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년간 연길시흥안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박영애교원은 지금은 연길시성인교육국에 전근되여 사업하지만 아직도 중학생이나 고중생이 된 제자들은 그를 무척 따르고 있다. 전화를 걸어오거나 지어는 직접 그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학교생활과 본인의 근황들을 회보하고 조언을 듣군 한다.
1983년부터 흥안소학교의 교원으로 사업한 박영애교원은 늘 자기 실제행동으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그는 제일 일찍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하는 교원으로 직접 허리를 굽혀 종이를 줏거나 걸레로 창턱을 닦거나 화분에 물을 주면서 자신의 언행으로 학생들의 본보기가 되였다.
이 학교에는 《세계문화교류원》에 다니는 기숙제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가 이 교류원의 총책임을 맡게 되였다. 그때는 매일 학생들한테만 신경쓰다보니 딸의 고중입학시험준비도 돌보지 못했다. 딸애는 엄마가 끓여주는 맛있는 음식을 한때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엄마의 따뜻한 고무격려 한마디도 못 들은채 고중입학시험에 참가했다. 그때 딸애는 《어머니의 그 많은 아들딸중에서 제가 제일 불쌍한 존재네요》 라고 기분상해 말했다.
이렇게 애들한테 푹 빠진 박영애교원은 기숙학생이 앓아누우면 밤중에도 아픈 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보이고 자기집에까지 데려다 알뜰히 간호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저마다 《박선생만 애들옆에 있으면 시름놓인다. 박선생은 애들한테 부모보다도 더한 사랑을 준다.》라고 말한다.
모 학생의 어머니가 불행히 사망하고 그애의 아버지는 외지에 있을 때였다. 박선생은 열살밖에 안되는 그애가 심리타격에서 헤여나오지 못할가봐 자기 집에 데려다 알뜰한 관심과 깊은 사랑을 몰부어주었다. 한 학생은 또 성격이 특별히 괴팍하고 자립능력이 차해서 경상적으로 학교에 오지 않거나 조퇴, 지각하기가 일쑤여서 반급 애들한테도 기시를 당했다. 박선생은 그 학생에게 가족사랑이 결핍하다는걸 알아내고는 그애를 자주 포옹해주고 그애한테 부모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반급애들도 그애와 형제자매처럼 지내도록 인도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반급에서 그애는 차츰 마음의 응어리를 풀었고 생활에 적극적으로 림하는 애로, 밝은 애로 전변하게 되였다.
그의 쉼없는 노력과 사심없는 애심에 연길시 정부와 교육국에서는 그한테 《시우수담임교원》, 《시100명교학능수》, 《시10대우수보도원》, 《시우수공산당원》 등 많은 영예를 안겨 주었으며 2008년에는 《길림성민족기숙제중소학관리사업선진개인》으로 표창받았다.
왜 그토록 정성을 몰부어 학생들을 사랑해 주었는가 하는 물음에 그는 《내가 교원이기 때문이다》라고 소박하게 말한다. 진정 《교원》이란 두 글자의 무게를 깊이 깨친 박영애교원의 책임감이 넘치는 대답이였다.
글/사진 중국조선족소년보 림금산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