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살아가다보면 이러저러한 수없이 많은 인연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인연으로 하여 인생이 행복해질수도 있고 불행에 빠질수도있다. 나도 례외가 아니다. “길림신문” 애독자인 나와 《길림신문》의 뜻깊은 인연은 10년전부터 시작되였다.
사람이 태여나 세상일을 모르고 산다는것은 코막고 답답한 노릇이며 마치 우물안에 든 개구리 신세나 별다름 없다는 생각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려면 신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그래서 시골에 살 때부터 나는 《길림신문》을 주문하려고 했지만 내가 사는 길림시 룡담구 강북향 조가툰은 외딴 벽지여서 신문배달이 되지않아 애간장만 태웠다.
그러던중 10년전 촌교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손녀를부시키기 위해 할수없이 길림시내로 이사왔습니다. 길림시 철동으로 오자 나는 부랴부랴 우편국에 쫓아가서 《길림신문》부터 먼저 주문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이곳으로도 신문 배달이 잘 되지 않아 나는 할수없이 신문배달 주소를 학교근처 로인협회 주소로 정해 손녀딸을 데리러 갈적마다 신문을 찾아와야 했다. 특히 손녀딸 방학이면 겨울에는 춥고 길도 미끄러운데 70에 가까운 내가 하루 건너 한번씩 신문 가지러 다닌다는것은 참말 헐치 않는 일이였다. 뿐만아니라 차비도 들었다.
내가 막심한 곤난에 처했을 때 누가 이런 일을 길림신문사 길림기자소 차영국기자에게 말하면 해결할수 있다길래 나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차기자를 찾아가서 곤난한 정황을 이야기했더니 차기자가 즉시 우편국에 찾아가서 내가 앞으로 당지에서 신문을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그후부터 나는 앉은자리에서 편안하게 신문을 받아보게 되였다. 그 당시 기쁜 마음을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나는 그 기쁜 심정을 글로 써서 길림신문사에 보냈더니 신문에 글이 발표되였다.
내가 투고한 글이 신문에 발표되자 나는 우연히 나도 글을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쓸려면 문학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하루 《길림신문》을 보니 길림시에서 “문학사랑애호자협회”가 설립된다는 기사가 실렸다. 원래 문학에 취미가 있는지라 나의 심정은 가물의 비를 만난듯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나는 차기자의 소개로 이 조직에 가입했다. 문학사랑회에 들었더니 작가분들까지 있어 문학공부를 하는 좋은 학교였다. 나는 그분들께 열심히 배우고 자체로 문장도 써보았다. 나는 기회를 잘 만나는 바람에 문장 쓰는것을 조금 배우게 되였다.
어느날 《길림신문》을 보니 “인성교육 공모”를 한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 당시 나는 무슨 마음을 먹었던지 공모전에 한번 참가해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문장을 하나 써서 투고했더니 생각밖으로 당선되여 우수상까지 받게 되였다. 수상식에 참가하던 날 나의 기쁨 심정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나도 글을 써 낼수 있다는 신심이 가득 생겼다.
“문학사랑애호자협회”에 들었지만 한낱 가방끈이 짧은 농민출신인 나로서 문학을 한다는것은 생각밖으로 뻐근한 일이였다. 그러나 노력하면 성공 할수 있다는 신념만은 저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금년에 “대미문화상” 공모에 참가했는데 작품이 《청년생활》잡지에 실렸다. 자신의 보잘것 없는 수준으로 큰 상은 받지 못했지만 자부심과 용기만은 가지게 되였다.
《길림신문》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문학사랑회가 설립된것도 몰랐을것이며 더군다나 공모전에도 참가하지 못했을것은 물본듯 뻔한 일이다. 나는 원고비 받은 돈에다 헌 신문을 수구점에 판 돈을 보태여 신문을 주문했다.그랬더니 마치 길림신문을 공짜로 받아보는 듯 했다. 《길림신문》을 받아보는 바람에 나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 량면으로 덕을 보게 되니 정말 꿩먹고 알먹고 둥지 틀어 불까지 땐 셈이다.
한낱 평범한 농민인 나로서 잡지사에 글을 써 발표하게 된것은 전적으로 《길림신문》을 받아본 덕택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해마다 《길림신문》 만은 꼭 받아 볼 예정이다.
/길림 양상태
편집/기자: [ 차영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