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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5] 신라촌의 옛 문자에 숨겨진 천년의 미스터리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12.25일 10:54
(흑룡강신문=하얼빈) 정말이지 마을의 수호신이라고 하는 장승(長丞)을 머리에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집채만큼 큰 거석이 마치 돌사자처럼 마을 어귀에 웅크리고 있었다. 뒷이야기이지만, 마을 노인들은 이 거석을 '풍수석(風水石)'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천주(泉州)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10㎞여 상거한 이 자연부락은 '신라촌'이라고 불린다. 이름 그대로 옛날 신라인들이 살던 곳으로, 중국에 있던 신라 유민과 반도의 신라인들이 유입되어 생긴 천년 역사의 마을이라고 한다.

  당(唐)나라 때 대륙 연안에는 신라마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천년 후에도 이처럼 옛 이름 으로 불리고 있는 마을은 천주의 이 '신라촌'이 유일한 걸로 알려지고 있다.

  장승이 기운을 잃었는지 아니면 풍수석이 영기(靈氣)를 상실했는지 모른다. 마을에는 신라인들이 언제인가 종적을 감추고 말짱 왕씨 성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왕씨의 선조는 반도의 신라인이 아니라 600여 년 전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왕씨의 족보가 밝히고 있다.



동네 어귀의 풍수석 부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노인, 왼쪽 노인이 왕배원이다.

"선조님들이 오시기 전에도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지요." 왕배원(王培元, 76)은 이렇게 노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왕배원은 마을의 토박이인데, 시골 사람치고는 드물게 명함을 갖고 있었다. 현지에서 꽤나 이름 있는 종이공예 예술가라고 한다. 다른 노인과 합심하여 마을의 문화재를 수집하여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촌사(村史)'에 남달리 해박한 사람이었다.

  언제인가 신라촌에서 신라인들은 소실되었지만, 그렇다고 이 고장에 인적이 끊어진 게 아니었다. 개간자들이 연속부절하게 찾아들었고 황무지를 개간했다. 와중에 대여섯 가구의 왕씨가 와서 보습을 박았으며 미구에 300여 가구의 2천여 명 인구로 덩치를 불렸던 것이다.

  옛날의 지명과 이야기들이 현지에 불씨처럼 남아있는 연유가 따로 있었다.



풍수석에 새겨진 옛글자, 오곡이 풍성하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기실 '장승'의 풍수석도 여전히 영험함을 잃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왕씨의 말에 따르면 풍수석은 원체 사람 두 키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도로를 닦으면서 반나마 매몰되어 지금의 '난쟁이'로 되었다는 것이다. 풍수석이 흙에 묻히던 그해 마을에는 난데없는 횡액이 들이닥쳤다. 벼락을 맞거나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등 사건으로 주검이 졸지에 여럿이나 생겼다. 이 때문에 풍수석은 마을 사람들이 경외시하는 '성물(聖物)'로 되었으며 누구도 함부로 다치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튼 '전위화복'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렷다. 풍수석에 각인된 천년 전의 옛 글자는 마을에 일어난 난데없는 풍파 때문에 오히려 훼손의 액운을 피할 수 있었다.

  왕씨는 말을 하다말고 문득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어릴 때 놀음을 즐기다가 늘 여기에 뛰어와서 비를 끊었지요."

  그러고 보니 풍수석의 머리 부분은 지붕의 추녀처럼 밖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옛 글자가 비에 젖어 훼손되는 걸 막아주고 있었다. 정말로 풍수석이 그 뭔가의 영험한 기운으로 선인(先人)들의 참모습을 수호하고 있을까…

  "풍년이 들길 기원하는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글로 해석하지요." 왕씨는 바위에 새겨진 글을 한 글자씩 짚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옛 글자에는 다섯 오(五)의 글자가 있었고 또 곡식 곡(穀)의 갑골(甲骨)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땅에서 초목이 무성히 자라는 모양을 본뜬 글자가 있었다. 오곡이 풍성하다는 의미의 '오곡풍등(五穀豐登)'이라는 중국말 성구가 저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불과 다섯 개의 옛 글자였지만 전부의 해독이 가능한 게 아니었다. 첫 글자는 집 모양의 글자로 되어 있었는데, 이 글자를 글의 내용과 잇고 붙여서 사당 비슷한 장소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갑골문은 상(商)나라 시기의 문화 산물로 약 3,6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상(商)나라 때 귀신을 미신하고 그 무슨 일에 앞서 늘 거북이의 껍데기나 짐승의 뼈로 길흉을 점쳤다. 나중에 거부기의 껍데기에 복사(卜辭)거나 행사 과정을 기록했는데, 그 문자를 갑골문이라고 한다. 청나라 말,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의 옛터에서 문자가 새겨진 갑골을 발견한 후 지난 100년 동안 출토된 갑골의 수량은 15만점 이상 된다. 발굴된 갑골문의 단자(單字)는 약 5천 개 되지만, 이 중에서 식별과 해석이 가능한 것으로 공인된 문자는 단 1천여 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마을의 표지석인 풍수석에 상나라의 갑골문이 나타나는 게 정말 흥미롭다. 사실상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옛 글자에 숨겨진 의미가 아닐지 한다.

  마지막 글자는 제단을 의미하는 보일 시(示)와 하늘 향해 두 손을 쳐든 사람의 형상의 합체로 이뤄지고 있다. 글자 자체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미가 강하며, 모양새로 미뤄 하늘 현(祆)으로 풀이할 수 있었다.



천주에 있는 경교 비석의 모습. 맨 위에 십자가 문양이 있다.

현(祆)은 종교에서만 나오는 글자로 현교(天敎)를 뜻한다. 예언자로 불리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현교의 유일신 사상 그리고 선악과 악의 원리로 설명하는 세계관 등은 훗날 불교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교는 중국에서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힌다.

  현교가 중국에 유입된 것은 당나라 전기와 중기로, 여러 종교가 모두 존숭(尊崇)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중국 대륙에 왔던 이국의 호승(胡僧) 가운데는 현교의 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장안과 낙양에는 모두 현교의 사당(祠堂)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찰 옛터, 마을의 건물에 묻혀있다.

당나라 때 현교 사당은 호인(胡人)이 복을 기원하는 장소였다. 조정은 자국 국민의 현교 신앙을 금지했다.

  그러나 현교가 이민족의 신라마을에 전포(傳布) 되어 그들의 종교 신앙으로 되었다면 예외일 수 있다. 실제로 현교는 물밑 전포를 통해 대륙 각 지역에 적지 않은 신도를 갖고 있었다. 중국 사상 제일 복잡하고 신비한 종교로 일컫는 백련교(白蓮敎)도 실은 현교의 변종이라고 전한다.

  시초부터 천주의 신라인들에게 현교가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더구나 천주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사절, 항해사, 상인들이 운집했으며 또 여러 종교의 수도자들이 한데 어울렸다. 불교는 물론 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천주교, 경교 등 종교 유적지가 아직도 현지에 남아있다. 세계의 종교박물관으로 불리는 천주에 현교의 출현은 당연지사였다. 이상하다고 한다면 현교의 흔적이 단지 신라마을에만 나타난 것이다.



신라소학교 옛터, 어린이들의 글읽는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는다.

현교 사당은 당나라 후의 송(宋)나라 때에도 잔존했다. 그 후부터 중국의 문헌에서 현교라는 이름 자체가 갈수록 희미해진다. 현교 배경의 봉기거나 반란이 여러 번 일어나면서 역대 조대의 우환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현교 사당이 철거, 훼손되었고 제사장들은 환속을 해야 했다. 천주의 박물관에 유독 현교 유물이라곤 없는 영문은 여기에 있지 않을지 한다.

  종당에는 이 현교가 마을에 재화를 불러 온 듯하다. 신라촌에는 '참대 숲의 미궁' 같은 미스터리의 사건이 일어난다. 관부(官府)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참대 숲에 숨은 승려를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옛날부터 마을에 야담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신라마을에는 야화상(野和尙)이 출몰했다고 한다. 야화상은 승적이 없거나 불가의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승려를 말한다.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승려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교 승려라는 얘기이다. 이 야화상은 사찰의 주변에 많은 땅굴을 만들고 또 많은 참대나무를 심어 땅굴을 숨겼다고 한다. '참대 숲의 미궁'을 만든 것. 관부의 군사는 야화상의 종적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종국적으로 참대 숲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도대체 언제 일어났는지는 잘 모른다. 마을에서는 다만 사찰의 후기에 있은 일이라고만 전한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찰은 불교사원인 '신라선사(新羅禪寺)'를 이르는 말이다. 옛날 신라인들이 살던 마을에는 이처럼 모두 사찰이 있었다. 사찰은 이역에서 사는 신라인들의 구심점이요, 안락처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화상이 관부에 쫓긴 사건은 폐불(廢佛) 때의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왕씨가 안내 도중에 이렇게 문의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왕씨가 말하는 것은 당나라 회창(會昌, 841~846) 연간 불교를 금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라선사는 신라촌이 생겨났던 당나라 때 설립된 것으로, 사찰의 후기라고 하면 적어도 당나라의 후대(後代)로 봐야 한다. 실제로 5대10국(五代十國)의 주세종(周世宗) 때 또 한 번 폐불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라 사찰은 수백 년을 존속한 고찰로 전하며, 야화상의 땅굴은 시기적으로 이런 폐불 사건과 맥락을 한데 잇기 힘들다.

  천년 마을의 미스터리는 적지 않았다. 왕씨의 이야기에는 물음부호가 자주 엉겅퀴처럼 매달리고 있었다.그러나 정답은 '참대 숲의 미궁'에 숨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을에는 서쪽의 정포산(正埔山) 기슭까지 농가가 겨끔내기로 일떠서고 있었다. 사찰 옛터의 언덕에도 언제인가부터 새 농가가 서있었다. 이 농가를 지을 때 귀 달린 석조 향로, 연꽃 대좌(臺座) 등 사찰의 옛 유물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찰의 유물은 마을의 문화재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전시관은 옛 신라소학교 건물을 이용한 것이었다. '신라소학교'라니 귀가 솔깃한 이름이었지만, 건물의 지붕위에 달린 방송 나팔은 더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합병되면서 폐교되었고 '신라소학교'라는 이름도 역사로 된 것이다.

  이때 따라 옛날 옛적에 나팔처럼 울렸을 사찰의 종소리가 새삼스레 옛 기억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신라마을은 물론이요, 부근 10여개의 마을에서 기상과 취침 그리고 밥 먹고 일하는 시간까지 사찰의 종소리에 맞춰졌다고 한다.



해상 실크로드에서 항행하던 옛 배의 모형.

'선원(禪院)의 만종(晩鐘)'은 신라마을 8경의 하나로 되고 있었다. '쌍계(雙溪)의 돛'도 마찬가지였다. 쌍계는 진강(晉江) 상류의 동쪽과 서쪽 두 지류가 합류하는 쌍계구(雙溪口)를 말한다. 진강은 천주 남쪽에서 바다에 흘러드는데 천주의 제일 큰 강이다. 옛날 선박들은 진강을 따라 신라촌 서북쪽의 쌍계구에서 집결한 후 먼 바다로 떠났다고 한다. 기실 쌍계구가 바로 해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신라촌 동남쪽의 구일산(九日山)은 또 관가에서 외국 상선을 마중하고 배웅하던 곳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도의 신라로 통한 항구는 대륙의 신라마을에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또 하나 있었다. 자연부락 신라촌이 소속된 선하촌(仙河村)은 산을 기대고 있으며 삼면이 진강에 둘려 있다. 물과 산이 한데 어울린 아름다운 풍경으로 하여 신선의 강이라는 의미의 '선하(仙河)'라는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신선 마을의 풍경이 결국 신라인들의 발길을 끌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왕씨가 자랑하는 선하촌의 전설에는 또 황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진(晉)나라의 어느 황제가 난을 피해 이 고장에 숨어 살면서 보물을 숨겼다고 전하지요."

  진실인지 거짓인지 언뜻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진강은 4세기 무렵 진(晉)나라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 강 연안에 살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구일산도 이 진나라 사람들이 해마다 9월 9일이면 산정에 올라 북쪽의 먼 고향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신라마을의 신라인들도 가끔 구일산에 올라서 해가 떠오르는 반도의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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