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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뇌종양환자가 꿈꾸는 무지개 인생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6.08.23일 14:42

류계화씨의 행복한 가족사진

비온 뒤에 솟아나는 칠색무지개는

사는 동안 짧다 해도 눈부시게 어여쁘네

한백년을 살다 가는 우리네 인생도

세월의 하늘에서 한순간의 무지개...

내가 평소에 제일 즐겨 부르는 "무지개 인생"이다. 이 노래는 나를 항상 힘내라고 고무해주고있다.

나는 올해 42살에 나는 다발성 뇌종양환자이다.

2004년 11월 22일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나는 평소에 두통과 삼차신경통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돈도 잘 버는 조선관광가이드라 휴식날이면 링게르를 맞으며 일을 견지했다.

젊으니깐 괜찮다...이렇게 혼자 위안하며 가이드로 손님들을 이끌고 조선관광을 다녔다.

그날도 너무 두통이 심하고 삼차신경이 아파 밥도 먹을수 없는 나를 남편이 연변중서의병원으로 끌었다. 아픈 증상이 일년도 넘었고 여러 병원을 돌아다녀도 정확한 진단을 낼수가 없었다. 삼차신경으로 진단 받고 얼굴에, 머리에, 귀뒤에 아픈 침은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이발신경통으로 오해하고 성한 어금이까지 뽑았다.

그때 나는 귀뒤에 닭알만한 혹이 튕겨나왔다. 큰 병원의 의사마저 그 귀뒤의 혹이 염증으로 인한 고름덩어리라며 문진수술로 긁어내자는 제안도 했다. 그냥 간단한 일로 상상도 못해본 나에게 이런 벼락이 날아오다니?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삼차신경통인줄로 알고 그날도 신경내과를 찾아갔다.나의 진짜 생명의 은인이신 김영수주임이 나에게 연변종양병원에 가서 머리를 CT촬영해보라며 병력지를 작성해줬다. 그때 이미 삼차신경통으로 그분의 초약을 30첩이나 먹었다. 그래도 나은 기미가 없으니 선생님은 시원히 검사하고 그냥 삼차신경통때문이라면 꼭 치료할수 있다며 장담을 하셨다.

그 많은 환자들이 CT촬영을 하면 오후에 찾으러 오라고 알려주었지만 오로지 나만 찍은 즉시로 달려나와 내 이름을 부르며 의사판공실로 가잔다.

내 뇌속에 종양이 있다니...머리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줄 그때 알았다. 그렇게 나는 사흘전까지 조선도 다녀왔는데 걸어서 병원 갔다가 남편한테 질질 끌리다싶이 해 상세한 진단촬영을 하려고 연변병원에 갔다.

기계가 더 선진적이니 내 머리속의 종양개수만 늘어난것 같다. 여러차례 검사 결과 내 머리속에 종양이 6개나 있었다. 제일 큰건 5센치이고 콩알만한것도 있었는데 사진을 보니 너무 충격적이였다.

사처에 흰점이 가득했는데 그 흰점은 다 나의 종양이였다.

그때 내 나이 31살이였다.

병원 의사들이 남편 보고 집 있으면 팔아서 북경 천단병원에 가라고 권유했는데 치료비가 그때 돈으로 30만원은 들거라 알려줬다. 하지만 세집살이하는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두달밖에 못 산다는 사형판결을 받은 나에게 누가 언제 돌려받을지도 모를 돈을 꾸어줄것인가?!

나의 뇌종양은 귀신경, 시신경에 붙어있어 근본 수술을 할수도 없었다. 그대로 목숨만 구한다면 종신으로 누워있는 식물인이 될수 밖에 없다고 했다.

북경에 갈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처한 나에게 병원에서 길림화공병원을 소개하고 편지까지 써주었다.

최신첨단기술 컴퓨터로 수술 받으려고 길림화공병원에 실오리 같은 희망을 안고 갔는데 컴퓨터로 수술한다고 해도 눈이 실명된단다. 나는 그때는 5개월도 대단한줄로 여기고 5달만 더 살게 해달라고 의사의 팔에 매달렸다.

돈을 잘 벌 때라 몇달이라도 벌어서 아직 철부지인 6살 아들에게 얼마라도 돈을 남겨놓고싶었다. 의사는 과학이 못하는 일은 의사로서도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면서 남편에게 내가 먹고싶은것, 하고싶은것을 다 해주라며 당부했다.

2004년 11월 22일에 종양진단을 받고나서 닥쳐오는 설을 못 쇤다는 폭탄선고를 받았다.

울면서 병원문을 나서니 하늘의 구름이 어데론가 날려가고 왜 이 넓은 땅에서 내가 밟을 땅이 없는지 하늘을 원망하며 가슴으로 통곡했다.

사람들은 흔히 살기 힘들면 죽었으면 편안하겠다는 타령을 곧잘 하군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진짜 죽는단 소릴 들었을 때 나는 너무 억울했다.왜? 왜? 왜 하필 나에게?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가 말이다.

그래도 자식때문에 꼭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렸다.때는 한창 겨울이라 약 끓이느라 뜨거운 김에 주방이 습기로 가득 차서 벽에 붙어있던 타일이 떨어지고 천정도 다 나려앉는 바람에 우리는 세집에서까지 쫓겨났다.

엎친데 덮친 격이래야 하나...

고가의 항암치료약도 먹었고 항암치료도 받았다. 먹은 약은 트럭에 넘치고 상해, 북경,장춘 심지어 시골 농촌까지 용하다는 의사를 다 찾아다녔다. 그만큼 살겠다고 이를 악물고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하늘이 주신 나의 십년인 2014년 11월 22일, 이날이 천당과 지옥을 넘게 한 내 인생의 중요한 날이 될줄이야.

2014년 11월 22일, 딱친구가 월급이 올랐다고 저녁에 양꼬치를 먹자고 문자가 왔다.나도 요즘 부담도 없고 친구의 신랑도 출장가고 오랜만에 회식하자는 친구와 같이 기껏 먹고 집에 왔다.

워낙 우리 집에서 자려던 친구는 친구 아들 전화에 집에 가고 택시로 우리 집 문앞까지 나를 바래다주고 서로 잘 가라 인사하며 갈라졌다.

나는 불과 5,6메터 걸으면 집에 도착할수 있었다.

아버지가 요즘 안 계셔 친정엄마가 우리 집에 계신다. 딸을 기다리시느라 주방불까지 환히 켜놓으셨다.

기분좋 게 집에 들어가려다 나는 그만 쇼크해버렸다. 바로 집문앞에서 말이다.

겨울이지만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였다. 문앞에서 한시간은 누워있었던걸로 생각된다.

어슴푸레 정신이 들 때 마침 이웃집에서 웬 남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나가려고 내 눈앞에 얼른거려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나를 보던 그 남자는 주춤하더니 오토바이를 쌩 몰고 그냥 가버렸다.

저녁 8시도 안된지라 이웃을 싣고 택시가 오고있었다. 나는 택시를 보며 죽어라 손을 흔들었다.택시에서 내린 한족부부도 애를 안고 내가 소리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들어가버렸고 택시도 부르릉 사라져버렸다.

너무나 억울하여 눈물이 쏟아졌다. 불과 몇발작앞이 나의 보금자린데... 흑흑...내가 왜 오늘은 전화도 안 가지고 나와서...엉엉

엄마를 소리쳐 불러도 어떻게 들을가? 나는 이대로 있다가 그저 죽을순 없지...내 아들 며칠후면 오는데...사랑하는 내 아들, 남편이 며칠후면 오는데...가족을 생각하면서 엎디여 기였다...울면서 엄마를 속으로 부르며 내가 기고있는데 아까 옆단원에 들어가던 젊은 녀자가 달려나와 나를 부축해 집에 데려다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이웃때문에 다행히 나는 집에 들어올수 있게 되였다.

어느 책에나 뇌종양은 오래 살아 십년이란다.아무리 과학적인 소리라도 나는 믿지도 않고 그냥 대수롭잖게 넘겼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머리가 그토록 터질듯이 아파서 엄마가 예방으로 드시는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해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 4시가 되니 자동으로 일어났다. 집안에서 러닝머신도 하고 보건자전거도 타면서 운동을 마쳤다.아침 먹고 지난날 쓴 일기를 보니 어제 밤이 꼭 십년전 뇌종양 판정을 받은 날이였다.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십년밖에 못 산다는 말을 명심하고 감격하라고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경종같다.

얼마 살지 못할거라던 내가 지금도 살아있어 오진이라 여기는분들도 많다.여기 큰 병원에 가면 복사도 거절당한다. 아픈 몸으로 뻐스에 앉아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80세 할머님께 욕을 먹을만큼 건강해졌지만 뇌종양은 시도 때도 없이 쇼크를 잘해서 그뒤로는 택시에만 앉아다닌다.

혼자 가정 떠메고 고생한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기에,산처럼 든든한 나의 지원군 부모님이 계셨기에,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보석 같은 아들이 있었기에,언제나 내 곁에서 내 눈물 닦아주는 친구가 있었기에,나를 사랑하고 관심하는 형제와 유정한 주변사람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나는 드라마같은 인생을 울고 웃으며 살아났다.

가로등도 꺼지지 않은 새벽길에 나를 붙잡고 운동시키던 산같은 아버지 사랑, 딸을 어떻게 하나 살려내겠다고 눈물을 훔치며 뜬김에 주방타일이 다 떨어지도록 약을 달여준 바다 같은 엄마 사랑, 혼자서 12년 동안이나 가정부담을 말없이 짊어지고 상해에서 가이드일을 하는 남편의 불사조 같은 사랑, 엄마의 병이 낫기만을 바라면서 착하고 우수하게 커준 토끼 같은 아들 위강이...형제자매들과 지인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으면서 나는 오늘까지 12년째 암병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고있다.

기적은 누구에게나 생기는것은 아니라고 본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바라는자, 구하는자, 노력하는자에게만 생긴다. 12년 동안 남들 다 자는 새벽부터 운동을 하고 건강식단을 부단히 바꾸면서 정말 악착같이 살아왔다. 그 긴 눈물의 투병사를 헤쳐나오니 웃을 일도 많다. 6년전 상해 화산병원에서 검사 받은 결과 6개의 종양이 3개로 줄어들었단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6세밖에 안되던 철부지 아들은 이젠 17살이 되여 대련모델예술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의 유일한 조선족으로 학교무대에서 리더로 활약한다. 세집살이에 힘들었던 우리 집은 지금 상해에까지 아빠트를 사놨다. 울기만 하던 연약한 나도 인젠 모든 일에 웃으며 대처할수 있는 아줌마로 되고 남편은 하는 일마다 잘되여 골프도 치며 멋지게 산다.

나는 8년전부터 뇌종양이 귀신경을 막아 듣지도 못한다. 자기가 아파봐야 타인의 아픔도 아는 법이다. 불치병에 걸린 환우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될것 같아서 나는 지금 건강상담소도 개업했다. 살아있는 한 불우한 이웃돕기를 계속해 나갈것이다.

/류계화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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