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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宮闕에서의 고려인 男女의 悲戀/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3:03
몽골 宮闕에서의 고려인 男女의 悲戀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사랑을 위해 宦官이 된 고려 총각

원나라 시기 몽골 궁중속에서의 고려인 남녀의 비련은 『元史 ․ 宦者』에 실려 있다.

朴不花는 고려인으로서 왕불화라고도 불렸는데 그의 生卒의 년대는 명확치 않다. 소년시기의 朴不花와 동향의 처녀 奇씨는 어려부터 같이 자라서 서로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두 총각과 처녀를 천생배필이라고들 했다. 량가의 부모들들도 이를 묵허하면서 나이가 차면 둘을 결혼시키려고 궁리했다.

그런데 뜻밖의 변고가 생기게 되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順帝(1333-1368)천하에서 미녀를 고를 때 절세의 미녀인 천생려질인 奇씨가 궁녀로 뽑혀 원나라 몽골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奇씨의 본관은 幸州(지금의 경기도 고양군)이고 고려의 권신 奇轍의 누이동생이다.

奇씨가 원나라의 궁녀로 끌려간 후 박불화와 奇씨 이 두 련인은 생리별하여 먼 곳에서 헤여지게 되었다. 박불화와 奇씨는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사랑하는 기씨와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던 중에 박불화는 궁중에 환관으로 들어가면 奇씨와 朝夕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박불화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스스로 자진하여 거세를 받고는 환관이 되어 몽골 궁중속에 들어갔으며 정말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궁중에서 朝夕으로 奇씨의 身邊에서 맴 돌 수 있게 되었다.

박불화와 기씨의 기이한 사랑은 프랑스 중세기의 철학자 아벨라르(1079-1142)와 그의 녀제자 엘루아즈의 悲戀을 연상케 하지만 아벨라르가 엘루아즈의 삼촌들이라는 他者에 의해 억지로 거세를 당했다면 박불화는 스스로 자진하여 거세를 받았다는 점에서 前者보다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사랑을 위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까지 자를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서 아마도 박불화를 제외하고 두 번째는 찾을 수 없으리라.

박불화와 기씨의 기이한 사랑은 사랑이 나중에는 性이 제외되고 性을 초월한 플라토닉 러브로 승화된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자기와 다시 만나서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남성을 잘라버린 박불화와 궁중에서 다시 상봉했을 때의 奇씨의 그 심정은 대관절 어떤 심정이었을까?

궁녀로부터 황후가 된 고려 녀인 奇씨

기씨는 워낙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하고 영리한지라 순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순제는 기씨에게 홀딱 반하여 후궁의 황후와 비빈들을 잊어버리고는 늘 기씨와 잠자리를 같이 하군 했다. 그리하여 기씨는 1339년 순제를 위해 첫 아들 愛猶識理達臘을 낳게 되었다. 皇子는 비록 皇后나 妃嬪들이 낳은 것은 아니었으나 長子였으므로 奇씨에 대한 順帝의 寵愛는 남달랐으며 어미인 기씨는 아들로 하여 점점 지체가 높아졌다.

奇씨는 자기에 대한 박뷸화의 사랑에 감동되여 박불화를 자기 곁에서 자기만을 시중들 수 있도록 간청하니 순제는 순순하게 응낙하였다. 그리하여 박불화는 奇씨의 近侍 宦官으로 되었다.

그 뒤 1339연 4월에 奇씨는 제2황후로 되어 興聖西宮에서 살게 되었고 박불화의 지위도 환관중에서 월등하게 높아졌다. 황후로 된 奇씨는 박불화에 대해 더욱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 늘 순제 앞에서 박불화를 승진시켜 주도록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로하여 박불화의 관직은 榮祿大夫資正院使로까지 올라갔다. 박불화는 奇皇后 궁중에서 재물을 관할하는 총관으로 되었으며 西宮의 일들을 흔히 박불화가 혼자서 결단을 하였다.

황후로 된 奇씨는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와 같이 원나라에서의 奇황후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도 奇 황후의 일족인 奇씨 세력이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朝政에 손을 대기 시작한 박불화

성적능력을 상실한 환관들은 흔히 자신의 욕망을 정치에 돌리게 되는 법이다. 억압된 리비도를 정치권력을 장악하는데 돌리게 되는 법이다.

奇황후에 기대여 궁중에서 권세와 지위를 얻게 된 박불화는 먼저는 궁정밖의 일들에 손을 뻗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지정 18년(1358년) 京師에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게 되었는데 마침 하남, 하북, 산동 군현들이 전란으로 생령들이 도탄속에 빠지고 백성들은 男負女戴하여 京師로 피난을 하려고 몰려들어 죽은 시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러한 대재난에 직면하여 박불화는 자기에 대한 朝野의 찬사를 유도하고 민심을 얻기 위하여 순제에게 이재민들을 구원할 것을 上奏하였다. 순제는 당연히 이를 지지하였고 박불화는 자기의 사재를 털어서 묘지를 사들여 이재민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시작하였다. 순제와 기황후가 금은보화를 내놓아 박불화를 지원하니 동궁의 환후, 황태자, 태자비들도 많은 재물을 내놓았다. 박불화는 이러한 돈과 재물을 바탕으로 하여 2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들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이런 서슬에 기황후가 순제 앞에서 박불화의 미덕과 선행을 거듭 선양하게 되자 순제는 박불화의 사적을 비석에 새겨 세우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로부터 박불화의 美名은 大都 안팎에 자자하게 되었으며 궁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환관으로 되었다.

순제의 신임을 받게 되고 궁정 안팎의 대신들과 관료들의 존경심을 얻게 되 박불화는 朝政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박불화는 奇황후가 낳은 아들인 太子에게 順帝가 禪位하도록 기황후, 태자와 함께 일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일에 적극 동조하지 않는 좌승상 太平을 제거하기에 이르며 우승상인 溯思監은 기황후, 태자의 세력에 강함을 알고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기황후, 태자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고있는 박불화와 결탁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朝政에 간섭하려고 하던 박불화의 마음에 꼭 맞아떨어졌다.

박불화와 우승상인 溯思監는 서로 짜고 들어 朝政을 틀어쥐고 자기의 세력을 키워서 얼기설기 얽힌 정치세력이 형성되게 하였는데, 궁정 내외의 대신들과 관리들은 모두 박불화를 붙좇게 되었다. 이처럼 기반을 닦은 후에 박불화는 우승상 溯思監와 손을 잡고 몽골귀족들을 여지없이 타격하기 시작하였다. 순제의 외삼촌 老的沙를 비롯하여 18명의 공신 자제들에게 역모를 꾸몄다는 죄명을 들씌워 모살하려고 하였으며 몽골족 왕손 자제들도 마구 죽여버렸다.

살아남은 몽골 대신들이 박불화를 참소하였지만 기황후의 비호로 박불화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기황후가 낳은 태자를 황제자리에 올려놓으려는 박불화와 溯思의 모략은 계속되였다. 순제도 기황후와 태자의 야심을 간파하고 老的沙를 보호하면서 자기 곁에 그냥 두어 자기의 황제 자리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황후와 박불화가 백방으로 방애하는 바람에 순제는 부득이 老的沙를 雍王으로 봉하여 그이 封國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老的沙는 경사를 떠난 후에 순제의 지령에 다라 大同에 주둔하고 李羅帖木兒 父子가 지휘하는 있는 川軍에 몸을 의탁했다.

奇황후와 태자는 順帝의 지지 세력인 川軍을 소멸하기 위하여 우승상 溯思와 박불화더러 擴廓帖木兒 父子가 지휘하는 汝寧軍을 外援으로 삼아 가지고 李羅帖木兒와 老的沙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함하였다.

至正 24년(기원 1364년) 태자는 암암리에 조서를 내려 李羅帖木兒의 兵權을 파면하면서 老的沙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李羅帖木兒는 조서가 순제의 뜻이 아니라 溯思監과 박불화가 꾸며낸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그 조서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不顔帖木兒 등 몽골귀족들은 李羅帖木兒가 억울함을 알고 있었기에 순제에게 글을 올려 李羅帖木兒를 두둔해 주었다.

순제는 이 모든 것이 태자의 사주를 받고 한 짓임을 알고는 溯思監과 박불화를 각각 령북과 감숙으로 정배를 보내라고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순제는 이미 경사에서 허수아비 같은 신세였으므로 溯思監과 박불화는 모두 기황후의 비호를 받아 여전히 京師에 머물고 있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李羅帖木兒는 군사를 거느리고 경사를 철통 같이 포위하고는 溯思監과 박불화를 자기 손에 넘기지 않으면 포위를 풀지 않겠다고 했다. 순제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기황후의 저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시켜 溯思監과 박불화를 李羅帖木兒에게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溯思監과 박불화는 모두 李羅帖木兒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

이런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奇황후는 1365년에 正后로 되었다.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은 원나라 조정의 혼란과 내분을 더욱 가심화 하였으며 이후로 거퍼 4년도 채 안 되여 원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北元 昭宗은 바로 奇황후가 낳은 愛猶識理達臘이다. 고려 녀인이 낳은 절반 고려인이다.

원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킨데는 고려인 출신의 宦官 박불화와 그를 지지하는 고려인 출신의 奇황후 그리고 그가 낳은 태자의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나는 일이다. 이리하여 高麗도 蒙古人의 鮒馬國이라는 너절한 지위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2009년 5월 12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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