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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없는 한 조선인 대령의 이야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4.05일 14:54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잘 보세요, 제가 남자치곤 잘 생겼지요?” 서철(徐哲) 옹은 인터뷰 도중에 이렇게 엉뚱한 물음을 불쑥 던져왔다.

  서철 옹은 중국 공안부의 전 요인이다. 둘째 형 서파(徐波)도 명인, 약 70년 전에 벌써 대령의 계급장을 달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현존한 유일의 혈육인 서철 옹에게도 서파의 사진은 없었다. 실은 한 장 간직하고 있었는데, 언제인가 한국에 증명자료로 보냈다고 한다. 그때 사진 원본을 남겨두지 못한 것은 서철 옹의 마음에 서린 한으로 되고 있었다.

  어쩌면 서파는 훗날의 그의 사망지인 오지의 감옥처럼 그 어느 시공간에 몸으로서의 형체를 영영 갇혀버리고 있는 듯 했다.

  “형은 저보다 훨씬 잘 생겼습니다. 이러면 형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어요?”

  서철 옹은 마치 둘째 형의 사진이 되기라도 하듯 자기 얼굴을 쑥 내밀고 있었다. 북경 동남쪽의 아파트로 비쳐드는 봄날의 햇살은 그의 얼굴을 더구나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파의 얼굴은 서철 옹의 세 살 때의 첫 기억에 흐릿한 사진처럼 남고 있었다. 그날 서파는 어리광을 부리는 서철을 뒤로 하고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훗날 누나에게 확인한 일이지만 이날 서파는 고향인 요녕성 신빈(新賓)을 떠나 북경으로 공부하러 떠났던 것이다.



기자에게 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서철 옹.

  8.15 광복 전 신빈에는 조선인이 2만 3천여 명 집거하고 있었다. 훗날 귀국하거나 부근 지역에 분산되고 1990년대부터는 한국으로 노무송출, 정착하는 등 종국적으로 조선족(인)은 9천여 명 남지만 이 기간 모두 많은 명인들을 배출한 것으로 이름 있다.

  각설하고, 서파는 서철 옹보다 13살 손위의 형이었으니 그가 고향을 떠날 때 나이는 16세였으며 그 시기는 1933년이었다.

  그 후 15년 동안의 막장 드라마 같은 행적은 서파가 나중에 서철에게 이야기한 짧은 추억에서 간간이 나타나며, 그로부터 음지에서 드러난 서파의 모습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거물들과 얽혀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형이 다니던 대학은 북경 동쪽의 조양(朝陽)에 있었다고 하지요.” 서철 옹은 이렇게 회억하고 있었다.

  학교는 지명을 따서 조양대학이라고 이름을 짓고 있었다. 1912년에 창설된 이 대학은 당시 법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 “남쪽에는 동오(東吳)이요, 북쪽에는 조양이다”는 설이 있었다. 동오는 미국인이 창설한 상해의 동오대학 법학원을 말한다.

  의열단에서 추천한 황포군관학교 학생

  서파는 북경의 이 명문대학을 중퇴하고 남경에 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가 조양대학에 입학한지 불과 1년만의 큰 ‘사변’이었다.

  이때 일본군의 비행기는 편대를 지어 천진과 북경 일대를 제멋대로 비행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31년 ‘9.18’사변을 발동하여 만주를 점령한 후 또 1932년 상해 ‘1.28’사변을 일으켰으며 이어 1933년 상반년 병력을 집중하여 열하(熱河)를 강점하고 장성 연선을 진공했다. 일본군의 침략의 예봉은 동북을 떠나 전반 화북을 향하고 있었다.

  서파가 북경을 홀연히 떠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책의 향기가 다분한 명문 법대를 거부하고 화약 냄새가 풍기는 군관학교를 선택한 원인을 해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서파의 조부는 일찍 1911년 일본의 치하에서 살기 싫어서 아들딸을 데리고 동북으로 이주했다. 반도 남부의 고향에 있던 집과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두발로 한 달 남짓이 걸어서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에 이르렀다고 한다.



1911년 동북에 도착하자마자 안동 즉 단동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서파의 15살의 부친.

  서파가 고향인 만주를 마다하고 산해관 남쪽의 대학을 선택한 것은 조부의 그런 성미가 작용한 게 아닐지 한다.

  사실상 조양대학에 청강생 등으로 있었던 조선인 청년들은 이와 비슷한 원인으로 인해 황포군관학교에 적지 않게 입학하고 있었다. 서파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반일독립투쟁에 투신하려는 열혈 조선인 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를 망라하여 대륙 군사학교의 명부에 연이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1928년 3월 남경에 이전한 황포군관학교.

  진정한 의미에서 서파는 황포군관학교의 졸업생이 아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제1기부터 7기의 졸업생을 이르는 말이다. 황포군관학교는 그 후 무한(武漢)과 남경(南京), 성도(成都) 등 지역에 분교를 설치하거나 이전한다. 서파는 호가 운봉(雲峰)이며 요녕성 무순(撫順) 출신으로 남경 중앙군관학교 11기 제2총대 교통병대(交通兵隊)에 입학했다. 서파는 기실 원명이 서외교(徐外敎)이며 또 서동해(徐東海)라고 불렸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황포군관학교 제11기 동학록(同學彔)》에는 서파의 통신주소가 남경의 문서(門西) 호가화원(胡家花園) 18번지로 아주 똑똑하게 기입되고 있다. 자칫 길가의 그 무슨 동네 이름으로 치부할 이 주소는 실은 유명한 의열단(義烈團)의 본부가 소재한 곳이다.

  의열단은 1919년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단체로 1919년 만주에서 성립되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중반부터 암살이나 파괴 등 개인적인 폭력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으로 전환한다. 단원들을 황포군관학교로 입교시켜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게 하는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1930년대 의열단은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를 양성한다. 그 후 관내 항일단체와 정당을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며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그러고 보면 서파가 의열단의 소개로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가 의열단과 어떻게 또 어떤 연계를 가졌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중앙군관학교 11기에는 서파를 비롯하여 조선인 졸업생 10명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고 사학자 최봉춘(崔鳳春)이 밝힌다. 최봉춘은 근․현대 관내 조선인의 역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조선족 학자이다.

  문헌기록에 근거하면 서파는 1937년 10월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의 중앙군에 배속되어 있다가 광복군을 창설할 무렵에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金九)의 부름을 받고 임시정부가 이전, 소재한 국민당의 전시시도 중경(重慶)에 갔으며 1940년 12월 서안(西安) 광복군 총무처 설치 후 적 점령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모병 업무를 강화하기 위한 공작원으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고 최봉춘은 기술하고 있다.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단체사진 중간줄 오른쪽 다섯번째가 서파, 왼쪽 네번째가 김학규, 세번째가 오광심이다.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중경에서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창설한 자체의 무력단체이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총대장 김원봉이 부사령관에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1942년 5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그해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東盟)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1937년 12월, 남경은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중앙군관학교 제11기 제2총대가 졸업한 바로 두 달이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40년 남경은 일본이 편제한 괴뢰정권인 ‘왕정위(汪精衛)의 괴뢰정부’ 소재지로 거듭난다.

  “둘째 형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명을 받고 남경에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서철 옹은 이렇게 회억하고 있었다.

  대령의 뒤에 숨은 신비한 인물

  그게 1942년경에 있은 일이었다. 남경에 도착한 후 서파는 한 일본군 중좌의 주선으로 남경 ‘괴뢰정부’(혹은 일본헌병대)의 독찰(督察) 처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일본군 중좌는 무슨 영문인지 조선인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서파에게 거듭 부탁했다고 전한다.

  서철 옹의 회억을 정리해 보면 서파는 한때 남경에 있는 기간 진(陳)씨 성의 공산당 비밀요원과 내통하고 공동항일의 활동을 했다. 진씨는 공산당의 홍색근거지 연안(延安)에서 파견한 지하공작인원이었다. 이때 진씨는 여러 번 서파를 공산당원으로 발전시키려 했지만, 서파는 그가 국민당 당원이라고 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헌기록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요, 신빙성이 아주 적습니다.” 최봉춘은 이렇게 그의 일가견을 말한다.

  비록 눈과 귀, 코, 입 등 이목구비가 갖춰진 이야기이지만, 당시 임시정부나 국민당이 특별히 서파를 선정해서 남경에 파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부동한 곳에 동시에 출현할 수 있는 ‘초인간’이라면 모를까, 서파가 강소성 남경의 ‘괴뢰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면 1942년 초 안휘성 부양(阜陽)의 있던 광복군 징모(徵募) 제6분처(分處)에서 서파의 이름이 간부의 자격으로 등장하는 것을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더라도 연안의 진씨가 진실로 존재한 인물이라면 서파는 소속된 광복군 징모 6분처가 안휘성 부양에 있을 때 그와 만났을 수 있다는 조심스런 해석이 있다. 징모 6분처는 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가 초모(招募)공작을 위해 편성한 부대이다. 1942년 초부터 이 징모 6분처는 급변한 전세(戰勢)로 인해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부양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그때 서파가 주임 위원 김학규, 간부 오광심 등과 함께 부양에서 초모와 선전, 파괴 등 항일공작에 종사했다고 하는 최봉춘의 설명이다. 당시 부양은 지형적으로 일본군의 포위망에 들어있었으며 또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해 있었다. 부근의 팔로군이나 신사군 등 공산당 부대와 연계하고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씨는 미구에 심양에서 서파와 다시 만나고 있었다고 서철 옹이 말했다. 1948년 말, 서파는 대만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서파는 그때 국민당 군대의 금줄 둘에 별 네 알이 박힌 대령 견장을 달고 있었다. 대만행 비행기 티켓이 벌써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파는 진씨의 권유에 따라 심양에 남았다고 한다. 진씨는 서파가 공산당을 비밀리에 도운 일이며 친인 가운데 중공당원이 세 명이나 된다는 등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진씨는 동북구(東北區)의 공안부문에서 처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서파의 신분을 밝히는데 ‘보증서’로 될 수 있었다.

  “진씨가 비밀리에 대만으로 급파되면서 형의 경력을 증명하고 담보할 사람이 없어지게 된 거지요.” 서철 옹은 이렇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서철 옹이 둘째 형 서파를 처음 만난 시기도 대략적으로 이 무렵이었다. 폐병을 앓고 있던 서철은 심양으로 일부러 서파를 찾아오며 그의 집에 기거했던 것이다. 서파는 군부대의 지인을 통해 명의를 소개했으며 이로해서 서철 옹은 지병을 근치할 수 있었다. 이때 장장 15년 만에 만난 두 형제는 저녁이면 이마를 맞대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눴다.

  “형의 집을 떠난 후의 곡절적인 경력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잠깐 다른 데로 샌 것 같다. 서파의 매파(媒婆)이자 상급이었던 큰 인물이 빠졌기 때문이다.

  바로 김학규(金學奎)이라고 하는 인물로 현대사에 등장하는 거물이다. 훗날 김학규는 김구(金九)에게 안두희(安斗熙)를 소개했다가 그에 의해 김구가 암살되자 누명을 쓰고 투옥,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석방된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김학규는 선후로 조선혁명군 참모장, 광복군 제3지대 지대장을 역임하는 등 내외에 그 명성을 날린 유명한 반일독립운동인사이다.

  1945년 6월, 징모 6분처는 광복군 제3지대로 재편성되었다. 8월, 지대장 김학규는 서파를 남경지구 특파단장으로 임명하고 잠편(暫編) 지대를 임명하게 한다. 미구에 김학규는 임시정부에 의해 봉천(奉天, 심양)에 주화한교(駐華韓僑) 판사처 부처장으로 임명되며 아내 오광심(吳光心)과 함께 봉천으로 진출한다. 김학규 부부는 봉천이 해방군에 함락되기 전야인 1948년 4월 귀국하였다. 이 무렵 김학규는 처제 즉 오광심의 동생 오애은(吳愛恩)을 서파에게 소개하여 그들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했다.



김학규와 오광심 부부 그리고 서파.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오광심 역시 남편 김학규와 더불어 광복군에서 활약한 유명한 반일독립운동 인사이다. 그는 일찍 반일근거지인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동명(東明)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그때 오영애(吳英愛)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는 동명중학교 옛 졸업생(박관순, 신빈현 사람으로 이미 사망)의 증언이 있다. 오광심은 교직을 접고 교장 김학규를 따라 반일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래의 이름을 고친 것 같다. 오영애라는 이 이름은 오광심의 이력에는 잘 나오지 않으며, 이로 인해 오광심과 오영애가 실은 동일한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아쉬운 건 그뿐만 아니다. 주변의 인물들이 아무리 화려한들 서파의 달콤한 밀월은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3일 밤, 서파는 인민정부에 의해 비밀리에 체포되었다.

  밀산감옥의 ‘모범수’

  솔직히 지금까지 밝혀진 서파의 신분 자체는 개개가 모두 까무러칠 정도이다. 주변에 나타난 거물들은 서파에게 둘도 없는 특이한 신분을 만들고 있었다. 일본군 중좌와 직결된 사람, ‘괴뢰정부’의 요원, 국민당 당원이자 또 군부대의 대령… 그 어느 신분이든지 그때 그 시절 사형장으로 직행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나중에 서파가 이송된 곳은 동북 오지의 흑룡강성 밀산(密山)감옥이었다.

  “밀산감옥은 현성에서 200리나 떨어졌다고 합니다.” 서철 옹이 둘째 형수 오애은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때 할빈에 있던 오애은의 오빠는 교통편이 없어서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여동생의 면회를 간접적으로 막고 있었다. 결국 서파의 감옥생활은 아내 오애은이나 동생 서철 옹에게 하나의 물음표로 남고 있었다.



서파의 부인인 오애은 심양 서탑교회 원로 목사수정.

  사실상 오애은이나 서철 옹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서파의 이력은 또 하나 있다. 이 부분은 밀산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서파의 동향 사람인 신철을 통해 드러난다.

  신철은 1948년 8월 국민당 국방부 소속 중좌로 동북에 파견되었다가 해방군 장교인 동생에게 체포되어 밀산감옥에 수감된 인물이다. 신철의 일대기를 담은 책 《문화대혁명을 이긴 사람 신철》(한국, 2015)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봉천에 갔을 때 서파는 국민당 동북최고군사위원회 장관부 부관으로 있었다. 서파는 한때 국민당 군대 내의 장연(長延)민주자위군의 후근을 책임졌다고 한다. 이 민주자위군은 1947년 김학규 등이 심양에서 설립된 반공 조선인부대이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망한 후 민주자위군은 자연히 해체되며 그 참여자들은 ‘반혁명분자’로 몰리게 된다. 이때 국민당은 또 대륙에 13개의 이른바 ‘지하 구국군(救國軍)’을 조직하는데, 서파는 봉천과 무순 일대에 있는 제1지대의 촉탁(囑託)을 맡았다는 것이다.

  밀산감옥에는 서파나 신철을 비롯하여 국민당 군대에 있던 조선인 장교가 무려 10여명이나 되었다. 와중에 서파는 감옥에서 그 누구보다 ‘교화’가 비교적 잘된 인물이었다고 신철은 그의 일대기에 소상하게 적고 있다.

  “(서파는) 공산당과 오래 전부터 거래를 했고 결혼을 한 아내가 있었으므로 모범 수감자로 되어 감형을 받고 하루빨리 풀려나려는 마음으로 불타는 분이었다.”

  1962년, 서파는 마침내 감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 무렵 서파는 동생 서철 옹에게 서한을 보냈다. 하나는 그가 감옥에서 대공을 3차나 세우는 등 모범수로 되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출옥해서 돌아간 후 나쁜 영향이 미치게 된다면 아예 답신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서철 옹은 정부 부문에서 근무하면서 그 시대의 살벌한 환경 때문에 형 서파와 더는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다. 서철 옹은 이에 10여 년 앞선 1949년 국민당 장령인 서파와의 형제관계로 인해 공산당 조직에 어렵게 가입한 힘든 기억을 갖고 있었다.

  신철의 일대기의 진술에 의하면 미구에 서파는 심양(봉천은 8.15 광복 후 심양으로 다시 개명)에 가서 장모의 집에 주숙을 했고 또 장모로부터 옷과 노자를 받았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순서가 약간 바뀐 것 같다. 이 무렵 서파는 아내에게 이혼장을 받았다고 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훗날 서파는 부득불 이혼장에 수표를 해야 했다고 신철에게 말하더란다. 그가 반혁명분자이므로 무조건 동의해야 한다고 감옥의 교도관이 강박했다는 것이다.

  상기 일대기의 서술로 보면 서파는 출옥 후 심양에 잠깐 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서철 옹은 서파가 아내와 이혼을 했고 또 출옥 후 심양에 다녀갔을 수 있다는 것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심양에 살던 서파의 아내 오애은은 물론 고향 신빈에 있던 서파의 삼촌과 여동생도 그동안 서파의 심양행에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혹여 서파는 먼발치에서 친인들을 남몰래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돌아갔을까… 서파가 출옥 후 약 한 달이나 밖에 있었다고 하니 ‘공백’의 그 기간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도 나올 법한다.

  다시 찾은 사진, 그리고 풀지 못한 미스터리

  막상 그때 그 시절 서파는 가족에 미칠 나쁜 영향 때문에 일부러 친인들을 기피했더라고 해도 심양에서 만났을 사람이 하나 있었다. 심양의 ‘마당발’이라고 불리는 서파의 중국인 ‘누님’이다. 서파가 심양에서 국민당 군관으로 있을 때 그들은 혈통을 떠난 ‘오누이’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서철 옹 역시 형을 대신해 ‘문화대혁명’ 때 이 ‘누님’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등 그와 친분을 맺고 있었다.

  “형이 다녀갔다면 ‘누님’이 그때 당장은 몰라도 사후에도 그냥 함구할 리 없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오애은과 서철 옹의 형수, 시동생의 친인 관계는 계속 내밀하고 따뜻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애은은 회의 참석차 등으로 북경에 오게 되면 서철 옹과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오애은은 ‘문화대혁명’ 후 중국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첫 여성 성직자이며 심양 서탑(西塔)교회의 원로 목사이다. 그는 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3기에 걸쳐 당선된 전국위원이다.

  오애은과 잇닿은 이야기의 선은 여기서 끊어진다. 오애은은 2월(2016) 말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기자는 나중에 그의 신변에 있었던 서탑교회의 한 원로 교사와 어렵게 전화통화를 가졌지만, 교사는 오애은의 개인생활에 아예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다. 서파가 ‘이혼’을 당했는지는 끝끝내 확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분명한 건 서파가 종당에는 밀산감옥으로 돌아갔다는 것. 자청하여 죄인 아닌 죄인으로 된 것이다. 몸 하나 어디에도 의탁할 데 없었고 또 감옥이 더 안전하던 시대였다. 서파는 감옥에서 창고 보관원 겸 전공으로 있다가 2년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서파의 부고는 훗날 오애은을 통해 시동생 서철 옹에게 전달되었다.

  지난 세기 말, 중국 공안부에서 공직으로 있던 서철 옹은 일부러 밀산을 찾아갔다. 그러나 일명 ‘밀산노동교화농장’의 밀산감옥은 일찍 ‘문화대혁명’ 기간 철폐되었으며 서파의 기록서류는 일절 남아있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친 며칠 후 기자는 서철 옹을 다시 만났다. 한국 국가보훈처의 자료를 검색하다가 마침 서파의 사진을 발견했던 것이다. 형을 옛 사진에서 다시 만난 서철 옹은 정말이지 뜻밖의 보물을 건진 어린애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슬프고 우울한 기색이 하얀 햇살을 타고 백발의 노안에 내려앉고 있었다. 서파의 ‘이혼장’과 ‘심양행’ 유무가 다시 화제에 올랐던 것. 노인의 눈가의 이슬에 비낀 서파는 또 다시 희미한 얼굴의 인물로 되어 얼른거리고 있는 듯 했다.

  미상불 노인에게는 가슴을 뜯는 너무나도 잔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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