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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통해 배운 삶의 지혜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6.11.09일 09:10
인물이름 : 리나

<조선족 3세들의 코리안 드림 이야기>-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시작된 코리안 드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코리안 드림의 첫 물결을 일으킨 우리부모 세대들은 오로지 가족과 자식을 위해 힘든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피와 땀으로 가족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러나 조선족 집거지 와해, 가족의 해체, 청소년들의 비뚤어진 성장 등 부정적인 영향들이 많이 뒤따랐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 3세들은 참으로 늠름하고 씩씩하고 도도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들은 다수가 대학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류학의 기회까지 주어진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세대라고 할수 있다. 이들은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한국사회 여러분야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한국류학 과정에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격, 한국에서의 대학원 생활, 한국에서의 직장생활 노하우, 생활속의 좌충우돌...<조선족 3세들의 코리안 드림 이야기>코너에서 만나본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국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한국의 중국전문 특허법률사무소인 “지심특허법률사무소”에서 중국팀 팀장으로 있는 리나씨이다.

리나씨의 한국 류학생활은 2004년에 시작된다. 연변대학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신청하게 된것이 계기가 되여 리나씨는 류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한국 생활 적응기]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그리고 큰 기대와 호기심을 안고 서울에 가게 되었고, 쭉 부모님 손길 아래에서 지내 오다가 27살이 되어서야 인생의 첫 독립을 시작하게 된다. 그것도 이국타향에서.

당시 외국인 류학생은 학교 기숙사 신청을 바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신림동 고시촌의 자그마한 반지하 월셋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무작정 싼 집으로 찾은 거죠. 그때는 8월말이라서 몰랐는데 겨울이 되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리나} “수돗물은 찬물만 나오고 보일러도 윗층 주인집에서만 조절할수 있는 집이 었어요. 샤워도 윗층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없을 때 조용히 해야 했고, 빨래도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에 손빨래를 하곤 했죠. 그때가 참 서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길 옆 지하방이라 반쯤 보이는 창문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소리, 말소리, 싸우는 소리가 생생하게 다 들릴 만큼 방음도 안 되는 방이어서 밤마다 잘 때면 불안한 마음에 베개 옆에 작은 과도(果刀)를 놓고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집 생각에 거의 매일 눈물로 보내기도 했죠...”

그때 리나씨는 하늘에 지나가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집에 전화하면 더 가고 싶어져서 전화도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도 집밖을 나서면 그렇게 평화롭고 따뜻한 세상이 또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평안함을 느꼈다. 날씨도 따뜻하고 사람들도 따뜻하고 예의 바르고…… “참 살기 좋은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학교 캠퍼스도 크고 예쁘고 선생님과 학우들도 다들 너무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러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또 두려움과 불안감이 몰려오고……그렇게 6개월간 불안한 지하생활을 지내다가 친구의 알선으로 한 친구 집에 들어가 얹혀살기도 했다. 생활비가 어려워 집 근처 가방공장에서 가방 끈 수선하는 수공업 알바도 몇개월 한 경력도 있다. 다행히도 리나씨는 인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 친구의 소개로 중국어 과외를 시작하면서 남들은 다 한번쯤은 한다는 고깃집 알바나 음식점 알바 같은 고생은 크게 안 하고 살았다.

{리나} “한국 류학생활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이 이 길에 들어서다 보니 막상 학교 등록금, 생활비에 대한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실감하기 시작했고… 다행히 등록금은 한국에 계시는 친척분들의 큰 도움을 받아 해결되였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받게 된 장학금으로 2년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칠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저에게는 평생 잊지못할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

[공부가 제일 어려워요]

생활에서의 이러한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리나씨한테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학교 공부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중국의 학사과정 이상은 거의 다 중국어로 강의하고 교재도 전부 다 중문으로 되어 있다. 리나씨도 중국에서 모든 수업을 중국어로 받았고 언어학의 기본용어부터 시작해서 모든 과정을 다 중문으로 읽고 쓰고 익혔기에 한국에 가니 가장 기본적인 언어학 용어부터 전부 한국어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리나씨한테는 그것부터가 큰 산이 였다.

{리나} “예를 들어, 중국어로 “语素”로 배워왔던 것이 갑자기 “형태소”라는 용어로 표현이 되는 등. “아~ 이게 이거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모든 용어를 일일이 매칭시키기가 그렇게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일부 수업은 정말 듣고 싶어서 수강신청을 했는데 첫 수업부터 영어 원서를 읽고 번역하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방식의 수업이었습니다. 제2외국어가 일본어인 저로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수업이었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교수님께 영어가 안 돼서 못 듣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수업 취소한 적도 있습니다 (ㅎㅎ 씁쓸하죠).”

리나씨의 이 어려움을 곁에서 지켜보시던 지도 교수님은 그를 위해 특별 훈련법을 조언해주셨다. 교수님은 언어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론>>류의 책을 6권 정도 정해주시고, 매일 한 장절씩 읽고 요약해서 정리하는 숙제를 내주셨고 매일 체크해주셨다. 이때 한 공부가 리나씨에게는 제일 기억에 남았고 그에게 제일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 되었다. 교수님 덕분에 그는 다시 공부에 열의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였고 그 덕분에 박사과정을 원만히 수료할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암흑의 시기]

힘들지만 즐거운 환경에서 무사히 2년 수강 과정을 마치고 박사론문을 쓸 준비를 하게 되었지만 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리나씨는 본격적으로 알바생활도 같이 시작하게 되었다. 강남의 모 유명한 중국어 학원에서 1년 동안 강사로 있으면서 첫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서울대 기초교육원에서 전임대우 강사로 1년동안 강의도 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보니 론문이 늦어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그제서야 모든걸 접고 론문 쓰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악몽이 시작되었고 슬슬 암흑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리나} “론문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대인 기피증, 우울증까지 앓게 되고 정말 사는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생활이 거의 1년반 동안 지속되었죵. 심지어 심각할 때에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론다 번의 <<시크릿>>이란 책을 접하게 되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리나씨는 매일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감사의 마음을 저만의 <감사노트>에 적으면서 다시 삶의 용기를 얻었다. 그러면서 그는 “포기”라는 삶의 지혜도 배우게 되었다. 부모님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서 어렵게 어렵게 박사 론문을 포기하고 박사학위도 포기하고 나니세상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리나} “정말 힘들게 선택하고 결정한 만큼,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친구와 지인분들에게는 많은 실망과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죠. 하지만 다들 리해해주시고 힘을 주셔서 또 다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래서 정말 고맙고 미안합니다....”

[인생의 전환점]

힘든 시기를 딛고 다시 일어난 뒤 리나씨는 한국의 유명 대기업인 삼성, LG, SK, 한화, 웅진 등 기업체 강의를 하면서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자신있는 강사로서의 입지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한국 지식재산보호원 특허번역 관련 강의 중

그러던 와중에, 친구가 알선해준 개인 과외 하나가 있었는데 “변리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부부의 중국어 과외였다. “변리사”가 무슨 직업인지 그때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이 리나씨에게 인생의 전환점으로 될줄이야... 그 부부가 바로 지금 리나씨가 근무하고 있는 “지심특허법률사무소”의 대표들이였고, 리나씨의 중국어 실력과 인품을 인정해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 인연으로 리나씨는 지금까지 쭉 이 사무소에서 그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변리사”라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그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었고 용기를 주었으며 잠재력을 끌어내주신 고마운 존재이다. 현재 리나씨는 이 특허사무소에서 중국관련 지적재산권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저는 조선족입니다]

{리나} “조선족이라는 신분이 한국 생활에서 플러스되는 부분도 많지만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습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에 대한 선입견으로 불쾌한 일들도 많이 겪게 되다 보니 어디 나가서 당당하게 “조선족”이라고 밝히기 꺼려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 하면서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조선족은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우수한 인재들이 많다. 조선족이 각 분야에서 하는 역할은 그 여느 중국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해낸다. ”라는 마인드를 가진 저희 대표님의 평가 덕이 가장 큽니다. 조선족에 대한 대표님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자주 듣다 보니 자존감, 자부감이 생겨서 이제는 어딜 가나 당당하게 “중국 조선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사생활]

이제 직장생활을 시작한지도 어언 5년, 물론 힘들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고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었지만, 이런 재미있는 세상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리나씨는 지금 하는 일이 재미 있고 즐겁다고 한다. 이제 겨우 5년 경력이다 보니 아직은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그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믿는다고 한다. 즉 10년 동안 꾸준히 하다 보면 꼭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가짐으로 리나씨는 앞으로도 열심히 나만의 길을 걸어갈것이라고 한다.

{리나} “중국인 신분으로 한국 사회에서, 특히 한국 회사에서 한국인 직원들과 잘 어울리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만의 소신을 지키되, 내 자존심을 적당히 버리고 항상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고 두루두루 잘 아우르면서 잘 지낼 수 있는 게 어쩌면 저의 회사 생활 노하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너들이 제시한 비젼에 발 맞추면서 직원들 개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끌어내어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가는 게 가장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중간 관리자의 위치에서 오너와 부하직원들 사이에서의 다리 역할 또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는 거죠...”

[취미생활]

검도복 차림 멋지죠? 저만의 취미생활

그림 그리기도 재밌어요

한번 지옥 같은 시간과 “포기”라는 걸 겪고 나니 리나씨는 “인생이 별거 있냐, 매일 매일 즐겁고 알차게 보내는 게 최고다!”라는 신조가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림 그리기, 사진 촬영, 검도, 탁구, 여행 등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하면서 매일매일 즐겁게 보내고 있다.

리나씨는 이젠 자신의 멋진 인생 청사진도 갖고 있다.

밥퍼 봉사

하나는 젊어서 일 할 수 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능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그것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고 봉사를 하는 사람이 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늙어서 일 할 수 없을 때, 책을 쓰면서 꽃가게 하나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종영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황혼청춘”들처럼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보고싶을 때면 언제든지 볼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같이 즐겁게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3년만에 네식구 다 같이 모여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부모님 그리고 동생과 긴 시간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마음 한구석에는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옛날 같지 않아서 자주 서로 오갈 수 있고 더욱이 요즘은 위챗이라는 소통의 장이 있어서 더욱 가까이에 계신 듯한 느낌이 들어서 참 다행이다. 부모님과 가족은 내가 아무리 잘못을 하고 실망시켜도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시는 고마운 “내 사람”이기 때문에 제 “보물 1호”이다. 제가 애교도 없고 살갑지도 못한 딸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주는 누나라서 직접 얘기는 못하고 이 기회를 빌어 “항상 고맙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출처: 11월 1일 중앙인민방송국 <세계속의 조선족> 방송프로에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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