분전에 모주석의 첫 조선어통역을 맡았던 분이다.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외기자단 성원으로 조선전선에 나갔다가 정전담판회의장 통역으로 남아 3년간 사업하였으며 1954년에 귀국하여 외교부에서 기자관리책임을 맡았었다.

필자가 최빈선생의 집을 찾았을 때 서재벽에 걸려있는 주은래총리의 통역을 하고있는 최빈선생의 사진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올해 여든이 넘은 그지만 태극권을 30년이나 견지해온 덕인지 아직도 정력이 왕성하였으며 조각예술에 남다른 흥미와 재능을 갖고있었다.

개국대전 개막 바로 5분전

최빈선생은 1949년부터 신화통신사 신문국에서 통역사업을 시작했다.

1949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준비로 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가 개막되여 페막될 때까지 그는 줄곧 회의취재에 참가하였다.

어느 날, 그가 한창 조선어통역을 하고있는데 주덕해동지가 조선말을 듣고 다가오더니

《아니, 이거 조선족청년이구만! 일을 잘하시오!》라고 격려했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주덕해동지를 만나보게 되였다.

최빈선생의 생애에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일은 1949년 10월 1일, 개국대전이 열리던 그날이다.

《천안문성루 좌측으로부터 성루에 올라오시던 모택동주석을 위해 조선어통역을 맡았던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짧은 몇마디 말이여서 통역을 했다고 하기는 좀 어렵겠지만요.》 최빈선생은 회상에 물젖어 이야기를 터놓는다.

그날 최빈선생이 조선대표단 성원들과 함께 천안문성루 왼켠에 서있는데 천안문성루로 올라오시던 모택동주석께서 조선손님들을 보시고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라고 묻는것이였다.

최빈선생이 《조선에서 오신 분들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모택동주석은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라는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총망히 성루가운데로 나갔다.

그때는 바로 오후 2시 55분, 5분후인 정각 3시에 모택동주석은 천안문성루 한가운데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전 세계에 장엄히 선포했다. 이윽고 중화인민공화국 오성붉은기가 서서히 국기게양대에서 게양되였다.

《정말로 력사적인 순간이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 벅차오릅니다. 저의 통역생애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력사적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왕청현 배초구산골에서 태여난 제가, 당시 26살밖에 안되였던 제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 바로 5분전에 위대한 수령 모택동주석의 통역을 하였다는것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장엄히 선포하는 모주석의 목소리를 천안문성루에서, 바로 그이의 신변에서 들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세월은 흘러 어언간 60년이 지났지만 최빈선생은 그 순간을 회억할 때마다 항상 그때와 똑같은 감동에 젖군 한다.

조선전쟁 판문점에서의 3년...

1951년 조선전쟁 당시, 중국에서는 두명의 영국기자를 포함한 인민일보, 광명일보, 신민보, 대공보 등 매체기자들로 중외기자단을 구성해 조선정전담판장소에 나가 취재하게 하였다. 그때 그는 기자단 무전대를 책임지고있었다.

그런데 기자단 숙소가 두번이나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영국기자를 포함한 기자단을 철수하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정전담판장소인 개성 판문점에 남아서 정전담판회의장 통역을 맡게 되였다.

가렬처절한 조선전쟁기간에 외국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러 다니면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밤도와 현장까지 가야 하는데 불을 켜면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받기때문에 그냥 어둠을 헤치며 나가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자동차가 벼랑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보낸 3년간 역시 그의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나날들이였다.

《지금도 당시 조선 개성 판문점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은 해마다 모임을 가지고 즐겁게 흘러간 옛시절을 회상하군 합니다. 다음해에도 꼭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건만 벌써 몇몇 친구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였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오른손등으로 축축히 젖어든 눈시울을 닦는것이였다.

50년대의 어느 국경절날 밤, 주덕위원장이 천안문성루에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을 회견할 때 그는 그의 통역을 맡은적이 있다.

근데 경이로운것은 그때 방문온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이 바로 최빈선생이 조선정전담판대표단 통역으로 있을 때 조선인민군신문사 기자로 함께 일한적이 있었던 옛친구였다.

오랜만에 북경에서 다시 만난 두 전우는 반가움에 어쩔줄 몰라했다.

주은래총리와의 색바랜 사진 한장



주은래동상 앞에서의 최빈선생.

최빈선생의 서재는 돌조각, 나무뿌리조각, 해면과 플라스틱 조각 예술품들로 꽉 차있었다. 그중에서도 주은래총리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조각한 주은래의 조각상이며 사진들이 제일 눈길을 끌었다.

그의 서재에 걸려있는 주은래총리와 함께 찍은 색바랜 흑백사진 한장.

《이 사진은 1959년 9월말, 국경절전야에 주은래총리의 초청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행사에 참가하러 온 일중우호인사 마쯔무라 겐조와 주은래총리가 밀운저수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장면입니다. 저는 그때 일어통역을 맡았습니다.》

그는 늘 이 사진을 보면서 주은래총리를 그리고 또 젊은 시절의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들을 더듬어보군 한다.

일중우호인사로 일중친선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 일본자유민주당 원로인 마쯔무라 겐조, 그는 중국의 삼국지에 특별한 흥미를 갖고있었다. 주은래총리의 배치로 료승지의 안해 경보춘녀사가 마쯔무라일행을 안내하여 삼국전적지를 답사했고 최빈선생은 그 팀과 동행했다.

《주은래총리는 6개 국 언어를 장악한 대단한 분이시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마쯔무라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데 주은래총리가 뒤로부터 나오시며 《곤니찌와!》 하고 일어로 인사했다.

그러자 일본기자들은 신이 나서 주은래총리에 대한 취재에 달라붙었다. 주은래총리는 자기는 여섯개 나라의 말을 할수 있기 때문에 6개 국 식당에 가 보이(웨이터)로 일하면 합당할것이라고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런 하나하나의 기억의 쪼각들이 주은래총리에 대한 그의 존경의 마음을 더 짙어지게 하고있었다.

1954년 5월부터 최빈선생은 외교부에 배치받아 외국기자관리사업을 책임졌다.

1964년, 쏘련수상 꼬쉬낀이 윁남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도중에 북경에 잠간 머물렀는데 주은래총리께서 공항에 나가 비행기승강대옆에서 꼬쉬낀수상과 악수하고 헤여졌다.

이것이 그가 제일 마지막으로 본 주은래총리였다고 한다.

평범한 공민으로 만년을

이와 같이 화려하고 자랑스런 경력을 가지고있는 최빈선생, 하지만 하냥 겸손하기만 한 그는 여태껏 자기의 지난일들을 남과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기 자식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단지 평범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자신의 애호와 흥취를 즐기며 만년을 보내고있다.

조각예술에 큰 흥취를 갖고있는 그는 돌조각이나 나무뿌리조각, 해면이나 플라틱스 조각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최빈선생 략력:

길림성 왕청현 백초구 출생.

1948년 5월 화북문법(문과, 법학)학원 졸업. 그 전해에 중국공산당 지하당조직의 령도밑에 진행되는 학생운동에 참가(화북문법학원은 그후 중국인민대학에 합병).

1949년 2월부터 1949년 9월까지(26살) 중국공산당 북평시 제8구위원회 신화통신사 총사에서 사업.

1949년 9월부터 1951년 7월까지 국제신문국에 전근되여 일어, 조선어 통역에 종사.

1951년 7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중국 중외기자단 성원으로 조선 개성 판문점에 가 통역을 하다가 그후 조선에 남아 중국인민지원군 정전담판대표단 통역으로 사업, 1954년 5월 귀국.

1954년 5월부터 1958년 12월까지 외교부 보도국에서 근무.

1958년 12월부터 1987년 11월까지 중국국제문제연구소에서 사업, 1987년 11월 리직.

편집/기자: [ 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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