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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을 새 마을] 박물관에 소장된 한족 박씨의 비사(秘事)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7.07.18일 14:33
박씨 마을의 이 이야기는 첫 대목부터 뎅강 잘려나가고 있었다. 옛 마을을 개척한 선조가 운무속의 흐릿한 인물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12대손인 박계전(朴桂全) 씨의 기억에는 선조의 이름자를 읽을 수 없었다.

“글쎄요, 우리 박씨가 어느 할아버지 때 이 고장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후세의 어느 날인가 나타날 불상사를 미리 읽었던 것 같다. 박씨의 선조는 그의 형상을 화판이 아닌 나무로 마을에 심어놓았다. 지금 마을 귀퉁이에는 그가 심었다고 하는 느릅나무 한대가 소소리 높이 자라고 있었다. 느릅나무가 문득 나타난 이 마을은 그때부터 선조의 성씨를 따서 박가툰(朴家屯)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가게에서 한족 족명의 신분증을 보이고 있는 박계전씨

박씨의 옛 흔적은 나이를 먹은 오랜 느릅나무뿐만 아니었다. 또 지방문헌에 문자로 남고 있었다. 박씨의 선조는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에 이곳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촌락을 세웠다고 옛 《서란현지명지(舒蘭縣地名志)》가 기록하고 있었다. 그럴 법 했다. 청(淸)나라 말의 광서(光緖, 1871~1908) 연간부터 중국의 동북 일대에는 조선인 간민(墾民)이 대량 이주하고 있었다. 이 무렵 많은 박씨들이 서란현을 비롯한 길림성 그리고 이웃한 흑룡강성의 여러 지역에 안착하고 있었다.

잠깐, 지명지에 따르면 박가툰의 박씨는 전부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실제로 박계전 씨의 신분증에는 그의 족명(族名)이 한족이라고 명백히 적혀 있었다. 박계전 씨는 물론 가게에 들린 동네의 박씨 노인도 토박이 중국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옷차림이나 주거 습관이 모두 현지의 한족과 다름없었다.

처음 보고 듣는 유별난 사건이었다. 정말이지 누구라도 한순간 어리둥절할 것 같다. “뭐가 잘못 된 게 아닌가요? 한족의 백가성(百家姓)에는 박씨가 없는데요.”

마을 어귀의 옛 느릅나무, 박씨 선조가 박가툰을 세울 때 심었다고 전한다.

박씨는 조선반도의 고유의 성씨로서 신라의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가툰 박씨의 선인(先人) 역시 옛날에는 조선반도에서 살았다고 가문에 구전하고 있었다.

“우리의 시조는 한국(신라)의 국왕(시조왕)인 박씨라고 하던데요.” 박계전 씨가 곱씹듯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박계전 씨는 시조왕인 ‘박혁거세’의 이름자를 모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글을 한 글자도 읽지 못했고 우리말을 한 마디도 외우지 못했다. 어찌됐거나 박계전 씨의 선조는 분명히 한족이 아니었다고 연변 민속학자들이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1984년 특별히 박가툰을 찾아와서 박씨의 가계(家系)를 조사했었다.

워낙 박가툰의 박씨는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부근의 박보(朴堡) 일대에서 살았으며 훗날 서란현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박보 역시 박씨 사람들로 동네를 이룬 옛 박씨 마을이다. 박보 박씨의 이민 역사는 근대의 민국시기가 아니며 최소 명(明)나라 말의 후금(後金)까지 이어진다. 그때 박씨는 후금과 조선 사이에 일어난 전투에서 포로로 되었다고 한다. 또 전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박씨 등 조선인(고려인)이 압록강을 건너 대륙에서 살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박계전 씨가 예전에 귀동냥했던 동네 박씨 노인들의 이야기는 그 어느 전쟁터의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 박씨의 선인은 옛날의 어느 전투에서 박씨 형제와 흩어졌다고 합니다.”

박가툰의 구전에 따르면 박씨의 선조는 예전에 만주 8기의 일원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씨를 망라하여 동북에 살던 조선인의 42개 성씨가 만주 8기에 귀부(歸附), 편입되었다. 후금의 천총(天總, 1627~1636) 연간과 청나라 초에 생긴 일이었다.

박씨가 박보 마을을 떠나 길림(吉林) 서쪽 서란 귀퉁이의 소성진(小城鎭)에 이주한 내력은 아직도 불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박씨가 그들이 소속한 만주 8기의 만족 지명을 따라 북상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렷다. 공교롭게도《길림통지(通志)》에 따르면 길림은 길림우라(烏拉)의 약칭인데, 길림은 만족어로 따를 연(沿), 우라는 큰 내 강이라는 의미이니 길림우라는 강가에 늘여 있는 땅을 말한다. 서란 역시 만족어로 만든 말이며 열매를 의미한다고 《길림지지(吉林地志)》가 해석하고 있다. 이 지방문헌에 따르면 청나라 때 서란의 경내에서 산사(山査) 열매를 공물로 채집했다.

물만두를 빚고 있는 박씨 촌민, 조선족 풍속의 음식을 만들줄 아는 박씨는 더는 없다.

박씨 선조가 처음으로 서란에 나타난 것도 실은 청나라 초였다고 한다. 그는 일찍 강희(康熙, 1662~1722) 연간 서란의 소성진에 행장을 풀었다. 연변의 민속학자들이 박가툰에서 발견한 박씨의 가첩(家牒)에서 읽은 내용이다. 실제 박씨의 선조가 마을 어귀에 심었다고 전하는 느릅나무의 수령과 비슷한 시기에 맞먹는다.

그런데 서란의 지방문헌은 왜서 박가툰이 민국 초년에 생긴 마을이라고 기록했을까…

기실 ‘민국 초년’이 박가툰의 연대기에 나타나는 사건은 따로 있었다. 그 무렵, 박씨의 선인(先人)은 그의 선조와 가족 관계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집안의 가계(家系)를 밝힌 가첩(家牒)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첩은 촌민 박귀삼(朴貴森) 집안의 선조 8대 가족의 이름과 친족관계를 밝혔다.

박귀삼이 보존한 박씨 집안의 이 계보(系譜)는 박가툰의 유일한 개인족보이다. 가첩은 제1세대의 선조를 선태고조(先太高祖)로 칭하고 3명을 열거했으며 제2대는 선증조(先曾祖)로 칭하고 3명을 열거, 제3대는 고증조(高曾祖)로 10명, 제4대는 고조로 14명, 제5대는 증조로 17명, 제6대는 조부로 11명, 제7대는 백부로 4명, 제8대는 3명을 열거하고 있었다. 박씨 혈통의 8대 인물은 도합 65명이었으며 이름 뒤에 또 각자 아내의 성씨를 주해(註解)로 달았다. 이 아내의 성씨에는 하나같이 박씨 성씨가 없었다. 동성 친척은 통혼하지 않는다는 옛 습속은 역대로 여느 박씨든지 모두 엄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첩마다 엄수한 건 또 있었다. 세대마다 이름에 항렬의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세대의 첫 이름자는 제1대가 응할 응(應), 제2대가 하늘 천(天) 등으로 각자 동일했으며 조선인의 관습과 같았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박씨 족보와 가첩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제1대부터 제11대까지 박가툰과 박보 두 마을 박씨는 항렬의 돌림자를 판박이처럼 옮기고 있다. 참고로 길림성의 송원(松原) 등 일대에도 이 돌림자를 쓰고 있는 박씨가 있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박씨는 나뭇가지처럼 여러 곳에 분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 계보의 이 항렬 돌림자는 제12대부터 새로 지었다고 본계시 산성자(山城子)의 박명범(朴明範) 씨가 증언하고 있다. 박명범 씨는 본계시 박씨 계보의 전승자이며 제12대손의 돌림자인 밝을 명(明)자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박가툰에서 제12대손은 박계전처럼 계수나무 계(桂)의 돌림자를 쓰고 있었으며 더는 본계 박씨 마을의 항렬 돌림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박가툰 박씨에게 돌림자가 없어진 게 아니라고 박계전 씨가 거듭 말했다. “13대는 겨울 동(冬)을 돌림자로 쓰는데요, 저의 세 딸도 이름에 모두 이 돌림자를 넣었지요.”

백지 한 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으로 벌어질 수 있다. 세대마다 돌림자가 같지만 실은 서로 다른 집안이었다. 종국적으로 박보의 박씨는 족명이 조선족으로 되었고, 박가툰의 박씨는 족명이 한족으로 되었다.

사실상 박씨의 예전의 족명은 분명 조선족이 아니며 또 한족도 아니다. 박씨는 예전에 만족이라고 자칭했으며 또 만족의 풍습을 따르고 있었다고 박보의 박씨 계보가 밝힌다. 이 계보는 머리에 다섯 신두(神頭)를 모시고 있는데, 만족의 신두인 화신(火神), 호신(虎神), 낭낭신(娘娘神), 나으리신(老爺神), 오도신(五道神)이었다.

1950년대 초, 박보의 박씨는 박가툰의 박씨와 마찬가지로 모두 한족으로 등록되었다. 이때 언어나 풍속 등이 벌써 한족으로 동화된 박씨들은 그렇다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한 게 아니었다.

옛 박씨 족보

“예전에는 또 민족의 차별대우가 두려웠던 거죠. 그리고 최초에는 족명을 조선족으로 회복해도 특혜가 있는 게 아니었죠.”

박씨의 최초의 신분이 한족으로 등록된 원인을 누군가 이렇게 한마디로 밝힌다. 공화국 창건(1949) 전, 민족 차별대우와 민족 압박의 정책으로 인해 공인된 많은 민족은 한족의 분파라고 거짓 주장하고 오랜 기간 자기의 족명을 은닉, 개명했다. 1982년,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가 진행된 후 중국에서 민족 족명을 회복, 개명한 사람은 단번에 260만 명이나 되었다.

박씨가 조선인 후예라고 요녕성 본계 정부에 공식 인정된 것은 1983년이었다. 이때 조선족 사학자들의 노력으로 박보 대대(大隊, 촌)의 박씨를 조선족으로 회복할 데 대한 산성자(山城子) 인민공사(公社, 향)의 보고서가 상부에 회부되었다. 이듬해 본계의 여러 집거, 혹은 잡거 마을의 박씨는 통일적으로 ‘조선족’으로 민족 족명을 개명했다.

연변의 민속학자들이 이웃한 박가툰을 찾아 조사를 진행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박가툰에는 그때까지 많은 조선인의 옛 풍속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찰떡을 칠 줄 알았고 막걸리를 거를 줄 알았다. 마을에는 또 정월 보름날에 오곡밥을 먹고 동짓날에 팥죽을 먹던 세속 습관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우리 집안에 찰떡을 치는 돌구유가 있었지요, 나무로 만든 메도 있었다는데요.” 박계전 씨는 이렇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불과 30년 후의 오늘날 벌써 할아버지가 화롯가에 곰방대를 털던 옛날의 이야기로 되고 있었다. 마을의 박씨는 더는 찰떡이나 막걸리를 만들 줄 모르고 있었고 또 오곡밥이나 팥죽이 뭔지 모르고 있다고 한다. 박계전 씨의 집안에 보존하고 있던 돌구유도 언제인가 종적을 감추고 있었다.

조선족으로 개명할 것을 정부에 청구한 북경 한족 박씨의 편지


몇 년 전 박가툰의 박씨는 비로소 서란시 정부에 직접 가서 조선족으로 회복, 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인제 ‘조선족’으로 회복, 개명하기는 어렵다는 대답뿐이었다.

“우리 박가툰에는 박씨가 약 50가구의 200명 정도나 됩니다. 호적(戶籍) 데이터가 전산화 되었다는데요, 우리 신분을 조선족으로 개명하는 게 그처럼 힘든 작업일까요?”

박가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1984년, 연변의 민속학자들은 벙어리인 박귀삼과 어렵게 얘기를 나누고 가첩을 수집, 연변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종국적으로 벙어리의 냉가슴을 앓게 된 것은 박가툰의 박씨이었다.

“결국 우리가 주인의 신분을 잃은 거죠. 가첩의 원본을 더는 찾아갈 수 없다고 해요.”

박계전 씨의 말에 따르면 박가툰의 가첩은 이미 연변박물관 민속 문물재의 명단에 게재한 소장품으로 되었다는 것.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의 박씨의 이주 사실(史實)을 실증하고 중국 조선족 이민사의 상한선(上限線)을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史料)였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이 가첩의 복사물을 얻는 자체마저 쉽지 않았다. 그날 우리 일행은 가첩의 내용을 읽고자 일부러 연변박물관을 찾았는데, 미리 박물관의 지인을 통했지만 관리자는 신분증과 증건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등록했으며 또 신분증 사진을 촬영하여 증거물로 기록하고 있었다.

정작 뒷맛을 씁쓸하게 한 건 일행의 뒤를 따라 날아온 박계전 씨의 전화소식이었다. 그의 입국비자 신청은 방문목적이 불명하다는 이유로 한국 영사관에 거부당했다고 한다. 박씨 시조의 땅을 밟고자 박계전 씨가 내내 가슴에 지펴 올렸던 불씨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꺼지고 있었다.*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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