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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락연을 맘속에 품고있는 세 녀인의 고백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27일 14:50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조성된 아담지고 정갈한 락연공원.

우리가 시선을 동북아의 끝없이 망망한 밤하늘에 집중하면 룡정의 상공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영원히 지지 않고 유난히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볼수 있는데 그가 바로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중국공산당 원로이며 우리 민족의 걸출한 화가이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우는 한락연이다. 돌아오는 7월 30일은 그가 타계한지 68주년이 되는 날이다.

룡정의 오지에서 태여나 중국대륙은 물론 유럽의 10여개 나라를 넘나들면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한락연은 불사조와도 같은 인물이다. 하여 근간에 우리 한락연연구회에서는 한락연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많은 행사들을 개최하였다. 더우기 한락연의 생전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사진을 수집하고 그를 만나보았던 사람들을 탐방하면서 그의 개척정신과 불굴의 영혼을 기리는 사업은 너무나도 가슴벅차고 인상적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아직까지 아련하게 한락연을 기억하고 있는 세 녀인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인상깊고 감동적이고 추억적이여서 항상 머리속에서 보는듯이 살아 움직인다.

첫번째로 만난 녀인은 섬서성서안에서 만났던 양호성장군의 딸 양증영녀사였다.

1940년 한락연은 서안으로부터 보계를 거쳐 중경으로 돌아가던 중 공산당에 관한 활동을 한다는 혐의를 받고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보계사령부에 체포된다. 그들은 한락연을 서안 국민당성당부에 가두고 심문하였고 나중에는 그를 태양묘문거리 13번지에 설치한 특종구류소 감옥의 독방에 투옥시켰다.

이 두곳에 대한 유관 자료와 사진을 확보하는것이 우리가 서안에서 해야 할일이였다. 우리는 먼저 서안시주체로와 보은거리사이에 있는 태양묘문거리를 찾아갔다.

거리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꽤나 나이 먹어 보이는 로인들과 물었으나 태양묘문거리13호에 특종구류소감옥이 있었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서안시 지방지사무실로 찾아가 사업일군이 내여주는 유관자료를 들췄으나 헛수고였다.

우리는 림시로 조사방향을 조절하여 먼저 서안시북신가 새구역에 자리잡고 있는 《서안팔로군기념관》으로 찾아갔다. 서안시내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곳을 《7현장》 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섬서성은행에서 1935년 부터 개발하고 건설한곳으로 방만해도2천여개가 된다고 한다.

1985년1월 이 유적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였다. 오늘 이곳은 서안의 중요한 홍색관광명소로 되여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었다.

전람실에서 우리는 여러곳을 누비며 그토록 애타게 찾던 서안태양묘문감옥사진을 발견하였다. 엎드린 김에 절이라고 사업일군과 서안국민당성당부 사진도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람실에는 그런 사진이 없고 오후에 업무일군들이 출근하면 물어보라는것이였다.

길가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오후2시 출근시간이 되자 우리는 직접 관장실로 찾아갔다.

50대초반의 성이 상궁(上宫)씨인 녀성관장이 우리를 맞아주면서 자기들한테는 그런 사진과 자료들이 없고 극히 필요하면 양호성장군의 딸 양증영﹙杨拯英﹚씨가 지금 서안시 성정협사택에서 살고있으니 찾아가보라는 것이였다.

일생에 이런 기회도 드물었다. 우리는 유명한 장군의 딸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무작정 떠났다.

이리 묻고 저리 묻고 우리는 끝내 서안시 건국로 성정협사택 37호 1단원 1층 1호에서 살고있는 양증영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며 70여세 되여보이는 바깥노인이 누구냐며 경계의 어조로 물었다. 신분을 밝히고 사연을 말했더니 객실로 안내하고 조금 기다려 보라는것이였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저으기 놀랐다. 모든것이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박했다. 솔직히 장군의 딸이니 아주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으려니 여겼는데 너무나도 생각밖이였다.

기척이 나면서 붉은 바탕에 하얀 꽃을 수놓은 조끼를 입은 안로인이 조심조심 객실에 들어섰다.

보는 첫순간 양호성장군을 많이 닮은것이 알리였다. 후리후리한 키와 불거진 관골, 그리고 구리빛 얼굴에서는 더없이 강의하고 굳센 의지를 가진 분이라는것이 력력히 나타났다. 알고보니 다리가 골절되여 오래동안 투병중인데 요즘 좀 차도가 있다는것였다. 그러나 정신만은 74세되는 로인같지 않게 명석하고 똑똑하였다. 보통 관례는 먼저 성정협에 련락하고 찾아오는데 어떻게 왔느냐며 의아해 했다.

나는 한락연에 대해 상세히 말씀 올리고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그는 한참 기억을 더듬더니 태양묘문거리에 감옥이 있었고 섬서성국민당당부는 지금의 섬서일보사부근이라고 확실하게 찍어 말하였다. 또 부근에는 서안고중도 있었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근간에 출판한 《양호성전》 두책을 선물하고는 1937년 10월 한락연이 양호성장군과 함께 귀국할때 배의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펼쳐 보이고는 《이분이 한락연이얘요. 저는 어린 탓에 그를 직접보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를 통해 락연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었어요. 그림을 잘 그렸대요.》라고 말하였다. 내가 싸인을 부탁했더니 거절치 않고 들어주었다.

우리는 투병중인 로인에게 더 심려를 들이기 저어되여 기념사진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나는 비록 주글주글하고 거칠어졌지만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양증영씨의 손를 잡고 옥체건강을 기원했다.



양증영녀사의 자택에서 필자와 함께

두번째로 만난 녀인은 상해시포동남로 855호 세계광장28층에 자리잡고 있는 상해염보항사회공익기금 회리사장인 염명광녀사였다.



염명광녀사와 함께.(오른쪽이 한락연연구회 박호만회장)

100여년전 염명광녀사의 아버지인 염보항선생은 심양에서 《봉천고아학교》를 세우고 면비로 고아들과 빈곤한 아이들을 육성하였다. 항일전쟁이 제일 곤난한 시기에 중경에 있던 염씨네 집은 명실공히 많은 항일지사들과 사회각계 진보적 청년들의 활동장소와 피난소였다. 염보항부부의 헌신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정신에 감동된 주은래는 염씨네 집을 염가로점﹙阎家老店﹚이라고 친절히 불렀다.이시기 한락연도 이곳에 드나들며 심후한 감정을 쌓았다.

염보항선생의 유지를 계승하고 자선사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장학량장군과 염보항선생의 자식들인 염명복과 염명광여사는 상해염보항사회공익기금회를 성립하였다. 성립된20여년래 기금회는 교육﹑의료﹑불구자구제,양로,재해지구 구제등등 여러 방면에서 의의있는 활동을 벌려 전 사회적으로 찬양하고 신임하는 명실에 부합되는 자선기구로 되였다. 지금까지 구제한 물자와 현금은 인민페로 수억원에 달하고 국내13개 소수민족 지구가 그 혜택을 입었다고 하였다.

사전에 북경에 있는 한락연의 딸 한건립여사를 통해 사전련락을 하여 무난히 그를 만날수 있었다.

올해 80여세인 염명광여사는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정정했다.나는 한락연을 기념하여 그 사이 벌려온 사업들을 하나하나 설명드렸다.

그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한락연을 한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아버지 염보항과 한아저씨는 그 누구보다 절친하고 친밀한 사이였는데 중경시절에 한아저씨는 늘 우리집에 드나들었다고 하였다. 붙임성이 좋고 성질이 쾌활하고 사진도 찍고 그림도 척척 그리는 한락연을 아이들은 무척 따랐다고 한다. 한락연은 이름처럼 락천적이였고 늘 코노래를 흥얼흥얼 했는데 때로는 고향 룡정에 너희들과 같이 귀여운 아이가 있다고 눈물이 글썽해 하던 그의 모습이 보는것같다고 염명광녀사는 회억하였다. 염명광녀사는 아직도 당시 한락연에게서 배운 우리민족의 전통민요인 《도라지》와 《아리랑》곡조를 기억하고 그 자리에서 흥얼거리였다. 그러면서 두가족의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 세기를 넘어온 두혁명가족의 인연이라고 강조하면서 룡정에서 진행되는 한락연기념활동에 꼭 참가할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룡정시북안소학교에 가치가 5만여원에 달하는 교학의기를 기증하겠다고 확답하였으며 앞으로 한아저씨의 고향건설을 위하여 힘자라는대로 돕겠다고 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그는 약속대로 교학의기를 기증하였다.



북안소학교 박경자교장에게 교학의기를 증정하는 염명광리사장(우)

세번째로 만난 녀인은 장치중장군의 딸 장숙아녀사였다.

2011년 6월 4일, 북경54거리1호에 위치한 중국미술관에서는 한락연유작전람이 성황리에 열리였다.

중앙통전부 리덕수 부부장과 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 중국미술학원 김일룡교수, 중국화대가 황주의 부인 정문혜(郑闻慧)여사, 상숙홍선생의 딸 상싸나(常沙娜)여사,성성(盛成)의 아들 성승(盛胜)선생과 려정조장군의 아들 려동우(吕彤羽)그리고 최룡수교수의 부인 김정숙 등 수많은 북경의 지명인사들이 한락연의 135폭의 유작을 감상하고 높은 평가를 하였다.

중국미술관 범적안﹙范迪安﹚관장은 한락연의 일생은 중국현대예술발전에 공헌한 일생이며 그로하여 20세기 중국미술사에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수도 북경에서 열리는 고품격의 전람회에 처음 참가하는 나로서는 감회가 깊었다. 학자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일들이 얼마나 보람차고 의의가 있으며 또한 지금껏 해온 일들이 헛된 짓이 아님으로 하여 자호감을 느끼였다.

전람을 감상하고난 뒤 나와 한건립(한락연의 딸)여사는 북경시숭문문동대가22동2호(北京市崇文门东大街22栋02号)에서 살고 있는 장치중장군의 딸 장숙아녀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문에 들어서니 첫눈에 장치중이 모택동과 주은래와 함께 찍은 커다란 사진이 한눈에 안겨왔다. 그 옆에 장숙아여사가 젊었을적에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 주은래총리의 부인 등영초,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등 쟁쟁한 녀성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장숙아녀사는 올해 96세인데도 아주 정정하고 사유가 민첩했다.

그는 건립녀사를 보더니 너무나도 반갑다며 서로 뜨겁게 포옹하였다. 그는 한락연이 그린 신강천지풍경화그림을 한점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가면서 걸어놓는 끈이 끊어져 유리가 깨여지고 틀도 마사졌다. 다행히 그림은 파손되지 않았다.

장숙아여사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이 진귀한 유품을 어떻게 보관할가?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른겠는데 라고 궁리하고 궁리하던 끝에 한락연의 자식들에게 돌려주기로 작정하고 건립씨를 불렀다는것이였다.

내가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한락연을 기억하세요? 이 그림이 한락연이 선물한것이 맞아요?》라고 물었다.

《그럼, 만나보고 말고! 신강 우루무치에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건립이는 아버지를 꼭 떼 닮았다니까. 이 그림도 한락연이 직접 나에게 선물한것이지. 지난 50여년 동안 나는 우루무치에서 란주, 홍콩, 북경에 까지 옮겨살면서 줄곧 이 그림을 방에 걸어놓았어요.》

장숙아녀사는 조금 숨을 돌리고나서 계속 이야기 하였다.

《이 그림은 한락연이 1946년에 그린거얘요. 그 때는 신강천지로 오르는 길이 없어 일반 사람들은 감히 오를 엄두를 못냈어요. 그때 나는 우루무치에 살면서도 가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나 열정적이고 용감히 도전하는 한락연이 노새를 빌려 타고 천지에 올라 이처럼 아름다운 천지풍경화를 그렸어요. 그는 여러폭 가운데서 한폭을 나에게 선물했어요. 참 소중한거지요.》

장숙아녀사는 가슴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을 못잊어 눈꿉을 찍으면서 두손으로 그림을 어루만지였다. 마치도 한락연의 두손을 잡은것처럼.

《1991년 8월에 나는 전국정협에서 조직한 신강 고찰단성원으로 신강으로 갔어요. 그때는 이미 천지로 오르는 도로가 통하여 차를 타고 천지에 올랐어요. 한락연이 보고 그린 천지풍경을 직접 실감하니 너무나도 가슴이 북받치고 감회로왔어요. 마치도 한락연의 멋진 모습을 보는것만 같았어요.》말을 마치고 장숙아여사는 이윽토록 한건립녀사를 응시하였다.

한건립녀사는 이 그림은 아버지와 장치중장군 그리고 어머니와 장숙아여사의 우정뿐만아니라 우리 두 세대 혁명가족의 두터운 우정의 상징이므로 소중히 보관할것이라고 말하면서 북경신개로거리에서 장치중장군의 가족가 함께 살았던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나날을 추억하고 회상하였다.

장숙아녀사는 보모를 불러 그림을 조심스럽게 정히 포장하였다. 그는 이것이 한락연과의 친밀한 우정을 위해 자기가 할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며 더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그토록 심려하였다.

금전만능의 시대에 상상도 할수 없는 가치를 가진 진귀한 유품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마음과 정신적경지에 나는 놀랐으며 그것도 자신의 정신이 흐려지기전에 꼭 실행해나가는 그의 행동에서 나는 한 인간의 고귀한 삶이란 어떤것인가를 깊이 느꼈다.

장숙아녀사는 퇴직할때까지 영어교사로 일했는데 지금도 영어를 류창하게 구사할수 있었다. 부끄러운것은 내가 영어를 모른다는것이였다. 내가 그에게 한락연의 고향 룡정에서 한락연선생의 동상을 세웠다고 말하자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며 나의 손을 잡고는 몇해전만 같아도 도움을 줬을텐데하며 서운해하면서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보모가 약드실 시간이라고 하여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일어 났다. 문가에서 눈꿉을 찍으며 오래도록 서있던 장숙아녀사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그후 얼마 안되여 북경에 있는 한건립녀사로부터 장숙아녀사가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빌었다.

탐방길에서 만났던 양증영, 염명광, 장숙아 세 녀사들은 모두가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혁명가의 후예들이였지만 그토록 겸허하고 소박하고 붙임성이 좋았으며 인정미가 철철 넘쳤다. 그들 모두가 또렷한 기억속에 뜨거운 가슴에 한락연이라는 인간을 고이 품고있었다. 더욱 감격스러운것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한락연이라는 위인의 존재가치와 그의 불요불굴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을 더욱 실감하고 확고히 한것이다.



장숙아녀사(우)와 한락연의 딸 한건립.

한락연은 49세의 젊은 나이로 1947년 7월 30일, 우리 곁을 떠났다. 당과 정부에서는 한락연을 혁명렬사로 높이 추인하였다.

지금으로 부터 68년전, 한락연의 추도식 때 장치중장군은 《그대의 신묘한 솜씨는 고금에 없었는데 어이없는 재난을 당해 연기로 피여오르네》라고 만련을 썼고 한락연의 절친한 친구였던 도치악장군은 《준마를 벗삼아 거친 세상 달리고 외로운 성에 해가 지니 두보를 그리네. 상서로운 기운, 넘치는 시적재능과 필법은 왕유를 방불케 하네》라고 썼다.

한락연의 고향인 룡정의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는 아담지고 정갈한 락연공원이 조성되여 있다.

공원에는 구리빛으로 숙연한 한락연조각상이 경립되였고 그 뒤로는 락연정이라 명명한 주홍빛 루각이 나날이 발전해가는 룡정시가지를 굽어보면서 미소를 짓고있다. 찰랑이는 물소리와 새소리, 시름없이 뛰노는 아이들과 푸른 잔디밭속을 거니는 정다운 련인들의 모습 그리고 멀리서 길게 뿜어내는 기적소리가 서로 어우러져 한폭의 화려한 수채화를 련상케 한다.

불사조-불에 타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어쩌면 한락연은 불사조가 되여 늘 룡정의 하늘과 이 나라의 하늘과 우리들의 마음속을 휘젓고 날아다니고 있는것은 아닐가?

(글/사진 한락연연구회 부회장 김동수 제공)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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