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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의 머리없는 장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8.11일 08:38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양세봉(梁瑞鳳)은 약 80년 전 남만주 일대를 주름 잡았던 항일장령이다. 그가 희생했을 때 조선인들은 다들 “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약간은 이상하게 비쳐질지 모르지만, 현지에서 이 “별”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찾은 사람은 심양의 길씨 성의 사업가였다.

  사실상 양세봉의 발자취를 찾는 사람들은 거개 이 사업가를 현지 안내인으로 삼고 있었다.



  그럴 법 했다. 양세봉은 예전에 료녕성 흥경현(興京縣)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흥경현은 훗날 신빈현(新賓縣)으로 개명했다. 이 때문에 길씨는 양세봉에게 남달리 친숙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저의 부친의 고향이 바로 신빈현이지요.”

  나중에 이 인연이 빌미가 되어 길씨는 양세봉 기념비를 그가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의 매입한 산에 세우기에 이른다.

  왕청문은 심양 시내에서 200여㎞ 상거했다. 왕청은 만족말로 보루라는 의미이며, 왕청문은 유조변(柳條邊)에 수축한 왕청의 변문(邊門)을 말한다. 유조변은 청나라 때 만족의 용흥(龍興) 발상지를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심어 만든 구역 계선이었다.

  왕청문 일대를 흐르는 강 이름이 바로 푸르강(富爾江)인데, 만족말로 버드나무가 있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푸르강 기슭을 따라 달리던 차가 먼저 멈춘 곳은 왕청문 화흥(化興)중학교의 옛터였다.

  화흥중학교는 그제 날 국민부(國民府)의 대표적인 교육기구였다. 국민부는 1929년 조직된 조선인들의 항일독립운동단체로, 1925년 이래 남북 만주에서 활약하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통합해 흥경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교육활동은 국민부가 가장 주력했던 사업인데 촌에는 서당, 구에는 소학교, 지방에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양세봉의 동생도 화흥중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화흥중학교는 또 사령관 양세봉이 한때 조선혁명군(국민부 산하 독립군) 사령부를 세웠던 곳이다. 그래서 양세봉의 최초의 조각상은 화흥중학교의 옛터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옛터는 지세가 낮아 비가 오면 물이 흠뻑 고였다. 이때면 양세봉의 조각상도 물 가운데 서글프게 홀로 서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학교청사를 매입한 후 양세봉의 조각상을 외면했으며 양세봉의 조각상은 더구나 쓰레기 무지에 버려지다 시피 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길씨가 부근의 산 하나를 매입한 후 양세봉의 조각상을 양지바른 비탈에 이전했던 것이다.

  항일의 총성이 제일 먼저 울린 곳

  차는 이도구(二道溝)의 한 골짜기에 잠깐 머물렀다. 길씨의 건축회사 건물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회사 광고를 하는 게 아닐지 했는데, 실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었던 유명한 곳이었다.



화흥중학교 옛터에 세워져 있는 왕청문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사진 전정혁 제공

  대한통의부는 1922년 만주에서 설립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훗날 참의부, 정의부 등에 흡수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하에 들어갔다. 골짜기 어구의 달라자(大砬子)에서 3,4리 정도 들어가면 아직도 그제 날의 연자방아 등 유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달라자는 만족말로 벼랑바위라는 뜻이다.

  “통의부의 신팔균(申八均)이 바로 이 골짜기에서 습격을 받아 숨졌지요.” 동행한 민간 사학자 전정혁(全正革)이 이렇게 설명했다.

  신팔균(1882~1924)은 김좌진 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던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1924년 통의부 의용군 사령관으로 취임, 이해 여름 이도구의 골짜기에서 의용군을 인솔하여 야외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가 일본의 사촉을 받은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습격을 받아 희생되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전정혁은 일행이 이번 취재 길에 만난 또 하나의 인물이다. 그의 이름에는 “양세봉장군 자료전시관 관장”이라는 직함이 따르고 있었다. 그와 양세봉의 인연은 지식청년으로 하향을 했던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잔치 같은 모임이면 노인들이 종종 노래를 불렀는데요, 난생 처음 듣는 노래였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옛날 독립군이 부르던 노래였다고 한다. 노인들은 노래 뒤에 또 양세봉 등 독립군 인물의 이야기를 담배 연기와 함께 피어 올렸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 전정혁은 연변예술학교에서 계통적으로 음악공부를 하며 귀향 후 옛 악보를 수집하면서 “독립군 용진가” 등 항일노래를 새롭게 접하게 된다.



화흥중학교 옛터에 세워져 있는 왕청문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사진 전정혁 제공

  이 무렵 양세봉 등 독립군 인물과 접촉을 가졌던 당사자들은 고령으로 일부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옛 사료 수집의 긴박성을 느낀 전정혁은 단연히 사재를 털어 답사의 길에 나선다. 그때 통장에 있던 예금 5천원을 전부 해지한 일은 30년 동안의 답사생애에 남긴 에피소드의 하나였다.

  “지청구를 많이 들었어요. 노친이 딸애에게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한푼 두푼 어렵게 모은 돈이었지요.”

  각설하고, 대한통의부 의용군과 그 후의 국민부 조선혁명군이 모두 왕청문 일대에서 활약상을 벌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흥경현은 조선인들이 약 2만명 살고 있는 지역으로, 독립군의 병력과 후방보급 등을 지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왕청문 일대에는 조선족마을이 적지 않게 산재하고 있었다.

  전정혁이 왕청문조선족중학교 교원으로 있던 1970년대 말에도 학생은 무려 6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왕청문조선족중학교는 중심소학교와 더불어 옛 화흥중학교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1990년대부터 학생이 급격히 줄어들어 종국적으로 2003년 경 폐교했다.

  1931년, “9.18” 사변이 일어난 후 동북 각 계층의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각종 무장을 조직하여 항일의 길에 나섰다. 지역적으로 동북 3성의 의용군 특점을 요약한다면 요녕성에서 먼저 흥기하고 길림성지역의 전투력이 비교적 강하며 흑룡강성의 영향력이 제일 크다. 항일독립무장 조선혁명군은 이에 앞서 일찍 1929년 4월 조직되며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전개한다.

  양세봉은 청년시대부터 항일활동에 투신하지만, 1932년 조선혁명군 사령관으로 추대된 후 비로서 빛을 크게 발한다. 이때 그는 동북의 반만항일(反滿抗日)의 세력과 연합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이끌며 중국의 항일투쟁사에서 마멸할 수 없는 큰 획을 긋는다.



  이도구를 지난 차는 인차 또 하나의 골짜기 어구에 접어들었다. 산비탈에 세운 하얀 조각물이 푸른 산을 배경으로 시야에 유표하게 안겨왔다. 멀리 동쪽에는 양세봉의 고국 조선이 있었고, 바로 산기슭을 흐르는 푸르강의 맞은쪽에는 고구려인이 세운 옛 산성이 있었다.

  고려성에 묻힌 조선인 장군

  일제는 항일무장을 일거에 소멸하기 위해 1934년부터 동북에서 이른바 “치안숙정(治安肅正)”을 전개하는데, 남만과 동변도(東邊道)는 일본 치안숙정의 중점이었다. 봉천(奉天, 심양의 옛 이름) 일본영사관 총영사 후쿠시마(福島)는 반일무장을 “소탕”할 계획서에 “먼저 양세봉을 소멸하고 이어 왕봉각(王鳳閣, 요녕민중자위군 지휘관) 을 포위, 숙청하며 나중에 공비 양정우(楊靖宇, 동북항일연군 지휘관)를 토벌”할 것을 밝혔다.

  일본군은 이 계획에 따라 산하의 특무조직을 이용하여 별호 “아동양(亞東洋)”이라는 반역자를 매수한다. “아동양”은 예전부터 교분이 있던 양세봉에게 접근하여 “산림대의 개편”이라는 미끼를 던졌다. 그는 미구에 개편을 위해 산림대 숙영지로 향한 양세봉에게 암살행동을 시행했다.



1990년 김효순 할머니를 인터뷰한 전정혁.

  “실제로 양세봉장군이 반역자의 총을 맞아 숨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전정혁은 조선혁명군 통신원이었던 이원태(李元泰)의 증언을 이야기했다.

  이원태는 양세봉이 왕청문 소황구(小荒溝)에서 북쪽으로 3,4백미터 상거한 수수밭에서 반역자의 총을 맞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중에 전정혁은 이원태의 이 증언을 바탕으로 양세봉이 총격을 당했던 곳을 확인했다. 그곳은 소황구에서 길림성의 통화(通化)와 신빈으로 가는 갈림목이었다.

  양세봉은 총격을 받은 후 10여리 밖의 조선인마을 향수하자(响水河子)에 운송되며, 이 마을에서 구급을 받다가 운명했다고 한다.

  “양세봉장군이 최초로 묻힌 곳도 향수하자가 아니지요.”

  양세봉의 시신은 나중에 흑구(黑溝)산성 남쪽 산비탈의 김도선(金道善)의 집에 운구되어 조문을 받고 추도식을 거행한 후 산성 안에 묻혔다. 흑구산성은 1,500년 전의 고구려 산성으로 약칭 고려성이라고 불린다.

  일본 군경은 양세봉이 묻힌 이튿날로 밀고자를 앞세워 김도선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양세봉의 시신을 파낸 후 작두로 목을 잘라 그의 두골을 갖고 갔다. 이때 작두로 목을 자르는 것을 거부했던 김도선은 현장에서 일본군이 쏜 5발의 탄환을 맞아 숨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990년 무렵 김도선의 차녀 김효순(金孝順)이 전정혁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김효순은 또 양세봉의 묘소 등 현장을 전정혁에게 직접 확인해줬다. 그때 김효순은 70여세의 고령이었는데, 고려성 부근의 쌍라자(雙砬子)에서 살고 있었다.

  “김효순 할머니는 양세봉장군의 옛 묘소에 도착하기 전에 하얀 치마저고리를 바꿔 입는 거예요.”

  반세기가 지나도록 양세봉에 대한 김효순 노인의 공경한 자세는 전정혁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김효순은 물론 장남 김효직(金孝稷)도 조선혁명군의 비밀 통신원이었다. 김효직은 또 조선혁명군의 예비청년군 일원이었다. 부친 김도선은 양세봉으로부터 “큰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씨의 가문은 조선혁명군과 조직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김효순은 집 마당에서 양세봉 시신의 머리가 잘리고 부친이 총을 맞아 숨지는 처절한 정경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양세봉의 머리 없는 시신은 훗날 고려성에서 약 8리 상거한 삼도구(三道溝)의 길옆에 묻힌다. 그때 조선혁명군 대원들은 무덤 앞에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이라고 밝힌 나무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양세봉이 희생된 후 조선혁명군은 세력이 급격이 약화되며 1938년에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와중에 조선혁명군의 상당수의 대원들은 동북항일연군 제1군에 편입되거나 기타 항일단체가 조직한 항일무장에 가입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961년 양세봉의 유골은 조선에 이장, 애국열사릉에 묻히며 흉상 비석이 섰다. 1962년 한국 보훈처는 양세봉에게 독립훈장을 수여했다. 현재 한국 국립현충원에도 시신이 없는 묘소가 세워져 있다.

  1995년, 양세봉이 활동하던 지역인 왕청문에 양세봉 조각상이 설립되었다. 조각상의 이름은 “항일명장 양세봉”이었다. 훗날 산으로 이장된 양세봉의 조각상 부지는 동북항일연군 역사와 항일전쟁사의 조사연구기지로 되며 애국주의교육시범기지로 명명된다.

  솔직히 조선인 항일독립투사가 이렇듯 중국과 조선, 한국 등 3국에서 동시적으로 추앙을 받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양세봉이 “하늘의 별”로 추앙을 받을 만큼 거물급 인사이여서 그럴지 모른다. 길씨가 밝힌 양세봉 조각상의 비화는 말 그대로 한 편의 소설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양세봉의 조각상을 산으로 이전한 후 현지 정부 등은 날짜를 잡아 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웬 일인지 그날 새벽부터 하늘에서 비가 장대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침 일찍 심양을 떠난 길씨 일행은 제사를 지낼 수 없을까봐 근심이 자오록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각상 부근에 이르니 주변의 산위에서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각상 주변만은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리는 거예요.” 길씨는 지금도 그때 그 일은 분명히 장군의 신통력이 천지에 감응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제사가 끝나니 그제야 비가 기다린 것처럼 막 쏟아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길씨가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라고 전정혁이 재삼 증언했다. 그는 이번 걸음에 무궁화 한 송이를 조각상 뒤쪽의 밭에 정히 심었다. 얼마 전 바다 건너 한국에서 일부러 갖고 왔다고 한다. 그는 “관직”을 달고 있는 “양세봉장군 자료전시관”은 바로 조각상 앞쪽의 평평한 곳에 서게 된다고 한다. 전시관은 아직 경비 부족 때문에 그대로 방치, 건물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정작 전정혁의 아쉬움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지금도 양세봉장군의 두골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당시 일본군은 양세봉의 두골을 통화 등 지역에 효시, 그들의 혁혁한 전과를 자랑했다. 그 후 양세봉의 두골은 어디론가 방치되며 그때부터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다말고 부근에서 작업을 하는 인부들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놀랍게도 조각상 주인의 이름이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 없는 장군의 모습이 푸르강의 물결처럼 밀려와 버들가지로 가슴을 아프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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